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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630호 : 2025.04.20 - #시, 텍스트힙의 중심에 서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25년 4월
평점 :
텍스트힙의 정의를 먼저 살펴보자.
첫째, 책 전체를 읽지 않아도 몇 문장만으로 감정을 건드리거나 무드를 자아내는 글이다. 둘째, 감정 이입이 쉬운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 SNS에서 공유하기 좋은, 스타일이 있는 텍스트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더 나아가 텍스트힙은 문학을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전통적인 독서보다는 인상적인 구절 중심의 짧고 감상적인 콘텐츠를 향유하는 문화를 의미한다. 이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밈이나 감성 콘텐츠 큐레이션 트렌드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텍스트힙에 부합하는 두 시집이 있다.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와 유수연의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주 구매 독자층이 20대 여성인 이 시집들은 현대의 젊은 감성을 절묘하게 담아내고 있다.
> 현관에 놓인 신발의 구겨진 뒤축이 웃는 표정을 닮았어
> 너는 침대에 누워 있고
> 바람이 많이 부는 청보리밭에 가고 싶다
> 멸종된 기억을 가지고 싶다
> 너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릴 때
> 나는 사라진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 아침의 어둠이 이젠 익숙해
> 그래도 같이 씻을까
> 산책을 갈까
> 세상에서 가장 느린 산책로
>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 중에서
이 시를 통해 체념과 무기력에 잠식되지 않고, 상상과 사랑,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는 젊은 세대의 모습이 그려진다. 일상의 작은 순간들과 감정들이 섬세하게 포착되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를 읽고 느낀 감정은 '쉽고 공감도가 높다', '감성이 짙다', '닫힌 마음을 일깨우는 시심이 넘실거린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시집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위로를 찾는다.
물론 텍스트힙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냉소적 마음도 존재한다. 책의 전체 메시지를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조각난 파편 같은 이미지만 전시하면서 허영을 채우고 SNS에 글귀만 베끼거나 사진만 찍어 올리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SNS의 상용화는 거부할 수 없는 세계의 조류이며, 이를 통한 도서의 홍보와 전시가 결국 많은 독자를 만나게 할 접촉면을 무수하게 증가시킨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텍스트힙은 새로운 문학 향유 방식으로서 기존의 문학 소비 형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은 텍스트힙에 가장 잘 어울리는 형태의 책이다. 짧고 간결하여 시간 날 때마다 한 편씩 읽고 덮기 좋으며, 얇고 가벼운 책 두께는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도 부담이 없다. 무엇보다 밀도 높은 언어로 구성돼 있어 필사하기에도, SNS에 공유하기에도 적합하다.
이처럼 시는 현대 독자들의 소비 패턴에 자연스럽게 부합하며, 텍스트힙이라는 새로운 문화 현상의 중심에 서 있다. 이는 시라는 장르의 새로운 부흥기를 예고하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텍스트힙 현상은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디지털 시대의 문학 소비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언어의 아름다움과 정서적 울림을 갈망한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시는 그 본질적 특성—압축된 언어, 함축적 의미, 감정의 직관적 표현—으로 인해 이 새로운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텍스트힙은 시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가 가진 본연의 힘을 현대적 맥락에서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문학이 얼마나 유연하게 진화하며 시대와 호흡하는지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지역 서점의 홀로서기 가능성, 계엄 이후의 이야기, 가장 추운 곳에서 가장 따뜻한 책이 탄생하기까지(나의 폴라 일지)의 이야기, 종교의 사회정치적 역할은 무엇인가 등의 칼럼을 흥미롭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