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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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고백을 하나 하자면, 이 책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뱀파이어의 이야기'를 상상했습니다. 2005년 6월이면 만화 『헬싱』을 접한 지 두 달이 채 안 되는 때였고, '뱀파이어 소설의 전설'이라던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제목의 '나'는 뱀파이어이겠거니 생각해버린 것이죠.

이야기를 재밌게 듣는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은 '사전 지식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듣기'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눈 깜빡이는 것 손가락 까딱이는 것에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즐거워하는 성격이라, 사전지식이라는 것을 갖고 있으면 그런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이야기를 듣는 동안은 다음 이야기를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라, 이야기의 플롯도 장르도 모른 채로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볼 때는 사전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봤다고 할 수 있겠네요. 소재를 '잘못' 알고 있었고, 장르도 흔히 접하는 '뱀파이어 소설'의 공포가 아니었고, 작품의 길이도 책 두께만큼의 장편이 아닌 '중편'이었으니까요. (이 책에는 표제작인 중편 「나는 전설이다」 외에도 10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아직 보지 않았어도 이제 (책이 나온 지 10개월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여기저기의 홍보/감상글을 접했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지만 혹시나 모르실 분을 위해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3차 대전이 끝난 후, 환경의 파괴와 함께 알 수 없는 질병이 지구를 덮치게 됩니다. 이 질병에 걸리면 죽어도 부패하지 않고 낮에는 자다가 밤에 깨어나며 엄청난 파괴력과 치유력을 가진 존재, 즉 흡혈귀가 되어버립니다. 운 좋게도 의도하지 않은 예방주사로 살아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밤마다 공격해 오는 흡혈귀들과 싸우며, 이미 죽어 흡혈귀가 되어버렸을 가족들의 기억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면서도 낮에는 간밤의 전투의 뒤처리를 하고, 집 안팎을 정리하며,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자고 있는 흡혈귀를 죽이고, 홀로 남았다는 외로움에 떨면서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집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어딘가 좀비 호러 액션물이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이 『레지던트 이블』이니 『새벽의 저주』니 하는 좀비 호러 액션물의 모태가 되는 작품이라고 하긴 하지만요.) 하지만 위에 나열한 사건들은 문장 마지막에 말했듯이 주인공의 '일상'일 뿐입니다. 작가가 보여주려 하는 내용이 설마 '아침 몇 시에 일어나서 뭘 먹고 몇 시에는 어디를 갔다가 몇 시에 뭘 먹고 몇 시에 잤답니다'의 나열은 아닐 테지요.

글 앞부분에서 주인공의 (일반적이지 않은) 독특한 일상으로 흥미를 자아낸 후에는 그 일상을 어긋냄으로서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세상에 인간은 오직 나 하나뿐인가 하는 절망감에 젖고 그 절망감에마저 익숙해진 주인공에게 살아있는 개가 한 마리 등장하는 거죠.

이야기를 흥미 있게 만드는 하나의 축이 저 '독특한 일상과 그 일상의 파괴'라면 또 다른 축은 '흡혈귀의 전설에 대한 과학적 탐구'입니다. 흡혈귀는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난다. 흡혈귀는 상처가 나도 금방 회복된다. 흡혈귀에게 일반인이 피를 빨리면 그 사람도 흡혈귀가 된다. 흡혈귀는 흐르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 흡혈귀는 마늘과 십자가를 싫어한다. 흡혈귀는 박쥐로 변신할 수 있다. 주인공은 (또는 작가는) 이런 수많은 속설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 시도합니다.


사실 나는 「나는 전설이다」를 거의 끝까지 읽도록 공포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보다는 헐리웃 영화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참 재미있지만 공포소설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던 와중에 이야기는 갑자기 끝나버렸고, 저는 한참을 허탈해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끝낼 수가 있는 거지?

그런데 그 뒤의 단편을 읽던 중 우연히 책장이 맨 뒤로 넘어갔고, 역자 후기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정확히는 역자가 인용한 「나는 전설이다」의 한 문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놀라서 후다닥 앞으로 넘겼지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어 봤습니다. 아아, 이게 이런 거였구나. 책을 헐리웃 영화 보듯 읽다 보니 마지막 몇 페이지에 숨어 있던 절대적인 공포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거죠. 스포일러가 될 테니 허연 글씨로 가리자면,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양눈박이가 병신이라.


뒤에 붙어 있는(이라고 표현하기엔 이게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단편들은 작가의 색깔이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입니다. 일부 작품은 헐리웃 공포 영화를 보는 것 같이 흥미진진하고, 일부 작품은 뒷장을 넘기기가 싫어질 정도로 무서우며, 일부 작품은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미적지근합니다. (미적지근한 것들은 아마도 스티븐 킹을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과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죽음의 사냥꾼」(영화 『사탄의 인형』을 연상시킨다)과 「매드 하우스」, 「전화벨 소리」를 가장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장례식」과 「전화벨 소리」는 그 소재의 재기발랄함이 넘쳐 흐르더군요. 이해력이 부족한 것인지 「루피 댄스」와 「엄마의 방」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싶기도 하고. 나머지는 그냥저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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