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왜 왔니 

 이시하 

 

어둠을 파고 시궁쥐 눈깔 같은 봉숭아 씨앗을 심을래요 모르는 집 창문에 애절히 피어나 모르는 그들을 울게 할래요 봉숭앗빛 뺨을 가진 어린 손톱에 고운 핏물을 묻힐래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서둘러야 해요 나를 통과해 가는 그대의 눈을 볼래요 너무 오래 견딘 상처는 아물지 않아요 몹시 처량해진 나는 모르는 집 창문 밑에서 울 거예요 당신을 부르며 울 때 사람들은 어두워져요 

문이 닫혀요 

이렇게 부질없는 이야기는 처음 해봐요 나는 늘 술래이고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해요 가위바위보가 문제에요 나는 주먹만 쥐고 있거든요 아무도 내게 악수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요 당신도 곧잘 숨는다는 걸 알아요 이제는 내가 숨을래요 꽃 피지 않는 계절에 오래도록 갇혀있을 거예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봉숭아꽃이 만발했어요 보세요 정말 내가 모르는 집이에요 창문 밑에 피어난 저 붉은 봉숭아! 무슨 꽃은 봉숭아꽃이어야 해요 당신은 봉숭아꽃을 찾으러 온 거예요 나는, 나는 꽃 피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찾지 못해요 문은 열리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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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 

 최금진
 

저녁이면 가래가 그득해진 목이 아프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내 속에 뭉쳐진 욕망의
노폐물 같은 것이다 갈수록 말은 적어지고
퇴근길 혼자 걸어오다 생각하는 하루도
즐겁거나 고단하거나 결국 가래로만 남는다
아내의 부쩍 줄어든 말수도 그렇다
목에 관한한 우리는 나눌 수 없는 제 몫의 아픔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뿌옇게 눈을 가리고 저녁이 오고 저 황사바람은
잠든 후에도 우리의 이부자리와 옷의 식탁에
수북히 먼지를 쌓아놓고 갈 것이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파고 들어와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인간의 인정이란 것도
침묵 앞에선 속수무책
아내가 화장실에서 인상을 쓰며 가래를 뱉는다
잠결에 깬 아이의 기침소리가 깊다
저 어두운 공중 위에는 뿌연 황사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잔뜩 그을은 밤의 램프를
털어내고 있다
안녕 아내여 잘자라 내일은 일요일
동네 약국도 문을 닫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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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유병록 

 

 검은 행렬이 이동한다 구부러진 길을 따라 눈 쌓인 비탈을 지나 아주 긴 말줄임표처럼 천천히 걸어간다  

 도착지에 가까워지자 자꾸 무릎이 꺾여 주저앉는데 얼어붙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다 가슴을 치다 울음을 터뜨리는데 

 선두에서 죽은 입술이 피리를 부는가 관 속의 두 손이 북을 두드리는가 행렬은 멈춰 서지 않고 

 예고되지 않았는지 이미 건너간 후였는지 앞세우고 가는 사진 속 얼굴은 웃고 있다 죽음이 틈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 살아서 이렇게 환하게 웃은 적이 있었던가 살아서 이만한 대열을 이끈 적 있었던가 

 수천수만 개의 바구니 같은 눈송이가 지상으로 내려오고 검은 외투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 

 웃음이 통곡의 대열을 이끌고 행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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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지고 마는  

유병록 

 

 고통을 견디다 쓰러진 자들은 대게 엎드린 상태로 발견된다는 거 

 누군가에 업힌 모습이라는 거 
 어미나 할미의 등을, 그 등에 흐르던 땀을 기억해 내려는 안간힘을 쓴 표정이라는 거
 사이에 흐르는 땀이란 통점을 어루만지는 입술이라는 거 

 아무도 부축하지 않는 생은 지구가 업고 간다는 거
 육교처럼 엎드린 채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는 거
 애써 통증을 숨기며 웃는 자의 눈썹을 닮아간다는 거 

 구부러진 풍경의 제목으로는 운명보다 참혹이 어울린다는 거, 어쩌면 망명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거 

 엎드린 자를 바로 누여 장례를 치르려면 지구가 내려 놓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 

 그래도 산 자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건 구전되는 풍습이라는 거 
 선택받은 자만이 바로 누워서 죽는 행운을 누린다는 거  

 엎드린 채 죽어간 자들은 추운 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두 손 두 발로 꼬옥 지구를 끌어안고 있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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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행렬 

   유병록 

 

 관을 내려치는 못질처럼 비가 쏟아진다 

 구름의 시절은 땅속으로 질주해 사라진다 어쩌다 이 땅에 도착한 물방울은 이제 부서진 몸으로 딱딱한 세계의 한쪽 귀퉁이에서 길을 시작한다 

 흘러가는 것은 천천히 추락하는 것 

 굽이를 지나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물방울, 투두둑 뼈가 부서지고 요동치던 체온이 탈출한다 살점이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수차례 정신을 잃고 혼절하는 물방울 

 누군가의 통증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오해, 구름조차 지상의 비명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 

 더는 견고한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데 무엇도 물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데 

 누더기를 걸친 성자의 행렬처럼 흘러가는 물, 조금씩 더 남루해질 테고 지상에서 끝내 구름의 체온을 회복하지 못한 채 증발해 버리겠지만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동그라미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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