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이시하 

 

 낡고 어두운 그림자를 제 발목에 묶고 생의 안쪽으로 타박타박 걸어들었을 테지 비에 젖은
 발목을 끌며 어린 날개를 무겁게 무겁게 퍼덕였을 테지, 가느다란 목덜미를 돌아 흐르는 제 절박한 울음소리를 자꾸자꾸 밀어냈을 테지 여물지 못한 발톱을 내려다보며 새는, 저 혼자 그만 부끄러웠을 테지, 그러다 또 울먹울먹도 했을 테지  

 어둠이 깊었으므로
 이제, 
 어린 새의 이야기를 해도 좋으리 

 나지막이 울음 잦아들던 어깨와 눈치껏 떨어내던 오래된 흉터들을 이제, 이야기해도 좋으리 잊혀져간 전설을 들려주듯,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낯설고 차가운 이국의 신화를 들려주듯 이제, 당신에게 어린 새를 이야기해도 좋으리 

 새는, 
 따스운 생의 아랫목에
 제 그림자를 누이고
 푸득푸득, 혼잣말을 했을 테지
 흥건하게 번지는 어둠을
 쓰윽, 닦아내기도 했을 테지 

 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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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왜 왔니 

 이시하 

 

어둠을 파고 시궁쥐 눈깔 같은 봉숭아 씨앗을 심을래요 모르는 집 창문에 애절히 피어나 모르는 그들을 울게 할래요 봉숭앗빛 뺨을 가진 어린 손톱에 고운 핏물을 묻힐래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서둘러야 해요 나를 통과해 가는 그대의 눈을 볼래요 너무 오래 견딘 상처는 아물지 않아요 몹시 처량해진 나는 모르는 집 창문 밑에서 울 거예요 당신을 부르며 울 때 사람들은 어두워져요 

문이 닫혀요 

이렇게 부질없는 이야기는 처음 해봐요 나는 늘 술래이고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해요 가위바위보가 문제에요 나는 주먹만 쥐고 있거든요 아무도 내게 악수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요 당신도 곧잘 숨는다는 걸 알아요 이제는 내가 숨을래요 꽃 피지 않는 계절에 오래도록 갇혀있을 거예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봉숭아꽃이 만발했어요 보세요 정말 내가 모르는 집이에요 창문 밑에 피어난 저 붉은 봉숭아! 무슨 꽃은 봉숭아꽃이어야 해요 당신은 봉숭아꽃을 찾으러 온 거예요 나는, 나는 꽃 피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찾지 못해요 문은 열리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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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 

 최금진
 

저녁이면 가래가 그득해진 목이 아프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내 속에 뭉쳐진 욕망의
노폐물 같은 것이다 갈수록 말은 적어지고
퇴근길 혼자 걸어오다 생각하는 하루도
즐겁거나 고단하거나 결국 가래로만 남는다
아내의 부쩍 줄어든 말수도 그렇다
목에 관한한 우리는 나눌 수 없는 제 몫의 아픔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뿌옇게 눈을 가리고 저녁이 오고 저 황사바람은
잠든 후에도 우리의 이부자리와 옷의 식탁에
수북히 먼지를 쌓아놓고 갈 것이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파고 들어와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인간의 인정이란 것도
침묵 앞에선 속수무책
아내가 화장실에서 인상을 쓰며 가래를 뱉는다
잠결에 깬 아이의 기침소리가 깊다
저 어두운 공중 위에는 뿌연 황사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잔뜩 그을은 밤의 램프를
털어내고 있다
안녕 아내여 잘자라 내일은 일요일
동네 약국도 문을 닫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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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유병록 

 

 검은 행렬이 이동한다 구부러진 길을 따라 눈 쌓인 비탈을 지나 아주 긴 말줄임표처럼 천천히 걸어간다  

 도착지에 가까워지자 자꾸 무릎이 꺾여 주저앉는데 얼어붙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다 가슴을 치다 울음을 터뜨리는데 

 선두에서 죽은 입술이 피리를 부는가 관 속의 두 손이 북을 두드리는가 행렬은 멈춰 서지 않고 

 예고되지 않았는지 이미 건너간 후였는지 앞세우고 가는 사진 속 얼굴은 웃고 있다 죽음이 틈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 살아서 이렇게 환하게 웃은 적이 있었던가 살아서 이만한 대열을 이끈 적 있었던가 

 수천수만 개의 바구니 같은 눈송이가 지상으로 내려오고 검은 외투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 

 웃음이 통곡의 대열을 이끌고 행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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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지고 마는  

유병록 

 

 고통을 견디다 쓰러진 자들은 대게 엎드린 상태로 발견된다는 거 

 누군가에 업힌 모습이라는 거 
 어미나 할미의 등을, 그 등에 흐르던 땀을 기억해 내려는 안간힘을 쓴 표정이라는 거
 사이에 흐르는 땀이란 통점을 어루만지는 입술이라는 거 

 아무도 부축하지 않는 생은 지구가 업고 간다는 거
 육교처럼 엎드린 채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는 거
 애써 통증을 숨기며 웃는 자의 눈썹을 닮아간다는 거 

 구부러진 풍경의 제목으로는 운명보다 참혹이 어울린다는 거, 어쩌면 망명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거 

 엎드린 자를 바로 누여 장례를 치르려면 지구가 내려 놓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 

 그래도 산 자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건 구전되는 풍습이라는 거 
 선택받은 자만이 바로 누워서 죽는 행운을 누린다는 거  

 엎드린 채 죽어간 자들은 추운 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두 손 두 발로 꼬옥 지구를 끌어안고 있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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