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철도 분실물센터 펭귄철도 분실물센터
나토리 사와코 지음, 이윤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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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추억...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펭귄철도 분실물센터

 

 

 





 


펭귄철도 분실물센터는 세 개의 단편과 하나의 중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제목을 보고 예상하기로는 펭귄이 있는 독특한 철도가 있으며그 안에 있는 분실물센터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각각 '잃어버린 것'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지겠구나싶었다귀엽고 사랑스러운가볍게 읽기 좋은 이야기들이겠구나 싶었는데생각보다 찡한 구석이 많았기에 개인적으로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떠오르기도 했다개인적으로는 나미야보단 펭귄철도가 더 마음이 간다.

 

'나토리 사와코라는 작가의 소설이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품으로정말 잘 쓰인 작품이다묘사에서 특히 감탄하게 되는데마치 영상을 보는 듯한생생한 묘사는 작가가 게임과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썼었던 이력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 같다캐릭터 하나 하나 다 허투루 쓰지 않고 애정을 가지고 생명력을 부여했음을 잘 느낄 수 있었다펭귄이 등장할 때는 이 무슨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일본 특유의 감성을 생각해보면 이런 환상처럼 느껴지는 설정도 가능한 일인 듯 싶었다그게 붕 뜨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게 큰 특징이다.



**

 

 < 제 장 고양이와 운명 >

 

 

쿄코는 대학 동기인 미치의 집을 들렸다 우연히 타게 된 전철에서 펭귄을 마주하게 된다철도에 타고 있는 '진짜살아있는 펭귄아치형 머리띠 무늬의 둥근 머리에, 오렌지 색 주둥이플리퍼라 불리는 날개 같은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있는 펭귄놀란 풍경 속에 쿄코를 제외한 다른 승객들은 평온하기만 하다혼자 당황한 모습을 들키지 않게 노력하다그만 자신이 매일 같이 들고 다니던 메신저 백을 놓고 내려버린다미치와의 통화로 자신이 탔던 나미하마선의 유실물 보관소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고전화를 하게 된 쿄코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같은 노선 같은 시각에 같은 소지품을 잃어버린 운명 같은 일이 벌어졌음을.

 

쿄코의 메신저 백 안에 든 것은 작은 유골단지그것도 반려묘 후쿠의 유골단지였다유실물 보관소에 있는 우미하자마 역에 내린 쿄코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한 펭귄을 다시 보게 되고보관소 직원인 모리야스 소헤이를 만나게 된다붉은 머리에 오리주댕이 처럼 툭 튀어 나온 입술애교 섞인 입가의 훈남 청년은 어딜 봐도 밴드활동을 하는 대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운명'에 기대어 같은 소지품을 잃어버리게 된 인물은 이와미라는 구릿빛 피부의 듬직하게 생긴 한 남자였다.

 

쿄코는 오래 전 짝사랑의 엇갈림그 실연을 통해 상처를 받았고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쿄코의 메신저 백을 자신의 물건인 줄 착각하여 가져간 이와미는 자신의 물건을 알아볼 수 있다 확신하지만두 유골단지 모두 확인하라는 소헤이의 말에 망설이는 쿄코무언가에 홀리듯이 펭귄을 따라 다시 탄 전철에서 후쿠를 처음 발견했던 장소로 향하게 되고동행한 이와미에게 자신의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진심 어린 조언에 쿄코의 마음 속엔 작은 파동이 인다. 이내 이와미의 진실을 알고 놀라게 되지만다시 엮인 인연에 대해 자신이 운명을 만들어 가기로 결심한다.

 

펭귄이 처음 등장하는 에피소드이를 대하는 쿄코의 생각과 행동이 마치 눈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했다운명을 떠올리는 것짝사랑 하는 상대와 자신의 친한 친구가 사랑에 빠진 순간을 목격하게 된 쿄코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핑계로 이런 운명적 사랑을 깨보려 노력하지만헛된 짓이란 걸 깨닫는다구멍 난 마음에 잘해주지 못했던 반려묘 후쿠에게콩찹쌀떡처럼 둥글고조용히 죽어갔던 그 고양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고그 마음이 진솔하게 전달되니 안타깝고 짠했다새로 물건을 '잃어버리면'서 운명을 개척해나간 쿄코의 앞으로의 나날들이 기대되기도 했다.

 

 

이리저리 부닥치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살아가야 한다자신과 이와미의 얼굴이 떠오른다저세상으로 가버린 후쿠의 얼굴이 떠오른다저마다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우리 옆에 있어줄까?

물보라가 만들어낸 등불을 따라가는 것처럼 앞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검은 바다에서 펭귄이 로켓처럼 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91

 

 

 < 제 장 팡파르가 들린다 >

 


 

등교거부 히키코모리가 된 겐게임 상에서 의지하던 한 사람이 은퇴를 선언하자 그를 위한 아이템 획득을 위해 공을 들인다집 밖을 나서지 않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나 낯설고 힘들지만그 아이템을 가진 사람이 자신에게 준 미션을 클리어 하기 위해 거리로 향한다그렇게 '모험'을 하던 도중 겐이 소중하게 간직하던 부적어머니가 주신 주머니 속 소중하게 간직하던 러브레터를 잃어버리게 되고낯선 생물체인 우리의 펭귄을 발견하게 된다.

 

역시나 홀리듯 펭귄을 따라가니 오렌지색 주둥이로 툭툭 두드리는 곳벽과 같이 생긴 미닫이 문이 열리자 그곳이 분실물센터임을 알게 된다분실물 접수를 하고 있자겐의 물건이 이미 도착해있음 알게 되고그 물건을 주어준 사람은 다름아님 러브레터를 쓴 당사자였음을 알게 된다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게 될지도 모를 그 러브레터를 써준 여학생 마히로초등학교 같은 반 반장이었던 소녀고지식하고 커다란 둥근 안경에 버섯머리로 놀림 받던 그 아이가 아름다운 미소녀로 성장해 있었고겐은 당혹스러우면서도 설레기 시작한다.

 

오랜만의 재회도 모자라 모험을 같이 하자고 제안한 마히로 덕에 미션을 무사히 클리어 하는 듯 싶었지만씁쓸한 결말만이 남게 된다마히로의 지난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소헤이와의 만남을 통해 겐은 관계에 대한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온라인 게임 상에서도현실에서도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좌절하던 겐이 어렵지만 변화를 시도하고인간관계 속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게 인상 깊었고응원하고 싶어졌다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갇혀버린 틀을 깨버리는한 단계 위로 올라선 레벨업의 팡파르가 울린 듯 .

 

 

"맞다다른 사람의 분실물을 주우면 다시 언제든지 우미하자마 역으로 와줘그 역 분실물센터에 내가 있으니까."

소헤이의 말은 겐에게 "여기에도 네 자리가 있어하고 온 힘을 다해 전해주는 듯 했다겐은 등을 돌린 채 주먹을 높이 치켜든다.

어디선가 레벨업의 팡파르가 울린 듯 했다. 176

 

 

 

 < 제 장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그리고 거짓말을 할 때나 >

 

 

 

지에는 스물 넷의 젊은 주부이다자신의 선택 없이 타인에게 잘 휩쓸리고책임감이 강한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된 사람남편 미치로는 지에가 대타로 시작했던 아르바이트를 2년 째 하게 된 마트의 점장이었고지에와 결혼할 무렵엔 본사의 인사부로 영전하게 되었다물건을 잘 정리하지 못한 지에는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린 걸 깨닫고 유실물 보관소로 향한다마침 우연히 주운 임산부 마크 뱃지를 주머니에 넣고펭귄이 있다는 소년의 말에 거짓말로 봤다고 동조했지만어려운 발음 대신 분실물센터로 부르기로 했다던 소헤이 옆에서 진짜 펭귄을 보게 된다.

 

일주일이 지나 분실물센터에 연락하기가 귀찮아진 지에는 미치로가 출근한 사이 어설프게 겨우 하는 집안일과 게임이나 귀여운 동영상을 보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었다똑같은 안경과 닮은 얼굴비슷한 체형을 가진 부부잃어버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지에서로 옷을 같이 입는 부부는 지에가 우연히 줍고 잊어버린 임산부 마크를 통해 오해가 생기고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지에는 거짓말을 이어간다안락한 주택과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는 가정을 꿈꾼다는 미치로는 지에가 임신했다 믿고 크게 기뻐하고지에는 마냥 초조하기만 하다.

 

검진을 받게 된 지에는 처음 가본 산부인과에서 자신과 똑 닮은 의사를 보게 된다자신과 똑같이 생겼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 의사그리고 처음 받아본 산부인과 진료에 당황한 지에자궁에 발견된 종양.

 

더이상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거짓말에 지친 지에는 다시금 찾은 분실물센터에서 미치로에게 진실을 말한다잃어버린 것이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지에의 울부짖음과 같은 고백에 마음이 아팠다흐릿한 존재감처럼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스러운 지에가 주체성을 찾고 외치는 부분이 시원하게 와 닿았다이를 통해 미치로의 본심을 알게 되었으니두 부부의 앞날의 안개가 차츰 걷혀가는 것 같았다.

 

 "가지 마세요미치로 씨."

()

"나는 당신을 선택했어요스스로 선택했어요미치로 씨와 함께 걸어가고 싶어서 결혼했던 거예요따라온 거예요미치로 씨가 시키는 대로 해온 것도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미치로씨를 기쁘게 해주려고 한 것도 좋아하기 때문이에요미움받고 싶지 않았어요난 선택을 못 하는 게 아니에요미치로 씨와 함께 있고 싶으니까 선택을 안 한 거예요뭔가를 선택해서 미치로씨가 '역시 아니야'라고 생각할까 봐 무서워서 그랬어요. '선택하지 않는걸 선택해던 거예요멍청하고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말고는 방법을 몰랐어요."

()

당신이 여기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는 드라마 대사 같은 말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254

  

걱정 마세요우리는 꼭 탈 수 있어요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어요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포기하지 마세요."

지에는 자신의 어깨에 실린 미치로의 무게를 느끼며 가슴을 폈다. 261-262

 

 

 < 제 장 스위트 메모리스 >

 

 

자수성가한 후지사키 전기의 회장후지사키 준페이는 갑작스런 아들의 부재를 깨닫고 노발대발하여 우미하자마 역으로 향한다붉은 머리 청년 소헤이에게 불같이 화를 내다 조각조각 엉킨 기억들에 당황한다자신의 화를 여유롭게 받아들이는 청년은 준페이에게 일 끝나고 다시 얘기하기를 청한다우미하자마 역과 맞닿아 있는 후지사키 전기 공장부지 속 공원 같은 곳에서 넓은 바다를 바라보다 자신의 옆에서 뒤뚱뒤뚱 걷는 펭귄을 발견하게 된다방금 전까지 화낸 사람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천진난만하게 펭귄을 따라 전철을 타고수족관을 향하고한 인디 아이돌의 팬들에게 미움을 사기도 하다, 3층 펭귄 코너 앞에서 떠오른 기억 하나에 가슴이 저려온다이내 쓰러지게 된 준페이는 병원에서 눈을 뜨게 되며자신은 악성뇌종양을 앓고 있고수술을 거부한 상태임을 알게 된다붉은 머리 청년은 아들 소헤이와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온전히 정신과 기억이 돌아온 준페이는 아들을 잃은 후이를 인정하기 싫어 회피하게 됐음을 알게 됐다분실물센터 직원 소헤이와는 어떻게 알게 된 인연인 것인지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자신이 아들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했음에 한탄하여펭귄을 키우게 됐고건강이 나빠지자그 몫을 소헤이라는 청년에게 부탁했다는 사실을공장 부지 내 언덕에 심은 벚꽃 나무는 아들이 살던 훗카이도의 네무로에서 얻은 종자에서 난 것이며매년 아들의 기일에도 찾아와 보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남 부러울 것 없이 키워 놨더니 불효를 했다 믿은 아들은 유약한 게 아니라 유연한 사람이었다아버지의 기대대로 기업을 잇진 않았지만자신의 꿈을 가지고 성실히 살다 갔던 것이다. 그런 아들이 아버지가 좋아하는 통팥을 넣은 빵을 만들어 부모님을 만나러 오던 중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고 만 것이다.

 

이제는 아들과는 전혀 닮지 않은 손자가아들과 닮은 구석을 보이며 할아버지가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한다벚꽃 나무 아래 따뜻하고 신선한 빵과자신을 염려하는 이들아들이 키우고 싶어 했던 펭귄이 있는 풍경 속에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인정하는 준페이그리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 보겠다 다짐하게 된다.

 

 

"전 살아났어요살아 있으니까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무서운 수술도 치료도 분명히 끝이 찾아왔어요살아 있으니까 머리도 자라고 체중도 늘고 키도 조금이지만 컸어요살아 있으니까 두 번 다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바깥 세계에 나와 여행을 하고 일을 하고 매일 해와 달과 바다와 전철과 공업단지를 바라보고 있어요살아 있으니까 후지사키 회장님과 다시 만났어요그래서 전 회장님께 말씀드리고 싶어요."

소헤이는 문득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투명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살아주세요사람은 태어나면 살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멋대로 죽으면 안 돼요포기하지 마세요수술을 받아주세요회장님이 사시길 모두가 바라고 있어요." 352

 

소헤이가 죽은 사실을내 오직 하나뿐인 아들이 더 이상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아들이 자신의 삶을 인정해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을 거란 사실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370

  

이 세상은 아름다워.

준페이는 소헤이가 죽고 난 이래 오늘 처음 그리 느꼈다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다고지금 진심으로 빌었다. 391

 

 

**




대망의 마지막 장에서는 펭귄철도의 비밀이 밝혀지는 동시에앞서 나열된 에피소드의 인물들이 한데 등장한다그것도 깨알같이 등장하여 반가움마저 들었다잔잔하면서도 가슴 울리는 이야기들의 연속이었다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각자 살아가는 데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사는 걸까추억 속에 살면서지난 기억을 되풀이 하며 잃어버린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펭귄철도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분실물센터로 안내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다소 생뚱맞게 느껴졌던 '펭귄'이라는 생명체의 사랑스러움 마음 한 구석이 비어버린 사람을 잘 안내해준 것 같다. 소중한 것을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잃어버린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후회와 자책만 반복할 뿐어떤 방식으로 다시 되찾을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다시도도 없었다현재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숨만 쉬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면한 번쯤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의 '속에서 잃어버린 것은 대체 무엇인지그리고 다시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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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 광주 걸어본다 9
김형중 지음 / 난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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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사는 평론가 K를 따라 걷기,






평론가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평론가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이 책은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것이 다름 없는데우선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나왔고평론가 K씨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봤기 때문이다태어나 지금까지 이 도시를 벗어나 본 적이 없으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평론가 K처럼 고향이라는 개념이 마냥 낯설기만 하기도 해서민주화 항쟁에 대한 것을 뺀다면 도무지 큰 특징이랄 것도 없어서문화예술의 도시라는 수식어와는 무색하게문화예술이 그렇게 잘 살아남았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에이 도시에 대해선 그냥 나고 자란 곳이라는 생각 밖에 없었다.

 

K는 글 쓰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 같다서문에서 이미 자기고백을 통해 말하고 있다. '광주'에 대한 글쓰기 제의가 들어 왔으나거절할 수도 있으면서 글 욕심에 무조건 한다고 한 후후회할 자신에 대해그리고 K라는 이름 뒤에익명성 아닌 익명성을 담보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


 

<1부 태어난다는 것>

 


K가 나고 자란 곳은 송정리 도산동 쪽이다. K는 무척 염세적인 사람인데그런 유형의 인간이 되기까지 주변 환경이 그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새벽녘 집을 지나가는 기차 고동소리라든지아버지의 영화 취향이라든지상상과 물려받은 듯한 감성 유전자동네 골목 분위기아픈 형 등차례로 훑어나가기 시작한다익숙한 지명이 처음부터 나와서 반가웠다송정리에는 내가 다닌 학교가 있고나의 친한 친구가 살고 있다.

 

K는 자신의 정체성존재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유머인지위트인지 알 수 없는수많은 길을 돌고 돌아 겨우 건네는 듯한 말로 덤덤하게그리고 피식거리게 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태어남 이전에 '따위는 있었을 리 없으니까따라서 저 문장이 정확해지려면 '송정리라 불리는 곳에서 우연하게 발생에 성공한 어떤 단백질 합성물이 20년을 경과하는 동안 K라 불리는 한 존재로 되어갔다라고 정정되어야 맞다. 23

고향이란 그런 것이다시쳇말로 고향은 항상 내 안에 있는 법이다송정리는 자신의 형질을 나누어 많은 ''들을 길러냈다그리고 떠나보냈다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K였다송정리는 아무리 부인해도 K의 일부였다. 24



1980년 학생운동, K는 송정리를 '식반자(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촌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몰랐던 옛 광주에 대한 이야기들이 흥미롭다광주 공항 근처 공군부대에는 미군이 주둔해 있었고그들 부대 주변은 클럽촌과 유흥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미군이 빠져나간 자리에 대신 들어선 외국인 노동자들, '명동'이라 불리는 번화가 이야기도 등장한다. 1003번지 골목의 변화지금은 다문화먹거리가 형성된 골목황룡강은 K의 친구를 앗아간 무서운 공간의 이미지에서 자전거 길이 확보되며 활기찬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뭐랄까, K는 송정리가 이제 '식반자촌'이 아니라 '주변부다문화촌'같다고 생각했다그런 의미에서 그가 자라던 때나 지금이나 송정리는 어딘가 보편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논리적 비약을 무릅 쓴다면송정리는 항상 한국이었다아니한국식 근대화의 이면이었다.  39

 


<2부 구도심에서>


 

송정역도 많이 변화하였다그 몸집도 커졌다 작아졌다지금은 다시 커졌다호남선의 노선이 송정역과 이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주변시설을 확대시키기 위해 1913 송정역시장도 개설되었다지하철의 노선은 하나이고이는 금남로를 향해 달려가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한다실제로도 그렇다지역 주민들을 위한 노선이라기도 애매하다금남로는 여러 상징적 특성을 지닌 곳이다그러나 실제로는 번화가인 충장로와 예술의 거리 사이 대로일 뿐이다지하엔 지하철이 다니고지상엔 버스와 택시가 다닌다추억이 깃든 과거의 상점들 이야기도 흥미롭다나의 대학생활에는 그런 곳이 없었다모두 사라지고 프랜차이즈 상점들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난 낭만 또는 사회와의 치열한 싸움이 있기 이전에 산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정말 우습게도 그랬다학교와 집만을 오갔기 때문에 추억의 장소랄 것도 없었다굳이 꼽자면 학교 중앙도서관 뿐이었다많은 장서들을 보면 괜히 든든했었다.

 

여튼간에 광주 지하철은 아직 하나의 노선 밖에 없다이에 K는 말한다전남 도민이 공정인 용무를 보기 위해 거쳐갔으므로금남로는 완전히 공정인 거리라고.

 

1987년 6월 중순의 어는 날은 그보다 더 선명히 기억한다. (금남로1가 광주은행 본점 사거리에서 경찰의 바리케이드를 밀어내고 네 방향에서 전진해도 군중들이 서로 만났던 순가누군가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고작 <아리랑>과 <애국가>였다.

방석복과 투구를 빼앗긴 전경들이 군중들 앞에 무뤂 꿇어 않아 있었고멀리 도청이 보였고이것도 '승리'란 생각이 들었고, '역사'란 단어가 자꾸 떠올랐고그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았고인간이란 종이 대단해 보였고그래서 노래를 부르는 내내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

()

합쳐지는 것의 위대함이 K의 몸속에 일종의 '획득형질'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이후로 K는 사람들이 합쳐지는 장면목소리가 더해지는 장면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는 장면을 보면 어김없이 콧날이 시큰해진다.

(그게 다 금남로에서 얻은 K의 획득형질이다. 49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획득하고 계급이 없고 죽음의 공포도 없는 시공인간의 유한성이 극복되고 따라서 시간이 의미를 갖지 않는 시공어떤 희귀한 열정이 있어 일단 그것이 주체들을 장악해버리고 나면 그 어떤 세속적 감각과 번뇌도 사라지게 되는 시공그것을 최정운은 '절대공동체'라고 명명한다. 51-52



K가 말하는 광주란 ''이다순간적이었던 절대공동체의 경험자 이후의 긴 상실감 사이에 벌어진 틈때문에 광주 사람들이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매달린 것들에 대한 분석이 이어지는데꽤나 흥미롭다. '광주는 무엇인가가 특히.

 

광주는 '자신 안의 더 자신같은 어떤 것', 1980년 5월의 그 하루 자신들이 겪었거나 겪었따고 여겼던 그 '무엇', 그것을 다른 것들에 투사하면서 지금의 광주가 되었던 것이다. 53


K가 광주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거리 곳곳을 걷는 것이 주요 테마이기에이야기 말미에는 그 거리를 걸으며 들었던 음악도 제시되어 있다읽으면서 궁금한 곡들은 찾아 들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란 소모하는 것이라는 K의 말에 공감한다산업의 생산과는 다른 차원의 양상을 띠고 있다. K는 문화에 관한 생각들을 바디우의 이론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꽤나 직설적인 어조로거침없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본능을 넘어선 소비행위를 통해 문화가 생성된다고 말하고 있다.

 


문화란 필요적 소비를 제외한 잉여적 소비 행위에서 시작한다아무런 대가나 재상산에 대한 기대 없이 내가 가진 자산과 시간과 에너지의 일부를 사유와 아름다움을 위해 기꺼이 탕진할 때만 진정한 문화로 탄생한다. 71



이에 문화와 광주가 겉돌고 있다는 K의 의견에 적극 공감했다문화적 바탕이 될만한 것들이 미처 형성되기도 전에 과도한 공간만 들어섰을 뿐이게 진정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너무 고요하고 미로 같은 공간이 말이다그럴 듯한 수식어를 붙인 사업 속에 실속이 있는지도 의문스럽고문화와 산업이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온통 의문투성이다안타깝기도 하다나 역시 그 공간의 역할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장로에서 광주천을 지나 사직동 인근에 다다르면 낙후된 한 동네가 나온다양림동이다최근 양림동은 되레 낙후되었기에 훗날 명소가 될 요소를 갖추게 되었다관광자원화 사업을 통해 그 시대의 향수와 가난도 상품화된 것이다양림동은 그런 묘한 구석이 있는 곳이다선교활동으로 종교가 전파되기도 했으며가난을 품고 있었다고도 하니 더욱 그렇다. 1930년의 그 시절을 재현하는 양림살롱문화가 있는 날의 행사는 특히 흥미롭다참여해보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광주에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극장이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광주 시내에 있던 무등시네마도 사라진 지 오래고그나마 구관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광주극장'뿐이다독립예술영화관. 1935년 10월에 개장한 곳마치 극장이라기 보다공연장 같은 상영관에 커다란 스크린손으로 그린 영화 입간판낡은 건물 특유의 먼지 냄새교차 상영이란 없고 시간별로 한 편씩만 상영되는 단일상영관광주극장의 대표라는 사람도 K가 아는 인물인 듯 하다물욕 없이 그저 자리만 지키는 사람인 듯 하다이처럼 K가 좋아하는 인물들이 꾸려가는 광주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엿볼 수 있다.

 


<3부 일요일에>


 

말 그대로 일요일에 K가 취미로 즐길 법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야구동물원시장

여기서도 역시 광주의 예전 얼굴을 보는 일은 신기했다우치동물원에 이전하기 이전에 있던 곳은 사직공원이었다는 것대인동의 또다른 얼굴을 보게 되었고그 부활을 이끈 것은 다름 아닌 미술이었다는 것. 2008년 비엔날레 공공 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복덕방 프로젝트'를 기획했고실현된 장소가 사라질 위험에 처한 대인시장 일대였다는 것지금은 대인 야시장의 인기는 실로 대단하다전시와 공연벽화 기념품 노점상예술공연장이 되기도 하며젊은 예술인들의 모임도 형성됐다먹거리도 일품이라고 한다.

 


 

<4부 죽는다는 것>

 


K는 광주 거리 곳곳먼 길을 돌아왔다진정 다뤄야 할 이야기들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차근차근 걸어온 것 같다우리는 그 죽음들에 대해 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잊어서는 안 되고함부로 오염되어서도 안 된다민주주의 근간이 되었음에 함부로 떠들어선 안 되는 것이다전두환의 뿌리를 잇는 한 야당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자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우리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의무적으로 들었고배웠던 역사에 대해 누리고 산 자들의 헛소리는 참으로 들어주기 힘들다감히 폭도라 부르다니그저 우리의 이웃이었고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일반 시민이었을 뿐이다.

 

K는 아버지의 죽음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어떤 사건을 '기념'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애도가 끝나지 않은 사건은 기념할 수 없다현재진행형이니까……애도가 끝난 사건만이 기념이 될 수 있다지난 일이니까(최근 K는 세월호 참사를 두고도 어떤 이율배반에 빠진 적이 있다넋이 나간 듯한 몰골의 유가족들을 보면서 그는 차마 애도는 종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다.) 5.18은 그 애도 과정을 거의 종결해가고 있었던 것이다그런 이유 때문에 국립묘지의 위용 앞에서, K의 마음은 항상 모순적이다. 163



신화도 늙게 마련이고그 이면에는 추한 이야기들도 섞여드는 법이다그러나 기억하는 자들의 태도와 의지 여하에 따라서그 속도는 충분히 지연될 수 있는 것 아닐까. 168

 

 

 

 **



 

K가 가진 그 특유의 감성(염세주의 감성?)도 내력이지 않을까그의 아버지형으로부터 물려 내려온그래서 직설적이나 신중한 면에 공감했고한편으로는 살짝 뒷걸음치게 만드는 구석도 있었다대체로 K가 말하는 광주는 흥미로웠고광주의 옛 얼굴들과 흔적들을 찾아가는 길이 의미 깊은 일이었다평론가 특유의 어조는 이미 몸에 배인 것인지 또 다른 매력요소 같다시인의 쓰는 에세이와 소설가가 쓴 에세이와는 또 다른 재미를 지니고 있다고향의 부재에 대한 생각에 광주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더 즐거웠던 독서였다광주를 알고 싶다면 K의 이야기를 따라 함께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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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식가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8
M. C. 비턴 지음, 문은실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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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시 맥베스 순경 드디어 승진하다!!





대식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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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허우대 멀쩡한 시골 순경 해미시 맥베스는 여전히 마을 특유의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는 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발생되지 않으면 이야기가 살지 않겠죠, 그리하여 마을에 새로 방문한 손님들이 한 차례 큰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프리실라와의 관계는 여전히 미적지근하니 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의 거라고 하기에는 싫은, 묘한 관계에 있는 두 사람입니다. 해미시를 못마땅해 하는 할버턴 스마이스 대령은 토멜 성 호텔 사업이 순조로워지자, 온갖 중요한 업무는 모두 딸인 프리실라에게 맡겨두고, 자신의 성공담을 자랑하기 바쁘시죠. 갑작스러운 예약 취소로 고민스러웠던 단체 손님들을 결국 받게 된 프리실라는 아픈 종업원들을 대신해 서빙을 하며 열심히 자신의 몫을 다해내고 있었습니다.


프리실라를 곤란하게 한 고객들의 정체는 바로 결혼 정보회사 '체크메이트 독신자 클럽'의 회원들이었습니다. 대표인 마리아 워스가 주최하였고, 부와 명예를 갖췄으나 시간을 들여 연애 사업을 하긴 싫으신 분들이 모여 그녀가 매칭한 파트너들과의 만남을 갖게 되는, 이른바 맞선 파티 같은 것이었죠.


여기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그리고 코지 미스터리의 특성상 이 인물은 쉽게 피해자의 신분을 자처하는 동시에 모두에게 불쾌감을 선사하며, 죽어도 마땅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역할을 다합니다. 마리아의 동업자 피타 고어는 거대한 등치의 한 먹성 하시는, 한때는 매력적이었고 괜찮았으나 잘 나갔을 적의 환상만 품고 망가져 버린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매우 요란한 식사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뻔뻔한 일면으로 이성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죠.


마리아는 계획대로 피타 고어가 절대 눈치채지 못하게 이 모든 걸 무사히 진행시키려 하지만, 역시 계획에는 늘 차질이 생기게 되는 법, 어떻게 알고 찾아온 동업자는 이제 지분을 모두 사들이겠다는 마리아의 제안을 거절하며, 맞선 파티에 훼방을 놓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대식가의 면모를 숨기지 않고서 자신의 파트너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죠.


마리아의 매칭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그럭저럭 맞선 파티는 진행되긴 합니다. 


이 독신자 클럽에 속한 인물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의류점 체인 경영자의 둥글둥글한 인상의 버나드 그랜트 경, 야망으로 무장한, 자수성가한 젊은 증권 중개인 매슈 쿠퍼, 잿빛 여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존재감 없는 플로리스트 제시카 피트, 수줍음이 많지만 어리석기도 한 아가씨 법률회사 비서 제니 트래스크, 부유한 젊은 한량 피터 트럼핑턴, 철없는 여고생처럼 구는 출판사 편집자 조수 데버러 프리맨틀, 자식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재혼을 생각한 60대의 왕립 검사 존 테일러, 토끼 이와 귀 모양을 가진 30대 초반의 공립 학교 영어교사 메리 프렌치 그리고 피타의 조카인 외모만 완벽한 크리스털 데베넘이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 매칭된 파트너가 아닌 각자 이끌리는 대로 만남을 이어가는 데요. 모두의 '적'이 된 피타 덕분에 이들은 서로 똘똘 뭉치게 됩니다. 피타의 등장으로 로맨틱한 분위기의 산통은 다 깨졌지만, 그녀에 대한 혐오감으로 낯선 타인에서 익숙한 동지가 돼버린 것이죠. 


우습게도 중간엔 피타가 가진 재산이 상당한 걸 알게 되자 몇몇 남자들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첨을 떨기도 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피해자가 된 피타와 그 범인을 밝히기 위한 해미시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죠.


물론 여느 때와 같이 빠지면 섭섭한 해미시에게 빠지는 순진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알 수 없는 젊은 아가씨도 등장합니다. 이를 모르는 해미시는 늘 태연하게 굴다가 프리실라에게 한 소리 듣고 서로 질투하고 또 신경쓰고 이럴 거면 그냥 확 연애를 시작해버렸으면 싶을 정도로 미적지근한 관계를 이어갑니다. 


해미시의 일당백 친척은 기자로서의 제몫을 다하며 그가 문의하는 정보를 제대로 물어다줍니다. 그리고 하나씩 사건의 실마리가 풀려가고 단순한 블레어 경감은 늘 그렇듯이 과격하고 몰상식한 행동과 말투로 심문하는 상대에게 분노를 선사한 덕에 되레 해미시의 입지가 더욱 단단해지도록 도와주죠. 또 다행히도 블레어의 상관인 피터 총경은 해미시의 능력과 소문을 익히 들어 그를 인정하고 있는 바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퍽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역시 작가의 능력이 십분 발휘되어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상투적으로 보이는 동시에 꽤나 생동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물을 구성하는 데에 역시 빼어난 재능을 가진 작가인 것 같아요. 또한, 풍경 묘사나 사건 전개 등 세심한 터치로 훌륭한 문장들이 이어집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과장되지 않는 듯한 게 매력적입니다. 그 시대 그 공간이 낯선 타국임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건 그런 기술이 밑바탕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이번 편의 가장 큰 변화라 하면  해미시가 순경에서 경사로 승진한 데에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유연하고 다정한 태도로 일관하며. 위트와 기지를 발휘하여, 사건을 멋드러지게 해결하는 해미시가 말이죠.. 물론 평온한 시골 마을의 정취를 느끼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언제까지고 순경이어서야 더 큰 사건을 맡을 기회가 없을 테니 조금 답답한 측면도 있었기에 반갑고 쾌재를 불러 일으킬만한 소식이었습니다.


읽으면서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죠, 물론 이어 닥쳐온 악재인 윌리 러몬트 순경의 활약도 앞으로 기대할만한 것이겠죠, 결코 유쾌한 것만은 아니겠지만. 이제 남은 건 프리실라와의 연애전선 뿐이네요. 그래서, 둘은 대체 언제 이어지는 것이죠? 앞으로 남은 이야기들 속에선 로맨틱한 요소도 확 넣어져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지치고 피로한 현실 속에서는 재밌는 소설 속 세계가 좋은 도피처가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해미시의 새로운 활약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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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 뒤편에는 새롭게 국내 전문가 및 독자 서평을 넣어 싣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 동시에 , 제 서평의 일부분을 발췌해 싣고 싶다는 메일을 받아보게 되었어요. 저는 그 메일을 받고서 얼마나 기뻤는지 답장을 쓰는 데에만 30분이 걸렸습니다. 당연히 오케이!라는 답을 하는데, 괜히 떨리고 설레서...오랜만에 재미난 이야기 시리즈를 알게 되어 기쁜 동시에 부족하고 비루한 제 문장들도 작게 한 켠 자리 잡게 된다는 게 무척 신이 났죠. 주변인들에게 모두 자랑하면서, 솔직히 '문학독후' 책보다 이 책을 더 기다린 건 사실입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품이에요. 덕분에 한동안 외롭진 않을 것 같아요.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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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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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의 옷을 입고 과학철학서의 얼굴을 한 삶 이야기

『수잔 이펙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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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페터 회는 아이와 어른, 혹은 여자와 남자, 자연과 문명 등 두 세계 가운데에 서서 특유의 문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하는 신선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라고 한다. 그 주제 또한 삶과 맞닿아 있는데 이를 말하는 방식이 퍽 신선한 것이다. 여느 소설의 특성을 가진 듯, 아니 조금 벗어난 듯 보이기도 하는게, 마치 내가 읽고 있는 게 소설인지, 과학 철학서인지 헷갈릴 정도로 심도 있는 지식과 비유가 연이어 지는 반면, 슬며시 들어가 있는 위트가 서늘한 긴장 사이에서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약자인 여자와 아이들의 존재에 마음을 쏟는 이 작가는 과학의 진보로 양극화된 현대사회 문명을 비판하며 제3세계 아이들과 여성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후원할 만큼 실천적인 작가이다.

『수잔 이펙트』는 한 가족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도의 개인주의자의 성향을 지닌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흩어지게 지며, 또 다시 어떻게 뭉치게 되는지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들이 처한 위기에서 살 길로 나아가는데 도사리는 위험들은 위기가 더 큰 위기로 다가오기도 하고, 되레 긍정적 성격을 지닌 구조의 길로 통하기도 한다. 

수잔은 물리학자이자 다양한 직함을 가진 유능한 사람이다. 그녀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본 사람들은 몇 분 이내 자신의 속내를 고백해내는 것이다. 이성을 좋아하며, 물리학을 사랑하는 사람. 여자인 동시에 강한 모성을 가진 사람. 
그녀의 남편인 라반도 이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유망한 피아니스트. 예술가인 그 역시 반경 3m이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재능을 가히 폭발적으로 발산된다. 사람들에게 칭송 받길 좋아하며 한데 아우르는 매력까지 겸비하고 있다. 그와 있으면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천생연분인 듯 보이지만, 극단의 기질적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 두 사람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그들의 자녀들. 쌍둥이 남매 티트와 하랄 또한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다. 해박한 지식과 좋은 기억력을 지닌 하랄과 한 없이 다정하나 늘 반전멘트를 날리는 티트. 독자가 대면한 이들 가족의 첫 인상은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 그 자체이다.

불륜 상대인 젊은 남자애인에게 이별을 고하다 강간 위기에 처한 수잔은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25년 형을 선고 받게 되고, 그녀 못지 않게 라반은 마하라자의 열여덟 딸과 함께 도망을 치다 남인도 마피아에게 쫓기는 중이고, 하랄은 골동품 밀수 혐의로 80년 형을, 티트는 콜카타 칼리 사원의 승려와 도주를 하는 중이고. 어떻게 하나 같이 이런 큰 문제를 일으키고 철저히 흩어질 수 있는지 정말 대단한 가족이다.

이야기는 총 3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첫 시작은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다시 재회하면서 시작된다. 노벨문학상을 탄 이들만 연이 있을 법한 칼스버그 재단 명예저택에서 그 주인인 '안드레아'와의 연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게 된 수잔은 최강 국가기구 그 자체인 듯으로 보이는 '토르킬 하인'을 만나게 된다. 수잔이 수감되어 있을 때 처음 만났고, 가족이 모두 평온하게 다시 모일 수 있을 방법을 제시한다. 그녀의 능력을 발휘하여 주요 문건을 가져와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해준 안드레아는 수잔의 젊은 시절부터 연이 닿아 있는 사람으로 그녀의 물리학에 대한 애정을 더 커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지원한 사람이다. 여러가지 불가해한 일들로 엮여 있기도 한 것이다.

집에 다시 모인 이 가족은 앞엔 산 넘어 산인 일들만 발생된다. 그들이 찾아야 할 중요한 서류는 미래위원회의 마지막 보고서. 위원회의 존재 자체에 무지했던 이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알아 가게 되며 그 존재를 알게 되고 진실을 파악하게 되며 서서히 죽음의 위기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고, 운좋게 잘 빠져 나가기도 한다.

실감 넘치고 세세한 묘사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반면 생생한 긴장감을 더한다. 위험을 함께 헤쳐나가며 동지애를 키우게 된 것인지, 이들은 서로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속내를 드러내게 되고 진정한 대화와 소통을 하게 된다.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진귀한 재능을 지닌 유능한 사람들이 서로에게는 그런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일까. 

피로 엮인 혈연들, 가족이란, 이상하게도 남에게 말했던 것들도 쉽게 말을 못 꺼낼 때도 있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상처 주기 싫고 받기 싫어 큰 거짓말로 포장하기도 한다. 이 묘한 특성을 수잔의 가족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덴마크의 위대한 가정으로 타임지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던 이 가족은 완벽한 가면 뒤에 어떤 얼굴로 하고 서서히 틀어지고 있었는지도, 이들이 미래위원회의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자연스레 밝혀진다. 

주인공 수잔의 시점에서 모든 사건들이 전개되며, 말하는 방식 또한 매우 독특하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물리학을 무지막지하게 사랑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자로서의 재능을 한껏 잘 뽑내는 동시에 강한 모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쌍둥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미래위원회의 사람들이 한 명씩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재능과 상냥한 이웃의 도움으로 주요 보고서를 읽게 되면서 이들 뒤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와 계획들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이기심으로 보인다.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인 동물인 것이다. 그 큰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선택한 자들끼리 혹은 소수 선택받은 자들끼리 누리면서 타인은 완벽히 무시하거나 배제시키는 이기심. 극강의 이기심이다. 이 소설은 그 이기심에 대해 세기말적 상상력을 동원해 시원하게 한 소리 하고 있는 것이다. 특유의 시크하고 건조한 문체로 말이다.

수잔이 찾은 미래위원회 보고서는 1년 반, 다섯 번의 회의 기록을 세 개의 범주로 나눠 요약 정리한 것이었다.

작은 사건들의 예측이 첫 번째,
집단적 의미가 있는 중소 규모의 제한적 현상의 예측이 두 번째,
경향의 예측이 세 번째,
각 범주에서 시기가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됐는지, 빗나간 예측과 비교해놓은 것도 포함해서. 위원회의 구성인들 역시 각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었다. 

미래위원회의 구성과 기획 단계, 그리고 구성원들의 이기심과 누려왔던 것들, 자만에 빠져 생긴 위기들, 그 위기 뒤에 숨은 거대세력들과 진실과의 조우. 연달아 터지는 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마무시했다. 그만큼 잘 짜여진 소설이다. 완급 조절이 좋은 소설이다. 멀리 뛰어 갔으면 잠시 쉬어가고, 쉬어가면 사이 해소의 방식이 곁들여지고, 다시 달려나가고 멈칫했다 움직이는. 끊임없이 내달리는 소설은 아니지만 끝까지 완주했다는 쾌감은 쥐어주는 소설인 것.

재밌는 건 한결같은 수잔의 과학적 비유이다. 과학적인 동시에 철학적이다. 매우 심도 있는 문장들이다. 수잔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려 했고, 미래위원회의 주축 인물로 보이는 마그레테 스폴리드를 만났을 때, 마그레테가 연습을 하고 있던 그 원반의 무게처럼. 너무 길게 주절거렸지만, 내가 느끼기로는 그렇다. 단순히 스릴러 소설이겠지 접근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스릴러의 가면을 쓴 과학철학서이다. 과학철학서인 동시에 삶을 다루고 있다.

빵 하나 굽는 데에 거치는 과정을 모두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식사하기 전 그 음식을 소개하는 말 또한 온통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비유로 뒤덮여있다. 수잔의 물리학에 대한 애정과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들은 마치 과학사전이나 전문과학서적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사이 사이 들어간 위트가 없었더라면 이 낯설기만한 방식이 어렵게만 다가왔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건조하지만 사유가 담긴 문체로 거대한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신선했다. 모든 게 신선함 그 자체인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에 놀랍고 그 해박한 지식에 놀랍다. 작가의 위대한 속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작가가 겪고 행했던 다양하고 특이한 경험들이 모두 녹여들 수 있는 걸 보면, 역시 소설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역자의 말로는 행갈이도 독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역자의 말처럼 이 소설의 완결의 방식의 신선하다. 그토록 물리학과 삶의 철학 사이에서 전전하던 소설이 로맨스로 끝을 맺는다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이들 가족 앞에 다시 어떤 위기가 처해질 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전보다는 나은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낙천적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진실을 고백하게 하는 수잔의 능력 속에서도, 가장 깊은 내면에 깃든 건 타인이라 말할 정도로,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가지는 의미와 그 존재감이 얼마나 큰 지 실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살아간다고 말해야 할까.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혼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타인의 존재를 결코 무시하거나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삶이란 아직 무엇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단면에는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게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난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묵직하고 심도 있는 소설인 것인가, 라고 수잔 이펙트를 통해 고백해본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우리의 하루는 온갖 맛과 향, 사람들, 희망과 두려움의 순간들로 넘쳐난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순수한 박하 향이 필요하다. 그리고 밤의 초입에 찾아드는 고요, 달빛이 하얀 벽에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무늬도. /88쪽

순간 한 줄기 빛이 스치는 것 같았고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할 것 같았다. 그것은 솔직함이 가진 가능성 중 하나였다. 누군가 거울이 되어 우리의 참모습을 비춰주는 것. /415쪽

"지난 몇 달간 알아낸 게 있어요." 내가 말했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예요.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그리고 이 효과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게 뭔지 아세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타인이에요.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사는 건 바로 타인이에요." /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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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의 기술
빌헬름 슈미트 지음, 장영태 옮김 / 책세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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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위한, 삶의 기술이란 무엇일까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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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고 하면 언제나 낯선 학문에 비하지 않았다. 그 세계는 실로 방대하며, 거칠게 말하면 어렵고 딱딱한 개념과 이론들에 섣불리 다가서기 어려운 장벽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내 삶에 던지는 여러 질문들과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아 방황할 때 찾게 되었다. 


이는 요즘 '자존감' 이라는 게 주요 화두가 되는 것처럼, 척박한 현실에 곤궁한 삶을 살아갈수록, 지치고 피로함에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의문이 지속될수록 '나'와 나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힘든 나날이 지속되어 회의와 무력감, 공허가 동시에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이에 영혼의 치유사라 불리는 독일의 한 철학자의 삶의 기술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호기심과 기대가 일었다. 저자인 빌헬름 슈미트는 고대 철학에서 비롯한 삶의 기술을 현대에 끌고 들어와 말한다. 고대 철학에서 비롯되었듯이 철학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근대에 들어 탐구와 이론 연구에 몰두하여 멀어진 철학은 실은 삶을 더 잘, 그리고 아름답게 가꿔나가기 위해 접목되었던 것들이었음을 말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이전의 저서『삶의 기술 철학』의 요약본과 같은 책이라 볼 수 있겠다. 일종의 입문서 역할을 해주는 게 아닐까 싶다. 삶의 기술에 대한 그의 저서가 당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니 그것도 놀랍고 신기하기도 했다. 


삶의 기술을 새롭게 정초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전제 역시 중요한데, 선택의 여지와 가능성들을 열어주며 소망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며, 단순히 내용을 확인하는 게 아닌 가능성을 밝혀내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한 개별자가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가지고 있지 않는지 이해하는 데는 철학적 행위가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의식적인 삶의 운영을 위해 근거와 논증을 탐구하고, 개념들을 해명하고, 구조와 그것에 근본적으로 연관된 사항들도 발견하고, 조건과 가능성을 분석하는 것 등의 행위를 이른다.


바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사유하는 것이 사치로 느껴질 때가 있다. 진정한 사유를 해보는 시도도 극히 드물며, 그러한 사유라는 것을 잘 알지도 못한 상태로 말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고요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도를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가 시도에 대해 말했듯이. 근본적인 것에 대한 물음이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혼란에 이른 게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에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직도 잘 해소되지 않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실존에 개입하고, 실존을 의식적으로 수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개인의 삶은 물론 타자들과의 사회적 공생에 힘쓰게 한다.  


호퍼는 한 작품 안에 얼마나 많은 사상과 자극이 들어가 자리를 잡는 지에 말했다. 때문에 그의 그림은 삶의 문제를 제시하기 위한 공간 같은 것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들어가는 글부터 등장하는 호퍼의 그림은 저자가 삶의 기술에 대한 초입을 다지는, 왜 삶의 기술이 필요한가, 어떻게 철학과 접목되어 왔는가, 그 기본 바탕에 무엇이 있는가를 설명하는데 좋은 예시가 되어주는 듯 하다. 덕분에 호퍼의 그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에게도 새로 그 매력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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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쾌락과 고통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쾌락은 고통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고통의 기능이랄까, 피력되는 것들이 흥미로웠다. 고통을 겪음으로써 관계 혹은 상실에 대한 염려를 하게 되고, 조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통에 점령된 탓에 외부세계는 무의미로 가라앉아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됨으로써 파괴적인 작용을 하고, 내면세계가 새롭게 생성될 수 있기 때문에 생산적으로 작용된다 볼 수 있다. 고통으로 인해 넘치게 된 상상력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꿈꾸는 걸 살아있는 동안 실현해내려 한다. 이를 위해선 한계 설정이 필수 요소인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을 살아가기를, 그것도 실속 있게 살아가기를 종용하게 된다. 이렇듯 삶의 한계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이 되어주는 것이다. 

또한, 죽음에 대해 반복적으로 생각함으로써 공포심을 버리게 되고, 후회 없는 살아가게 되면 홀가분한 죽음을 통해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고유의 삶을 살게 된다. 


시간의 가위라는 비유에서, 시간의 가위가 닫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시간을 이용함으로써 최선의 가능성이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수많은 가능성들과 과거가 되어버린 낡은 현실들이 쌓이게 되는데, 현재는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시간인 동시에 큰 난관이라고 한다. 가능성에 비해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유용하게 쓰기 위한 분할 및 배분을 잘 해야 한다. 당장 할 수 없는 것들은 나중에 올 기회를 위해 유예하고, 지나가 버린 시간의 고통을 인식하여 앞으로의 시간을 잘 쓰기 위해 노력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한 시간이 충만한 시간이라면 빈 시간도 존재하는데, 이는 그냥 흘러 보내는 시간을 말한다. 나태할 수 있는 시간, 산책, 사유 혹은 좋아하는 취미를 하는 시간이라든지, 아니면 미래를 위해 투자할만한 것들을 하는 시간이라든지.  


분노, 내지 격정과 감정 요소 하나 하나 삶의 기술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분노에 대한 여러 요령들이 있는데, 사전 숙고, 분할, 유예, 분산, 유도, 다른 쪽으로 돌리기, 보상, 승화 등이 있다. 분노를 결코 얕잡아 봐선 안된다. 분노는 선량한 것을 방해하는 가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실망을 낳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긍정을 낳게 된다. 가장 좋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는 긍정적 사유 방식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고대에 말했던 행복에 대한 것들은 현재에 적용하기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한다. 실존의 해석학 작업이 필수적인데, 자기 자신과의 대화, 타자들,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시도해보게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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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앞서 사유하던 문장들이 끊임없이 전복하며 진행되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어려움을 떠나 매우 유익한 책이었다. 실존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사람이라면, 나의 삶을 점검하고 사유하고 잘 살아가고픈 사람이라면, 일말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무심히 흘러 보내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여러 시도들을 통해 경험이 쌓이면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역자의 세심한 각주는 나와 같은 초보자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라 별 언어의 뉘앙스가 다르듯 어떤 개념을 말할 때의 용어를 어떤 것들로 대체하였고,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배경지식 부가 설명 같은 것들도 덧붙여서 친절한 안내를 더해 주었다. 


저자의 글은 잊고 지냈던 요소 요소들을 하나하나 삶의 기술로서 복원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 같이 아름다운 문장들도 많았다.


삶의 기술의 목적은 결국, 지극히 난관으로 가득찬 이 삶을 바르게 끌고 가기 위한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 삶에 던지는 미로 같은 질문들의 답은, 나를 잘 알아가고 삶의 기술을 터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들에서 찾아가는 것 같다. 


본래 생각해왔던 것들과 비슷한 지점도 있었고, 전혀 낯설게 보는 방식에 놀랍고 신기한 부분도 있었다. 일회성이 아닌 반복해서 좋은 습관으로 활용하여, 삶의 기술을 하나씩 배워나갈 수 있는 사유 또한 이어나가야 겠다. 


개인이 삶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실존을 외부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는 점에 희극이 존재한다. p 26 


우리가 먼 미래에도 살 수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지금 이 삶을 살아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가? p 44


성찰적인 삶의 기술을 위해서는 안정과 유동성 사이 폭을 새롭고 철저하게 이용하기 위해 무엇을 새롭게 시험할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p 67


고통은 자기가 감당해야 할 가장 고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고통은 그의 고통이며 그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p 84


한계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죽음과 친밀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삶을 위해 자유로워지고, 죽음을 가볍게 해주는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p 105


삶 전체를 되돌아보는 시선, 미리 죽음을 향하는 시선, 그리고 그것 너머로 향하는 시선, 죽은 자의 유산으로서 살아 있는 자의 내면에 생동하면서 살아 있는 자가 바라보는 이 이중의 시선. 이제부터 그는 죽어가는 자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의 삶을 음미하고 어쩌면 변화시킬 것이다. p 108-109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자기가 성찰적 삶의 기술을 위한 표본이 될 수 있다. p 132


삶의 기술의 전략은 불쾌한 우연들을 개연성이 덜한 것으로 만들고, 적어도 그 우연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들을 숙고하여 가능한 답변을 준비하는 방향을 취할 수 있다. 

p 139


철학적으로 성찰된 삶의 기술은 지나치지 않은 육체 문화의 확장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포츠도 이 육체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한몫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영혼의 돌봄을 목적으로 하는 육체의 훈련으로서의 스포츠 그러니까 물리적 요법으로서의 스포츠는 사실상 심리요법인 것이다. p 242


쾌활함의 기본은 균형 잡히고 잘 조직되고 평형이 이루어진 자가, '폭풍 한가운데에서도' 한결같음을 보존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확고부동한 영혼이다. 즉 쾌활함의 기본은 자기강화의 달성인 것이다. p 253






( 이 리뷰는 책세상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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