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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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지. 감각적인 건 왠지 피상적일 것 같은데, 감각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면 놀라운 깊이를 보여주는 거.

사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슬픔이여 안녕>을 어릴 때 읽었는데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런데 이 <패배의 신호>를 읽자니 딱 내가 글이나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나와서 읽으면서 웃었다. "문화를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감성적인 기억에 의해서만 좋아했다. (p.22)" - 이 구절. 읽고 기억에 남지 않은 작품은 그냥 안 좋은 작품인걸로 - 독서를 그렇게 했고, 음악도 난 그렇게 듣는다. 제목이니 주인공 이름이니 외워지지 않는 건 내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한 거니 그냥 잊어버리는 걸로...그렇게 책을 읽었더랬다. <슬픔이여 안녕>은 그냥 잊어버린 작품이었다. (요샌 기억력이 나빠져서 일부러 외우지 않으면 다 잊어버리는 터라, 일부러 기억하려고 애써야 한다.)

젊은 시절에 타올랐던 강렬한 사랑을 매우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디안이나 샤를같은 나이들고 성숙한 이들이 옆에 등장하면서 그냥 강렬함에 탐닉하는 서사로 끝나지 않고, 깊은 층위가 생겨나고 있다. 사강이 나이가 들어 생긴 시선이라 외려 이게 더 좋다. 잘 모르는 미래의 삶으로, 모르기에 용감하게 약진하는 이야기라든가, 오로지 상대와 나 밖에 없는 강렬한 서사는 숨구멍도 찾을 수 없는 덫에 갇혀서 익사하는 이야기가 되지 않나.

젊은 시절의 사랑 이야기를 쓰는 데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나같으면 이렇게 아름답게 못 쓸 것 같다. 왜냐면 아름답게 쓰는 것 자체가 진실을 훼손하는 불경을 저지르는 것 같아서. 지나간 사랑이 아름다웠던가? - 그런 부분도 있지만, 통속으로 전락했고, 유치했고, 도망친 난파선 같은 걸. 예상했던 뻔한 암초에 부딪혀 가라앉는 배 안에서 악다구니를 벌이다 간신히 구명정을 타고 탈출한 것 같은걸.

몸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마음이 질주하는 사랑, 해볼만 하다. 다들 한번쯤은 해보았겠지. 그러나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강렬했고, 유치했고, 서로를 사랑한 만큼 상처를 주었다. 루실이 앙투안에게 느꼈던 것처럼, 그가 나를 사랑한 내 매력이 그가 내게서 견딜 수 없어하는 약점이 되는 경험을 했고, 아마 남자를 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지 싶다. 샤를처럼 루실의 모순 때문에 루실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런 사랑을 해보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그에 대해 쓰고싶지도 않다. 다만 읽어서 다행이다. 어떤 감각은 또 그 감각에 대한 추억은 결국 궁극에 도달한다. 그 궁극이 사랑일 수도 아닐 수도, 사랑했다가 필연적으로 잃어버림 일 수 도 있지만, 그걸로 족한 빛나는 재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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