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 

 최금진
 

저녁이면 가래가 그득해진 목이 아프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내 속에 뭉쳐진 욕망의
노폐물 같은 것이다 갈수록 말은 적어지고
퇴근길 혼자 걸어오다 생각하는 하루도
즐겁거나 고단하거나 결국 가래로만 남는다
아내의 부쩍 줄어든 말수도 그렇다
목에 관한한 우리는 나눌 수 없는 제 몫의 아픔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뿌옇게 눈을 가리고 저녁이 오고 저 황사바람은
잠든 후에도 우리의 이부자리와 옷의 식탁에
수북히 먼지를 쌓아놓고 갈 것이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파고 들어와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인간의 인정이란 것도
침묵 앞에선 속수무책
아내가 화장실에서 인상을 쓰며 가래를 뱉는다
잠결에 깬 아이의 기침소리가 깊다
저 어두운 공중 위에는 뿌연 황사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잔뜩 그을은 밤의 램프를
털어내고 있다
안녕 아내여 잘자라 내일은 일요일
동네 약국도 문을 닫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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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유병록 

 

 검은 행렬이 이동한다 구부러진 길을 따라 눈 쌓인 비탈을 지나 아주 긴 말줄임표처럼 천천히 걸어간다  

 도착지에 가까워지자 자꾸 무릎이 꺾여 주저앉는데 얼어붙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다 가슴을 치다 울음을 터뜨리는데 

 선두에서 죽은 입술이 피리를 부는가 관 속의 두 손이 북을 두드리는가 행렬은 멈춰 서지 않고 

 예고되지 않았는지 이미 건너간 후였는지 앞세우고 가는 사진 속 얼굴은 웃고 있다 죽음이 틈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 살아서 이렇게 환하게 웃은 적이 있었던가 살아서 이만한 대열을 이끈 적 있었던가 

 수천수만 개의 바구니 같은 눈송이가 지상으로 내려오고 검은 외투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 

 웃음이 통곡의 대열을 이끌고 행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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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지고 마는  

유병록 

 

 고통을 견디다 쓰러진 자들은 대게 엎드린 상태로 발견된다는 거 

 누군가에 업힌 모습이라는 거 
 어미나 할미의 등을, 그 등에 흐르던 땀을 기억해 내려는 안간힘을 쓴 표정이라는 거
 사이에 흐르는 땀이란 통점을 어루만지는 입술이라는 거 

 아무도 부축하지 않는 생은 지구가 업고 간다는 거
 육교처럼 엎드린 채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는 거
 애써 통증을 숨기며 웃는 자의 눈썹을 닮아간다는 거 

 구부러진 풍경의 제목으로는 운명보다 참혹이 어울린다는 거, 어쩌면 망명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거 

 엎드린 자를 바로 누여 장례를 치르려면 지구가 내려 놓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 

 그래도 산 자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건 구전되는 풍습이라는 거 
 선택받은 자만이 바로 누워서 죽는 행운을 누린다는 거  

 엎드린 채 죽어간 자들은 추운 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두 손 두 발로 꼬옥 지구를 끌어안고 있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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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행렬 

   유병록 

 

 관을 내려치는 못질처럼 비가 쏟아진다 

 구름의 시절은 땅속으로 질주해 사라진다 어쩌다 이 땅에 도착한 물방울은 이제 부서진 몸으로 딱딱한 세계의 한쪽 귀퉁이에서 길을 시작한다 

 흘러가는 것은 천천히 추락하는 것 

 굽이를 지나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물방울, 투두둑 뼈가 부서지고 요동치던 체온이 탈출한다 살점이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수차례 정신을 잃고 혼절하는 물방울 

 누군가의 통증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오해, 구름조차 지상의 비명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 

 더는 견고한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데 무엇도 물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데 

 누더기를 걸친 성자의 행렬처럼 흘러가는 물, 조금씩 더 남루해질 테고 지상에서 끝내 구름의 체온을 회복하지 못한 채 증발해 버리겠지만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동그라미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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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유병록 

  

둘로 쪼개진다 

부풀어 오르면 균열이 많아지고 반경이 넓어지면 경계가 길어지는 

팽창의 역사가 수없이 증명해온 습성 

커다랄수록 사과는 쉽게 쪼개진다 쉽게 둘이 된다 

한때 지척이었던 거리는 아득해진다 

사이에 계곡이 깊고 안개가 끼고 어둠이 주둔한다 

간극에 다리를 놓아도 금세 썩어 크레바스로 무너져 내리고 

건너간 자는 아주 드문 곳 

균열은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는 것을 위해 찾아온다 

시간에 누적된 미세한 균열은 뒤늦게 발견된다 

균열의 나이테라 불리는 시간 

쪼개진 단면은 붉게 변해 서로 낯선 얼굴을 한다 

비애가 탄생하고 죄와 용서가 분리된다 

끝내 바다를 사이에 둔 대륙처럼 멀어지고 서로를 모방하는 표정이 실패할 때 

이쪽 기슭의 눈먼 벌레들이 더는 저쪽의 시간으로 건너가지 못할 때 

사이에 부는 바람에도 균열이 인다 

지구의 한쪽 모퉁이 쪼개지는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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