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뒤바뀐 사랑의 운명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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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십대 시절 집에 세계단편선집이 있었다. 녹색광선의 <눈보라>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중 네 편은 그때 읽었다는 걸 다시 읽으며 알았다. 푸쉬킨 작품을 읽었었다는 기억도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재발견을 하는 경험을 했다. 😁

다시 읽어본 푸쉬킨의 단편에서 강력한 배경으로 역참이 등장한다. “눈보라”와 “역참지기”에선 빠지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된다. 드넓은 러시아 땅에선 마구간으로 연결해 지친 말을 묶어놓고 새로운 말을 받아가는 시스템인 역참이 없었다면 19세기말까지 사람과 물자와 통신의 이동은 불가능했을 것 같다. 그리고 당연히 남자들은 말을 타고 역참에서 말을 바꿔가며 여자의 삶에 등장한다. 물론 이 남자들은 러시아 청년들답게 키크고 슬림한데다 달라붙는 군복을 입고 등장해야 한다. 😃 이들이 말을 타고 등장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여기에 러시아 적인, 지극히 러시아 적인 정서들이 버무려진다. 모욕을 받으면 참지말고 결투를 그것도 한발씩 번갈아 쏘는 러시아 식 결투를 벌여야하고, 전쟁에서 속절없이 죽어버린 젊은이는 잊혀지고 훈장을 달고 돌아온 군인들이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트로피로 쟁취될) 아리따운 아가씨들의 흠모의 대상이 된다. 남자들은 적당히 피지배계급 여자들과 재미를 보아도 되고, 불멸의 사랑은 귀족 아가씨와만 (주로) 한다. (귀족 아가씨가 아닌 경우, 출신 집안을 숨기고 연을 끊어야 한다.) 물론 전쟁 영웅에 대한 칭송과 흠모는 다른 문화에서도 비슷하나 푸쉬킨의 단편 속 러시아에선 이게 더 극적이다.

전형적인 로맨스 역할극의 세팅을 두고 푸쉬킨은 게임을 벌이듯 글을 엮어낸다. 운명이 장난을 치고 (눈보라), 깜찍한 여자가 장난을 친다 (농노 아가씨), 장난처럼 한 행동과 말은 몇 년 후 (한 발의 총성) 혹은 악몽(장의사)으로 돌아와 그 댓가를 청구하며, 장난처럼 여자를 낚아채 간다 (역참지기). 삶이 마치 거대한 게임판처럼 보인다. 놀라운 점운, 인간은 희화화되지 않는데 인간의 역할은 희화화 된다. 사랑하는 영웅 남자 역할, 사랑받기 위해 아리따워야하는 아가씨의 역할, 사회가 배정한 역할에 너무 진지한 장의사 등은 희화화된다. 가벼우나 뜨끔하다. 삶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장기판의 말이 되는 것 같지않은가 하는 뜨끔함이 있다.

물론 이성애 로맨스에는 역할극이 언제나 있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두고, 개개인들은 자신을 판 돈 삼아 놀아야 한다. 이걸 진지하게 비판한다면 역할에 자산을 맞추느라 분열하는 개인들의 고통을 말할테지만, 푸쉬킨은 다른 방법을 택한다 - 그거 다 게임이고 장난이야. 그런데 그 게임과 장난을 거하게 하다보면 인생이 끝나더라? 그렇게.

흑인의 피가 섞였다는 자신의 소수성을 가지고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 (심지어 짜르도 탐을 내는 미녀)라는 트로피를 쟁취하는 게임을 하느라, 푸쉬킨도 자못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게임판과 역할극을 꿰뚫어보는 작품을 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남자다움을 사수하느라, 혹은 궁정 귀족들의 정치 게임판에서 조작된 것같은 루머로 ‘남자다움’역할 놀이에 밀려 그 역할을 거부못하고 결투하다 죽은 푸쉬킨의 삶은, 자기 작품 속 역참지기 같기도 하다. 즐거운 게임판에서 개인은 비극적이다.

#눈보라. #푸쉬킨. #녹색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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