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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페터 회는 아이와 어른, 혹은 여자와 남자, 자연과 문명 등 두 세계 가운데에 서서 특유의 문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하는 신선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라고 한다. 그 주제 또한 삶과 맞닿아 있는데 이를 말하는 방식이 퍽 신선한 것이다. 여느 소설의 특성을 가진 듯, 아니 조금 벗어난 듯 보이기도 하는게, 마치 내가 읽고 있는 게 소설인지, 과학 철학서인지 헷갈릴 정도로 심도 있는 지식과 비유가 연이어 지는 반면, 슬며시 들어가 있는 위트가 서늘한 긴장 사이에서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약자인 여자와 아이들의 존재에 마음을 쏟는 이 작가는 과학의 진보로 양극화된 현대사회 문명을 비판하며 제3세계 아이들과 여성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후원할 만큼 실천적인 작가이다.
『수잔 이펙트』는 한 가족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도의 개인주의자의 성향을 지닌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흩어지게 지며, 또 다시 어떻게 뭉치게 되는지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들이 처한 위기에서 살 길로 나아가는데 도사리는 위험들은 위기가 더 큰 위기로 다가오기도 하고, 되레 긍정적 성격을 지닌 구조의 길로 통하기도 한다.
수잔은 물리학자이자 다양한 직함을 가진 유능한 사람이다. 그녀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본 사람들은 몇 분 이내 자신의 속내를 고백해내는 것이다. 이성을 좋아하며, 물리학을 사랑하는 사람. 여자인 동시에 강한 모성을 가진 사람.
그녀의 남편인 라반도 이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유망한 피아니스트. 예술가인 그 역시 반경 3m이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재능을 가히 폭발적으로 발산된다. 사람들에게 칭송 받길 좋아하며 한데 아우르는 매력까지 겸비하고 있다. 그와 있으면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천생연분인 듯 보이지만, 극단의 기질적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 두 사람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그들의 자녀들. 쌍둥이 남매 티트와 하랄 또한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다. 해박한 지식과 좋은 기억력을 지닌 하랄과 한 없이 다정하나 늘 반전멘트를 날리는 티트. 독자가 대면한 이들 가족의 첫 인상은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 그 자체이다.
불륜 상대인 젊은 남자애인에게 이별을 고하다 강간 위기에 처한 수잔은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25년 형을 선고 받게 되고, 그녀 못지 않게 라반은 마하라자의 열여덟 딸과 함께 도망을 치다 남인도 마피아에게 쫓기는 중이고, 하랄은 골동품 밀수 혐의로 80년 형을, 티트는 콜카타 칼리 사원의 승려와 도주를 하는 중이고. 어떻게 하나 같이 이런 큰 문제를 일으키고 철저히 흩어질 수 있는지 정말 대단한 가족이다.
이야기는 총 3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첫 시작은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다시 재회하면서 시작된다. 노벨문학상을 탄 이들만 연이 있을 법한 칼스버그 재단 명예저택에서 그 주인인 '안드레아'와의 연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게 된 수잔은 최강 국가기구 그 자체인 듯으로 보이는 '토르킬 하인'을 만나게 된다. 수잔이 수감되어 있을 때 처음 만났고, 가족이 모두 평온하게 다시 모일 수 있을 방법을 제시한다. 그녀의 능력을 발휘하여 주요 문건을 가져와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해준 안드레아는 수잔의 젊은 시절부터 연이 닿아 있는 사람으로 그녀의 물리학에 대한 애정을 더 커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지원한 사람이다. 여러가지 불가해한 일들로 엮여 있기도 한 것이다.
집에 다시 모인 이 가족은 앞엔 산 넘어 산인 일들만 발생된다. 그들이 찾아야 할 중요한 서류는 미래위원회의 마지막 보고서. 위원회의 존재 자체에 무지했던 이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알아 가게 되며 그 존재를 알게 되고 진실을 파악하게 되며 서서히 죽음의 위기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고, 운좋게 잘 빠져 나가기도 한다.
실감 넘치고 세세한 묘사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반면 생생한 긴장감을 더한다. 위험을 함께 헤쳐나가며 동지애를 키우게 된 것인지, 이들은 서로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속내를 드러내게 되고 진정한 대화와 소통을 하게 된다.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진귀한 재능을 지닌 유능한 사람들이 서로에게는 그런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일까.
피로 엮인 혈연들, 가족이란, 이상하게도 남에게 말했던 것들도 쉽게 말을 못 꺼낼 때도 있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상처 주기 싫고 받기 싫어 큰 거짓말로 포장하기도 한다. 이 묘한 특성을 수잔의 가족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덴마크의 위대한 가정으로 타임지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던 이 가족은 완벽한 가면 뒤에 어떤 얼굴로 하고 서서히 틀어지고 있었는지도, 이들이 미래위원회의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자연스레 밝혀진다.
주인공 수잔의 시점에서 모든 사건들이 전개되며, 말하는 방식 또한 매우 독특하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물리학을 무지막지하게 사랑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자로서의 재능을 한껏 잘 뽑내는 동시에 강한 모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쌍둥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미래위원회의 사람들이 한 명씩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재능과 상냥한 이웃의 도움으로 주요 보고서를 읽게 되면서 이들 뒤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와 계획들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이기심으로 보인다.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인 동물인 것이다. 그 큰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선택한 자들끼리 혹은 소수 선택받은 자들끼리 누리면서 타인은 완벽히 무시하거나 배제시키는 이기심. 극강의 이기심이다. 이 소설은 그 이기심에 대해 세기말적 상상력을 동원해 시원하게 한 소리 하고 있는 것이다. 특유의 시크하고 건조한 문체로 말이다.
수잔이 찾은 미래위원회 보고서는 1년 반, 다섯 번의 회의 기록을 세 개의 범주로 나눠 요약 정리한 것이었다.
작은 사건들의 예측이 첫 번째,
집단적 의미가 있는 중소 규모의 제한적 현상의 예측이 두 번째,
경향의 예측이 세 번째,
각 범주에서 시기가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됐는지, 빗나간 예측과 비교해놓은 것도 포함해서. 위원회의 구성인들 역시 각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었다.
미래위원회의 구성과 기획 단계, 그리고 구성원들의 이기심과 누려왔던 것들, 자만에 빠져 생긴 위기들, 그 위기 뒤에 숨은 거대세력들과 진실과의 조우. 연달아 터지는 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마무시했다. 그만큼 잘 짜여진 소설이다. 완급 조절이 좋은 소설이다. 멀리 뛰어 갔으면 잠시 쉬어가고, 쉬어가면 사이 해소의 방식이 곁들여지고, 다시 달려나가고 멈칫했다 움직이는. 끊임없이 내달리는 소설은 아니지만 끝까지 완주했다는 쾌감은 쥐어주는 소설인 것.
재밌는 건 한결같은 수잔의 과학적 비유이다. 과학적인 동시에 철학적이다. 매우 심도 있는 문장들이다. 수잔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려 했고, 미래위원회의 주축 인물로 보이는 마그레테 스폴리드를 만났을 때, 마그레테가 연습을 하고 있던 그 원반의 무게처럼. 너무 길게 주절거렸지만, 내가 느끼기로는 그렇다. 단순히 스릴러 소설이겠지 접근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스릴러의 가면을 쓴 과학철학서이다. 과학철학서인 동시에 삶을 다루고 있다.
빵 하나 굽는 데에 거치는 과정을 모두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식사하기 전 그 음식을 소개하는 말 또한 온통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비유로 뒤덮여있다. 수잔의 물리학에 대한 애정과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들은 마치 과학사전이나 전문과학서적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사이 사이 들어간 위트가 없었더라면 이 낯설기만한 방식이 어렵게만 다가왔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건조하지만 사유가 담긴 문체로 거대한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신선했다. 모든 게 신선함 그 자체인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에 놀랍고 그 해박한 지식에 놀랍다. 작가의 위대한 속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작가가 겪고 행했던 다양하고 특이한 경험들이 모두 녹여들 수 있는 걸 보면, 역시 소설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역자의 말로는 행갈이도 독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역자의 말처럼 이 소설의 완결의 방식의 신선하다. 그토록 물리학과 삶의 철학 사이에서 전전하던 소설이 로맨스로 끝을 맺는다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이들 가족 앞에 다시 어떤 위기가 처해질 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전보다는 나은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낙천적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진실을 고백하게 하는 수잔의 능력 속에서도, 가장 깊은 내면에 깃든 건 타인이라 말할 정도로,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가지는 의미와 그 존재감이 얼마나 큰 지 실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살아간다고 말해야 할까.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혼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타인의 존재를 결코 무시하거나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삶이란 아직 무엇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단면에는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게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난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묵직하고 심도 있는 소설인 것인가, 라고 수잔 이펙트를 통해 고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