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니스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0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미모의 청년 그저 소모됐을 뿐, 



『아도니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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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등장인물' 속 프리실라가 해미시의 약혼녀로 소개되었다. 늘상 이 둘의 관계는 사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사이도 아닌, 그런 애매모호한 긴장감을 즐기는 건가 싶은 사이였다. 이제는 서로의 마음을 속이지도 않고, 다른데 눈 돌리지도 않고, 훈훈한 비주얼 뽐내며 앞날엔 핑크빛 오오라만 풍길 줄 알았더니... 첫 페이지를 넘기기가 무섭게 두 사람 사이가 삐걱거리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얼마나 허망한 기대였는지. 해미시의 애정가득한 마을 풍경을 묘사한 직후, 그의 평화로운 의식을 깨트린 건 다름아닌 프리실라의 숙소 개조 소음이였다. 


그렇다. 비공식적이지만 이 둘은 약혼한 사이가 되었고, 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눈들이 참 많다. 어쩌면 당연한 갈등이었고, 이에 대한 조짐은 예정된 불행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시의 생활을 기대하는 프리실라와 평온한 시골마을의 생활에 만족하는 해미시. 성공한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싶은, 해미시는 그럴만한 인재가 맞다는 자기 확신으로 은근히 밀어 붙이는 프리실라와 성공을 결벽적으로 기피하는(자신의 공을 그토록 혐오하는 블레어 경감에게 돌리기도 했다), 전혀 이 마을과 낡은 숙소에서 떠날 생각이 없는 해미시. 


이 둘의 관계를 이렇게 횡설수설 길게도 늘어놓게 된 건 일말의 아쉬움이 남아서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순 없지만, 어쩌면 이런 관계성이 반복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갈등을 보여주기 이전에 살짝의 달콤함을 던져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 소설은 코지 미스터리이다. 로맨스는 부가적인 요소일 뿐, 미스터리물에 가미된 약간의 조미료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작가 스스로의 역량이 한껏 발휘되는 분야이기도 하고, 이 번 에피소드에서는 사건보다 이 둘의 관계성이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더 큰 아쉬움을 남긴다. 


본격적인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 해미시는 수개월 동안 지나치게 평화로운 로흐두 마을에 좀이 쑤셔오던 와중에,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감정만 상하게 되고, 로흐두와 마찬가지로 해미시의 담당인 마을 '드림'에 매력적인 인물 피터 하인드가 등장하게 된다. 잉글랜드 출신 상류층 인물이 '검은 산으로 둘러싸인 검은 협만 끝에 자리한 음울하고 고요한 마을 드림'에 정착하고자 한 것이다. 해미시는 왠지 모르게 사건의 냄새를 맡은 것인지 이 인물을 탐색하기 위해 '드림'을 방문한다. 로흐두와 달리 '드림'은 정말이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마을이기에 경찰의 등장에 긴장해버린다. 해미시의 묘사만 봐도 마을 간 분위기 차이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해미시 맥베스는 침실 창문을 열고 게으르게 가슴팍을 긁어 대며 바깥 호수를 바라봤다. 표백이라도 된 듯한 날이었다. 태양 아래 높이 떠 흘러가는, 우유처럼 새하얀 구름이 주변 산등성이와 호수에서 색을 빨아들여 로흐두는 마치 예술 영화에 등장하는 마을처럼 흑백으로 변해 가는 듯 보였다.  5쪽



드림은 높이 솟은 검은 산으로 둘러싸인 검고 가느다란 협만 끝에 있는 평지로, 좀 독특한 장소였다. 자갈과 검은 돌덩이로 뒤덮은 해안에는 잘 자라지 못한 덤불 외에는 아무것도 뿌리 내리지 못했다. 동쪽에서 언덕을 넘어가는 좁은 1차선 도로만이 드림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물론 바다를 통해 들어가겠다고 무모하게 덤비지 않는 한. 마을에는 교회와 마을회관, 잡화점이 하나씩 있었고, 그 주위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지만, 경찰서는 없었다. (…) 드림에는 범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심지어 주정꾼 하나도 없었다. 술집도 없거니와 술도 팔지 않기 때문이다. 16쪽


로흐두와 드림에 대한 묘사만 봐도 얼마나 대조적인지, 드림은 그야말로 고요하다 못해 따분한 마을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이런 생기 없는 마을에 미청년의 등장했으니, 작은 설렘과 소동은 물론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피터 하인드는 외관만 멀쩡한 쓰레기였으므로, 그 미모 가지고 가만히 있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지만, 그러만 이야기 진행이 안되고, 사건은 일어나지 않게 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피터 하인드는 키가 175센티미터쯤 돼 보였다. 얼굴과 몸은 황금빛으로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늘씬한 근육질 몸매에, 금빛 머리칼은 모자처럼 머리 위로 돌돌 말려 있었고, 그 아래로 높이 솟은 광대뼈에, 황금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 주위를 둘러싼 속눈썹이 짙었으며, 단호해 보이는 입술은 그린 듯이 모양이 멋졌다. 목선은 고대 조각가들이 꿈꿀 만한 모양이었다. 19쪽


"아니요." 해미시를 비롯한 고지 사람들은 싫어하는 사람의, 혹은 피터의 경우라면 '싫어진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56쪽



피터는 허영심 넘치는 속물이다 못해 다른 사람을 특히, 이성을 조종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였고, 이리저리 추파 안 던진데가 없었고, 이에 웃기고도 슬픈 사실은 피터의 눈길을 받고자 외관을 치장하는데 힘쓰는 부인들 덕에 마을에 활기가 돌게 되었던 것이다. 남편들의 분노는 덤으로 말이다. 하지만 과연 이게 아무런 낙 없이 사는 중년 여성들의 잘못만 있는 것일까. 서로에게 실망한 채로, 인내를 강요당하며 살아왔던 게 문제 아니였을까. 이번 에피소드 역시 아픈 구석 하나를 꼬집고 가게 된다. 주요 화두는 결혼이다.


잠시 후 씻지도 않고 수염이 덥수룩한 해리가 헐렁한 바지 아래로 멜빵을 축 늘어뜨린 채로 발을 질질 끌며 나타났다. 해미시는 짜증이 확 밀려왔다. 늘 이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면서, 대체 드림 남자들은 아내에게 뭘 기대하는 걸까?  85쪽


프리실라와의 다툼을 피하고자 드림의 분위기를 살피던 해미시와 그를 찾다 엉터리 점성술사로부터 제3자로 인해 헤어지게 될 거란 예언에 불안해하는 프리실라. 같이 살 집을 보러 다니면서 그 집의 문제를 발견하고 파고드는 해미시와 아버지의 반대에 반항하면서도 애써 진실을 외면하는 프리실라. 두 사람 사이에는 피터 말고 소피라는 토멜 성 호텔 접수원도 끼여들게 되는데, 제 3의 인물은 아마 이 인물일 듯 싶다. 엉망진창으로 흘러가나 싶지만, 어느 순간 서로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고 더 나아가는 듯 싶지만, 그럴 운명이 아닌가 싶은게 방해요소가 다시금 등장한다.


드림 마을 어부 해리의 딸 헤더가 찾아와 피터가 죽었다고 말하는데,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고, 갑작스럽게 마을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터와의 관계를 감추지 않았던 해리의 아내 베티는 실족사의 상태로 발견된다. 해미시는 피터의 잠적을 수상하게 여겨 그가 살아있는게 맞는지, 그의 정체를 밝히고자 동분서주한다. 그와중에 훌륭하게 강도도 잡았건만, 과잉방어로 고소당한 해미시와 이러한 일들을 부추긴 블레어 경감이 너무 여전해서 반갑기까지 했다.


피터의 과거사와 그의 가족까지 찾아 그의 생사를 알아보려 하지만 오리무중이고, 드림 마을은 전처럼 고요해졌으나 큰 상처를 입었다. 어린 헤더는 엄마를 잃었고, 피터가 오기 전까지 친한 친구사이였던 낸시, 베티, 에디, 앨리스, 아일사 모두 서로에게 등을 돌린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목사 아내 애니는 부인들에게 팬터마임 공연을 제안한다. 공연을 준비하는 중에 또다시 사건이 하나 발생되고, 이는 금방 해결되었지만, 깔끔하게 해소되는 것 없이 갈피를 못잡는 해미시는 결국 범인을 찾아낸다. 그것도 쉽게 자백도 받아냈지만, 발견한 시체는 다름아닌 픽트족 유골이었다나 뭐라나.



가치관과 신념, 각자가 살아온 세계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해미시는 상류층의 프리실라와의 신분 차이를 적잖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프리실라 역시 그녀에게 그런 삶은 당연한 것이었고, 잘 살고 싶었기에 한 선택들이 그녀를 더 속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잘 묘사한 데에 있어서 작가의 천부적인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각 인물에게 이입할 수 있도록, 적절한 개연성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해미시는 슬프게 그녀의 부드러운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그는 내일 그녀에게, 실제로 약혼을 하기는 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약혼은 이제 끝이라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둘 사이에 가로놓인,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그 모든 말들을 끌어안은 채 더는 하루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301쪽 


내 삶에 남은 게 뭘까? 그는 생각했다. 다시 말단 순경으로 강등되었고, 프리실라도 없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와 있었다. 바깥에서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눈발은 창문에 부딪히며 소곤거렸다. 스토브는 붉게 활활 타올랐고, 팬에서는 스테이크가 지글거렸다. 그때 갑자기 경찰서가 다시 야비한 바깥세상에서 그를 지켜 주는 피난처처럼 보였다. 
"그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 뿐이야." 그가 타우저에게 말했다. 
337쪽



사실 두 사람이 행복해지기에 주변의 시선들이 너무 많기도 했다. 너무 공공연하게 알려졌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고, 시골마을 속 삶이 곧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누가 누가 뭘 했는지 금방 소문으로 이어지는 형태로 너무 가깝기 때문에. 

두 사람의 행복한 결실로 이어지기까지 많은 시련과 난관이 펼쳐질 거란 예상은 했지만, 약혼하기 무섭게 헤어질 줄은 몰랐다. 이제는 도무지 앞을 예측할 수도 없다. 전편까지는 나름 사건을 추리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이번엔 나 역시 해미시처럼 헤매기만 했던 것 같다. 그것도 말도 안되는 짐작으로 제발 아니길 했던 범인의 정체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안도해야 했고, 요즘 미스터리물이 얼마나 자극적이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기도 했다. 


헤어짐을 고하는 해미시의 홀가분함이 느껴진데 반해 나에겐 아쉬움만 남았다. 가까운 친구 사이를 갈라놓기를 좋아했던 피터, 이 시리즈의 불문율처럼 죽는 이는 한결같이 못된 인물인지라 그의 죽임이 너무 당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둘 사이를 훌륭하게 방해했던 소피같은 여자가 아닌 각자에게 정말 좋은 상대가 나타나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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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두 인물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은 건 그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너무 힘들어 모든 것으로부터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을 땐 해미시가 찬양한 로흐두 마을의 풍경을 그려보곤 했다. 해미시가 바라는 삶처럼 성공을 위해 애쓰지 않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유유자적 살아가고픈 생각도 들었다. 당장이라도 로흐두 마을 속으로 들어가 살고플 정도로 고달프고 지친 나날들이었다. 


이야기에 빠져들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으니 좋다. 오직 그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너무나도 재미있고 매력적이라면 그건 바로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를 두고 한 말이라 감히 칭하고 싶다. 다음 편 역시 너무 기다려진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독자단 3기' 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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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듯 저물지 않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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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어스름한 경계에 속에서


『저물 듯 저물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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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시작은 소설로 시작된다.


차가운 겨울오슬로의 집엔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 안나와 첫 출산을 앞두고 있는 딸이 있는중년보다 노년의 할아버지에 가까워진 라스가사랑하는 여인 조야가 실종됨으로써 그녀의 흔적을 찾아 추적하기 시작하는 내용의 소설일명 북유럽 미스터리 소설이다.

 

생경한 분위기의 묘사가 이어지는데문장 중간이 끊겨 있어 당혹스러웠다인쇄가 잘못된 건가했는데 이 소설의 구성이 그랬던 것이다탐독가 미노루의 삶의 일면을 보여주기 위해 보다 나은 장치는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실제로 읽어나갈수록 그의 일상에 생기는 여러 약속들잡다한 일정들이 마치 방해물처럼 느껴질 정도로 미노루의 세계가 확고했다그러니 벨소리초인종 소리에 나도 모르게 '..'하고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50세의 미노루물려받은 유산으로도 충분히 생활 가능한그러므로 쭉 독서에 빠져사는 생활을 몇 십 년 동안 이어왔을 테고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은 인물탐독가의 삶을 살고 있다.


미노루에겐 소꿉친구 같은 친누나 스즈메가 있다. 스즈메는 독일과 일본을 오가는 사진작가이다결혼은 하지 않았지만미노루와 나기사 사이에 낳은 딸 하토도 있다하토 역시 아버지를 빼다 박은 듯 늘 독서 삼매경이다그런 미노루가 생활을 잘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세무사 친구 오타케. 미노루는 최근 우연히 재회하게 된 준코와 몇 번의 만남을 가지곤 했다


스즈메가 독일에서 상을 받았을 때이를 기념하기 위한 소프트아이스크림 가게를 열기도 했는데, 가게 이름을 스즈메가 피사체로 즐겨 찍었던 베를린 공원 이름을 따서 '슈프레 파크'로 지었다. 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정직원으로 고용된 미혼모 유마, 유마의 출산때문에 그 대신 일하게 된 그녀 친구 아카네가 있다미노루가 집주인인 건물의 세들어 사는 사야카와 치카 커플도 등장한다.

 

중심축이 되는 사건이나 뚜렷한 서사 대신 미노루와 연관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각기 다른 자리에서 그들의 생활과 생각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마치 잔잔한 일일드라마를 보는 듯 같다.

 

 

 

관계성에 대하여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만나는 것도 아닌 경우사람이 누군가를 만나는 이유또는 만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14

 

남들이 보기에는 뚜렷한 직업도 없이 책만 읽고 사는 미노루가 철이 없고 한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무엇보다 부러움이 크기도 할테다그의 세계에 빠져 있는 한 그와 연관된 인간관계 역시 적당한 선을 두고 멈춰서 있을 수밖에 없다나기사가 그런 미노루에게 지쳐 다른 이와 재혼을 하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게 됐고, 미노루는 하토에게 더이상 양육비를 지불하지 못하게 되니 소외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곁에 있으면서 언제나 혼자인 듯한 외로움을 느꼈어야 할 나기사에 비하면 어떠한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늘 선택이란 것이 존재하며이는 모두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이 짜증스러움은 전에도 경험한 기억이 있다책을 읽고 있을 때면 미노루는 거기 있으면서 없는 사람 같았다(더구나 그는 늘 책을 읽었다). 미노루와 사귀는 동안나기사는 언제나 한기를 느끼는 것처럼 외로웠다.

38

 

반면그의 친구 오타케는 미노루와는 정반대의 성향의 인물로 보여진다한 번의 결혼이혼또 다시 재혼을 하게 된 오타케는 자신에게 과분하게 사랑스러운어린 아내가 무척 소중하다그런 아내가 소중한만큼 그가 아내에게 표현하는 애정방식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실제로도 그러했지만오타케는 성실한 인물이다깔끔한 태도로 미노루의 모든 일들을 꼼꼼하게 관리해준다그런 오타케는 자신의 세상속에서 오로지 아내 야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어쩌면 상대로 하여금 너무 무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잦은 문자몰래 자신의 집 들여다보고아내의 뒤를 밟는 등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선 행동들은 결국 그에겐 큰 좌절의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미노루와 스즈메. 각기 다른 부분에서 고집을 부리는 게 꼭 닮았다. 남매의 고집을 말릴 수가 없다. 스즈메는 아이를 무서워하지만 하토와는 잘 맞는다. 이름이 새와 연관된 것이라 그럴까. 스즈메는 언제까지고 그런 자유로운 생활을 이어갈 것 같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면 찾아가고, 그렇게 독일과 일본을 오가는 생활을 계속해서 이어갈 것만 같다. 종잡을 수 없는 것도 비슷한 부분일까. 미노루의 오지랖을 받아들이는 유마를 돈을 보고 접근한 여자로 폄하했던 스즈메가, 아카네의 빈말 같은 제안에 쉽게 휩쓸리기도 한다. 전혀 맞지 않는 조합으로 나란히 한 집에서 술을 마시며 노는 모습이란. 

 

한때 미노루의 연인이었던 나기사는 그와 헤어진 후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단순하게 판단하기에 오류가 있다나기사는 미노루가 싫어져서 헤어진 게 아니었고결혼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예쁜 딸도 있었고보통의 가족처럼 여행도 다니고 했다하지만 미노루가 그만의 세계에 빠져들 때면자신은 파고들 수 없는 그 세계를 증오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이건 사랑과 관계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미노루는 준코와의 만남에서 역시 수동적이고 얕은 태도를 보인다


나기사는 공유하는 삶을 꿈꿨는 지도 모른다함께 보고함께 나누는 것그래서 책보다는 차라리 TV를 보는 남편이 나았던 것이다적어도 TV는 같이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까.

 

자신의 회사 후배였지만나기사와 하토의 삶을 책임지고 싶다는 사람에게 나기사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녀에겐 그런 울타리가 필요했던 것이다그러나 책과 TV.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 게 아닐까하나에 빠지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두 남자아이와 있을 때만 요상한 욕망을 표출하는 불온한 방식의 애정표현. 따뜻하고 온화한 평범한 가정그 속에 피어나는 행복그건 바로 나기사가 바란대로 이뤄지는 듯 보인다그러나 여전히 공허한 마음은 어떡해야 할까.

 

그 여행기억을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졌다그 무렵자신들은 분명히 자유로웠다자유로웠지만나기사는 자유의 대가인 고독을 견딜 수 없었다. 96

 

많은 사람들이 흔히 있지만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이라고 형용하는 가족의 단란한 순간먼 훗날이 되어서야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때는 행복했다고 깨닫는 유의 순간이다그런데 왜때로 자신은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일까. 175

 

이런 것 역시 그런 한순간일 것이라고 나기사는 분류해본다훗날이 되어서야 그때는 행복했다고 깨닫는가족이 보내는 일상의 한 장면유리문을 열고 나기사는 연기가 뭉글거리는 베란다로 돌아간다하토가 언제나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스파클라 폭죽-귀중한 것-세 개가 실외기 위에 가지런히 따로 놓여 있었다. 183

 

새로운 가족이 되었지만하토의 마음속엔 아빠는 언제나 미노루이고 엄마는 언제나 나기사인 것이다.

 

조그만 불쾌함도 말의 어긋남도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일상 속에 묻히고밤과 낮이 되풀이되고부부가 아니면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만다세상에서는 그런 걸 인연이라고 하리라그러니 인연이라는 것은 세상의 조그만 불쾌함의 축척이다. 268



'인연'에 대해그 무게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 듯한 문장이다.

 

 

그나마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커플은 아무래도 치카와 사야카 커플 같다음식점을 운영하는 치카와 선생님 사야카둘의 만남이 어떻게 처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서로간에는 큰 부딪힘없이 무난히 서로를 위해 잘 살아가고 있다시골에서의 평온한 삶을 꿈꾸는 사야카와 그의 맘을 들여다본 듯 별장을 알아보는 치카마음 따뜻해지는 커플이다사람 사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그래도 여전히 사랑과 존중으로 그 다정함이 이어지는 관계를 꿈꾸게 된다.

 

치카를 만났을 때사야카는 이 세상에 아무런 바람도 갖고 있지 않았다연애도 우정도 믿지 않았고그저 혼자서 조용히 살리라고 마음을 다진 상태였다그러나 지금사야카는 치카의 발톱이 완두콩 색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안다치카가 혼자서는 미용실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매일 아침 불단 앞에서 합장한다는 것도손님에게는 팔지만 자신은 굴도 멍게도 생선 애도 이리도 먹지 않는다는 것도. 242

 

유마는 미혼모다미노루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했었다과거형이 된 이유는 그녀는 지금 가정이 있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고홀로 생활하고 있다전에는 애인을 중심으로 돌아갔던 세상이 이제는 자신의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당연히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애인은 유마를 책임지지 않았다그릇된 바람을 꿈꾼 잘못은 유마에게도 있었다.

 

미노루는 그런 유마의 사정을 알고서 유마의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올려주었다게다가 매달 양육비도 지원한다이만한 오지랖이 또 어딨을까 싶고 그런 친절이 부담스럽기도 한 유마다의무감에 한 번씩 아이 얼굴을 보여주지만역시 이상한 관계이다가진 게 넘치면 이런 것도 가능해지는 것일까.

 

일단이 아무튼으로 변했네

자기 목소리에 원망이 섞여 있다는 걸 안 유마는 슬퍼졌다. 246

 

 

죽음에 대하여

 

다양한 인물들로 인해 세대간 나이 차이가 있지만미노루와 가까운 주변 인물들은 흔히 황혼에 접어들었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는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하긴 지금은 점점 늦춰지는 추세로 그런 표현도 너무 옛스러워졌다준코는 미노루와의 관계에서 해소되지 않는 불만이 있었고은근한 즐거움도 있었다아무런 걱정 없는 직장생활로자신의 아들 고우키는 한없이 착한 아들이다그런 아들이 갑자기 정원사가 되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고 정원사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한다그것도 어이없는데 헤어진 전남편은 아들을 믿고 그의 선택을 무조건 지지하겠다고 한다준코는 속을 털어놓고 싶어 가나코에게 연락했지만되레 두려움만 얻게 된다.

 

죽음과 마냥 멀지만은 않은 나이다삶 자체가 죽음으로 흘러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우습게도 사람은 소중한 이의 상실로부터 자신의 실존에 대해 각성하게 된다사실은 자신의 죽음을 먼저 걱정할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당장 오늘 내가 어떤 사고나 병 등으로 이 세상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준코는 가나코가 사라지고 이 세상에 남겨질 자신을 걱정하게 된다죽음은 당연한 것이고알고 있지만그걸 주변 지인이나 가족에게 적용할 때면 또 달라지는 것이다그래서 남겨진 건 두려움이다큰 고통과 슬픔 속에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채로 채워지지 않는 그 틈 사이로 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준코는 벌써 몇 번이나 뜻하지 않은 장례식에 참석했다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해는 하고 있다그래서 더욱이 가나코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현실감이 없는데도 폭력적일 정도로 강하고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지금이 아니라도언젠가는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있을 수 없는 일이고각오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두려워서 그만 각오를 할 것 같다

278-279

 

소설 내에는 소설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장례식도 자주 묘사된다미노루만 해도 벌써 세 차례나 다녀갔다준코 역시 뜻하지 않게 몇 번 참석하게 됐다세월이 그만큼 많이 흘렀다는 사실을 주변의 일들을 통해 새삼 실감하게 해주는 것 같다지금의 미노루의 그의 친구들의 주변에는 그게 장례식으로 표현되고 있다어느 순간 멀리서 들여다보면 아득하게도 모두 부질없이 느껴지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그래서 어떠한가치열한 이 삶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고매순간 흔들리며 때론 휘청거렸고때론 한없이 행복한 순간들을 있었을 것이다그 순간들을 지나기까지 많은 선택들을 해야 했고이는 곧 후회 혹은 안도가 나머지 자리를 채워갈 수도 있다.

 

삶과 죽음그 경계를 떠올릴 때면 한없이 묘연해진다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 인지부조화가 일어나게 된다.

 

미노루는 이해할 수 없었다당연히 그건 소설이고조니도 라우라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그러나그래서 어떻다는 것인지세상 어딘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일까. 286



모두가 그 경계속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 속 수많은 일들 중에는 겪고 싶지 않았던 것들도 많았다굳이 겪을 필요가 있나하지만 그렇게 하나씩 겪어나가다 보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기도 한다마치 내가 겪어보지 않았다면고민해보지 않았을 테고행동하지 않았을 테니까닥쳐오는 일들에 대해 다시 바로 선 선택과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밖에

 

극히 세밀하고 고요한 듯한 분위기의 묘사 덕분인지 인물간의 관계성의 어지러움이나 이해 못할 행동들이 모두 무난하게 스쳐가는 기분이 든다여러 장면 중에 특히 좋았던 건 음식에 관한 묘사였다.


이를테면 미노루가 어머니로부터 선물과 받는 이의 도량에 대해 말했던 기억을 회상한 후선물 받은 대합을 넣고 맑은 장국을 끓이는 미노루의 시선과 태도만으로도 벌써 군침이 돈다뭔가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어렸을 때조개가 입을 여는 순간을 보는 게 좋았다요리하는 어머니 옆에서 종종 구경하곤 했다어느 조개가 제일 먼저 입을 열지 마음속으로 점찍고는 그 조개를 응원하면서 지켜보았다.(틈이 살짝 벌어지더니 동시에 냄비에 타닥타닥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대합이 몸을 떨기 시작한다맑았던 국물이 보얗고 반투명하게 흐려졌는데도 대합은 열리지 않는다미노루는 숨죽이고 기다린다불쑥정말 불쑥처음 한 개가 입을 짝 벌린다이어서 두 번째도세 번째도. 92-93



처음 미노루가 읽고 있던 북유럽 미스터리의 결말은 의외로 아카네를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독자인 우리에겐 알려주지 않은 채 미노루는 다시 새 책을 집어들었기에 조금 아쉬웠는데 모두 해소되었다. 그렇게 소설 속 소설을 읽는 재미도 있었다. 



 **


 

너무 일상적이지만 그게 결코 평범하지 않은 묘한 특성을 가진 작품이다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처음 읽어보았다학부생 때는 유행처럼 많이들 읽으니난 오히려 멀리하게 되었던 것 같다그러나 이런 뒷북으로 하나씩 그의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볼 수도 있겠다살아있는 한삶은 늘 저물 듯 저물지 않는 상태인 것 같다이렇게 매일을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가지만살아있으니 느끼고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그러므로 오늘도 그저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해야 할 나의 몫의 일을 해내고나를 위한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이 리뷰는 소담출판사의 '꼼꼼평가단7기' 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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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8-01-05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쿠니 가오리 소설을 한참 미뤄두었는데 , 리뷰를 보니 이젠 읽고 싶어져요 . 넘 섬세한 글 잘 읽고 갑니다 .^^

2018-01-05 15:36   좋아요 1 | URL
서툰 리뷰였는데...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녀의 씨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송은주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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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찾게 된다는 건, 




『마녀의 씨』















**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재구성한 극의 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주인공 필릭스는 연극이 곧 삶과 같은 사람이다. 모든 열정이 쏟아붓는 그에게 소중한 가족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큰 시련까지 겪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결혼 후 일찍이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하게 된 필릭스는 어린 딸마저 일 때문에 잘 돌보지 못하고, 죄책감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오게 되는데, 바로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한 연극 무대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었다. 


극을 무대 위에 올리기까지 온갖 잡다한 과정들, 형식적인 인간관계와 행사 등을 대신 해온 토니가 반란을 일으키고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아내를 잃고, 어린 딸 미란다와 함께 앞으로 살아갈 날을 그렸던 필릭스는 소중했던 딸 마저 잃고 난 후, 이런 지옥 같은 현실을 회피하려 <템페스트>에 몰두한다수많은 명작들 속 딸들이 다시 회생 했듯이 극 속에서 미란다를 다시 살려내고자 했다마치 환생의 마법을 부리듯.


<템페스트> 속 프로스페로가 동생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내 쫓겼지만그의 곁엔 수호 천사와 같은 딸 미란다가 있었던 것처럼. 그의 곁엔 사랑스럽운 딸 미란다가 있는 게 당연했다.


필릭스는 애초에 잃어버린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오로지 템페스트에만 몰두한다캐스팅부터 소품 하나 하나까지더 극적이고 최상의 예술로 다시 태어날모든 한계를 넘어선 듯한 연출을그가 만들어내는 이 마법 같은 연극은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자사랑하는 딸 미란다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처럼 믿었고그건 곧 더한 좌절과 절망으로 맞이하게 된다.

 

 

미란다는 잃어버린 적이 없는 딸이 될 것이다물이 새는 배를 타고 검은 바다를 표류할 때추방당한 아버지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수호천사인 딸죽지 않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자라난 딸그가 실제 삶에서는 가질 수 없었으나 그의 예술을 통해서는 여전히 찾아낼 수 있는 존재곁눈질로 언뜻 볼 수 있는 것.    32

 

 

모든 걸 잃게 된 필릭스는 정처 없이 운전한 끝에 다다른 곳기본적인 것만 갖춰진 아주 오래돼 보이는 집을 발견하게 되고그동안 전전했던 임대 아파트의 짐을 정리한 뒤낡은 판잣집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듀크라는 새로운 가명으로 생활을 시작하며연극에 관한 소식을 듣지 않으려 했으나뜻대로 잘 되지 않았고지역 신문을 비롯한 사서 리뷰까지 찾아보게 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고전을 읽기 시작했으나온갖 삶의 형태가 모두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지는 것이 보기 힘들었던 그는곧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나는 동화책을 읽기 시작한다이러한 독서도 곧 침묵의 고독 속에 침잠하게 되고, 홀로 운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생의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고곧 삶의 목표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모든 것을 받쳤지만 중단되어 버린 <템페스트>를 되찾기로 하자곧 자신에게서 연극을 빼앗아버린 토니나 샐에게 복수를 꿈꾸게 된다.

 

처음에는 복수에 대한 열망이 강해 토니의 대한 소식을 모조리 찾아보게 된다. 어려울 것 없이, 검색 몇 번 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행보를 알 수 있는 세상 속에서 말아다. 토니의 행보 중 가장 가증스러운 건 필릭스의 아이템을 통해 여러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었다그러던 와중에도 필릭스는 잃어버린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녀가 살아있다는 착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9년이란 오랜 운둔생활로 인해 정신적으로 이상해져 가는 것을 느낀 필릭스는 곧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가 찾게 된 일은 인근 플레처 교도소의 문학독해 수업 고교 과정 임시 교사직이었다. <호밀밭 파수꾼>과 같이 기존의 교육 과정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를 선택하여 수업을 진행하게 되는데처음에 부딪혔던 여러 애로 사항들도 점차 해소되어 갔고나중엔 지원자가 늘 정도로 인기 있는 수업이 되었다.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곧 수감자들이었으므로직접적인 연극 무대를 만드는 것엔 한계가 있었지만극의 각 장을 영상으로 촬영하여 편집하고 이를 최종적으로 상영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으므로 여러 면에서 호평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일한 지 4년 차가 되어갈 즈음그의 명성을 듣고 샐과 토니를 비롯한 인사들이 그의 수업을 보러 방문하게 되며필릭스는 잠시 내려놓았던 복수의 대한 열망을 다시금 불태우게 된다.

 

그는 남들이 의문을 갖는 <템페스트>를 진행 시키면서미란다 캐스팅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하지만 한결같은 생각으로 자신이 원래 캐스팅 했던 무용수 출신 앤마리를 캐스팅 하고자 한다모험과 가까웠지만그녀도 <템페스트>가 무산된 이후별다른 이력을 쌓지 못하고 있었기에 다시 함께 해낼 수 있었다그녀가 캐스팅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재소자들은 각종 욕설을 내뱉으며 반응하는데이 또한 필릭스 수업의 특징인 셰익스피어식 욕설이라는 게 재밌는 부분이다.

 

극을 진행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필릭스를 보면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겪게 될 모든 난관을, 가리지 않고 해결할 수 있을만한 힘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저 귀찮고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피하고 싶은 일은 토니에게 떠맡겼을 뿐인 것이다


미란다의 캐스팅 문제를 해결한 후프로스페로의 부하 격인 요정 아리엘을 캐스팅 해야 할 때그들에게 아리엘에 대한 편견이나 이미지를 완전 다른 방식으로 그려낼 수 있도록결국엔 모두가 지원하고 싶어하는 역할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마치 프로스페로 현신이 되어 마법을 부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필릭스의 복수가 차근히 진행되어 간다고 믿을수록, 그가 혼자 남겨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욱 안타깝게 다가왔다. 어느 누가 감히 그에게 정신 이상자와 다를 바 없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누구보다 소중했던 이를 잃게 된 사람이면,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상의 말을 믿을 수 없고, 믿기지 않는다.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한 해가 지날수록 자신과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딸의 모습을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보같으니그는 혼잣말을 한다그 애는 여기 없어한 번도 여기 있었던 적 없었어네 상상과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 낸 생각일 뿐그저 그 뿐이었지이젠 받아들여.

그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159



필릭스는 연극을 만들어가는 그 자체가 삶인 사람이다. 때문에 템페스트에 더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성공적으로 해내면, 자신의 복수는 물론 곁에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라던 딸 미란다에 대해, 직면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본 게 아니었을까.


섬은 마법일까필릭스는 자문한다섬은 많은 것이지만그 속에 그가 언급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섬은 극장이다프로스페로는 연출자이다그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그 속에 또 다른 연극이 있다그의 마법이 계속되고 연극이 성공한다면 그는 마음으로부터 바라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다하지만 실패한다면…  171


무사히 캐스팅을 마치고, 각 역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작업과 더불어 각각 필요한 소품 등 구체적인 복수의 과정을 진행해갈 때 혹여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닌지, 괜히 함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잘 들어라그들이 울부짖는다그는 생각한다잘 들어라그들이 울부짖는다저들이 쫓기게 하여라이제 나의 모든 원수들이 내 자비 하에 들어왔다. 192


그러나 진짜 삶은 눈이 부시도록 다채롭다고 그의 머릿속 한구석에서 말한다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포함하여 온갖 빛깔들로 이루어져 있다모든 자연은 불꽃이다모든 것이 형태를 이루고모든 것이 만개하고모든 것이 희미해진다우리는 느린 구름이다. 261


작품 속 절정을 이루는 부분은 극을 실제로 진행되는 부분에서 비롯된다. 복수의 대상들 외엔 미리 찍어둔 영상을 재생시켜 놓고서, 대상자들에겐 관객참여형 연극이라며 속인 채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그대로 본뜬듯한 구체적인 복수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플레처 교도소를 방문한 다섯 명의 인사들은, 법무부 장관 샐 오낼리, 샐의 아들이자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 아들 프레디, 문화유산부 장관 토니 프라이스보훈처장 시버트 스탠리고든 스트래터지의 로니 고든이라는 인물들. 이들은 곧 필릭스가 꼼꼼히 설계한 덫에 하나 둘씩 빠져 허우적대기 바쁘다. 서로가 죽었다 오해하게 된 샐 부자, 잠시 정신을 잃은 사람을 자신의 출세 욕망을 위해 없애려 부추기는 토니, 그리고 그런 악한 습성을 담은 영상물은 그대로 필릭스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유리한 증거가 되어준다. 


그들과 함께 긴장하며 이 복수가 무사히 마치기를 간절히 빌었다. 

비록 그 끝에 왠지 모를 허무만 남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혼잣말을 한다. “어쨌든 해냈어적어도 실패하지는 않았어어째서 이렇게 허탈한 기분이 들까?"

더 희귀한 행동은/복수보다는 미덕에 있네그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말이다.

미란다다그녀가 그에게 대사를 불러 주고 있다. 349



그렇게 그들의 수업은 향후 몇 년 간은 안정적인 지원을 받고 진행될 것이며, 필릭스 역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단순히 그들의 수업을 지킴으로써 끝이 난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그들이 맡았던 역할의 극 이후의 모습은 어떨지 상상해보는 작업 또한 굉장히 흥미로웠다. 기발하고도 독창적인 생각들이 많았다. 대체로 긍정적이었고, 그 인물의 성향에 맞게 그려진 미래였다. 그러나 악한 자의 음습하고 비관적인 미래에 모두 동의하기 어려워했고, 필릭스는 그 부분에서 유연하게 대처했다. 본래 그런 게 아닐까. 삶 자체가 고통이자 인내인데, 앞으로 살아갈 날 마저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될 테니까.


사람들의 긴장이 풀어진다희망의 문이 열렸다그들은 희망의 문을 좋아한다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368


**


템페스트를 하기로 결정한 이후 자세히 서술된 필릭스의 수업 방식은 독특하면서도 진중하다. 그를 따라가 생각하고, 상상하다 보면 그 인물에 대해 푹 빠질 것만 같다주요 공간이 되는 에 대해 각 인물 별로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해보는 것 역시 수업을 참여하는 느낌으로 읽게 됐다. 

(사악한 마녀라 불리는 어머니가 자신을 섬에 홀로 낳고 그 곁을 떠나야 했지만칼리반에게 섬은 사랑스러운 공간처럼 느끼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원작의 각각의 장면들이 군데군데 들어가 있고, 때맞춰 배치된 대사들이 인상적이다. 


이후 뒤풀이까지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뚫린 구멍, 미란다의 자리를 비로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프로스페로가 복수를 마치고 아리엘에게 자유를 주었듯이, 미란다 역시 자유로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템페스트>가 가진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고전에 대해 무지한 게 부끄러운 일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몇몇 작품들만 가벼이 접했을 뿐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거릿 애티우드의 『마녀의 씨』는 현대식 <템페스트>로 재탄생 되었지만, 이는 곧 셰익스피어를 읽어나가는 작업과도 같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제목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마녀의 씨로 지칭되는 것은 괴물로 괄시 받는 칼리반이다. <템페스트> 속 프로스페로가 어쩌면 자신의 딸의 행복을 위해 복수의 기회의 끈을 잡았고, 오로지 홀로 되었을 때, 곁에 남게 된 칼리반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했듯이. 누구나 괴물과 같은 어둠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 것일까. 여전히 부족한 독해력으로 인해 헤매고 있다. 이건 원작을 다시 한번 접한 뒤, 생각해 볼 거리 같다. 


고전의 재탄생, 재해석된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부담감이 들었다. 미천한 독서의 바닥을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기도 했고, 여러 방면에서 언급되는 작가의 작품이면 내가 과연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소심한 염려와 다르게 『마녀의 씨』는 몰입감이 아주 좋은 작품이다. 분량이 꽤 되면서도 주인공을 비롯한 극 속 인물의 대한 이해까지도 치밀하고 섬세한 구성 속에 잘 녹아들어 그저 따라가기만 해도 큰 즐거움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올해는 유난히 길고도 험난했으며,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한 해를 마무리할 시점에서 좋은 작품을 접하고 두고두고 곁에 둘 수 있는 게 큰 선물 같고, 참 감사한 일이다. 넓게 펼쳐진 이야기 속 세계에서 쉬어갈 수 있어 다행스럽기도 하고. 아직 이겨내지 못했지만, 필릭스가 그랬듯이 언젠가 나도 직면할 수 있을까...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이라 생각되지만...당분간은 이렇게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보고 싶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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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우울
가와사키 소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소심하고 겁 많은 프라모델 마니아 다나카 서장과 그의 유능한 부하들




『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우울』





**



주인공 다나카 겐이치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했던 수재이자도쿄대 출신 국가공무원 1종 시험에 합격한 경찰 관료 엘리트이다그러나 그의 인생의 주체적으로 결정된 사항이라기보다 그저 공부를 잘했기에주변의 권유가 있었기에단순히 아버지가 경찰관이셨기에도쿄대 문과 1류에 들어갔고경찰 관료가 된 것이다주변에 잘 휩쓸리고 출세나 야망이나 정의나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인 것그나마 있는 인생 최종 목표란 정년퇴임 후경찰청 어느 산하단체에 들어가 프라모델 구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 전체를 완성하는 것이다.

 

프라모델 생각으로 사는상당한 프라모델 마니아인 주인공.

 

플라스틱 모델의 일본식 줄임말인 프라모델은 플라스틱으로 된 조립식 모형 장난감이다조립식 키트가 내장되어 있으며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부품을 조립하여 만드는데 다나카는 부품 도색부터 정교하게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걸 추구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다나카 겐이치는 갑작스러운 경찰청 내부의 인사이동으로 시코쿠의 시골 경찰서 서장으로 발령받게 된다선배로부터 '현장 사건에 참견하거나 관여하지 마라네가 할 일은 부하 직원이 올리는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뿐이다.'라는 조언을 들었고이를 그대로 이행할 생각으로 늘 안주머니 속에 도장을 넣고 다닌다재임기간 동안은 조용히 프라모델 조립만 할 수 있을 거라는 다나카의 기대와는 다르게 조용한 시골에 별별 사건들이그것도 엄청난 스케일로 연달아 발생된다명탐정 코난인가소년탐정 김전일인가 가는 곳마다 사건이 터지는 인물의 특성 수순을 그대로 밟고 있다.

 

일본의 경찰사회에서는 일명 커리어라고 하는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는 게 아닌 관리직은 현장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게 보통의 관례인 듯 하다일본드라마에서도 형사드라마는 그 장르적 특성에 따라 무수히 많은데열혈경찰과 고위관료의 특성이 대체로 비슷한 양면을 보이기 있기 때문이다물론 주인공 특유의 열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각 롤에 맞춰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런데 기발하게도 다나카 겐이치는 이와는 전혀 무관하다정말 도장만 잘 찍고 싶고조용히 지내고 싶은데자꾸만 사건과 엮이게 되고 심지어 해결하는 격이 돼버리는 구성이 대놓고 노린 재미 포인트이다직장에서도 온통 프라모델 생각밖에 없는 남자가그와 관련된 생각들을 혼잣말로 내뱉게 되고그게 수사의 힌트가 되어 해결로 이어지는 방식인 것이다라고 내뱉었더니라고 받아들여 열 배는 더 열심히 뛰는 부하직원들의 유능함에 무사히 사건이 종결되고 한 에피소드가 마무리된다.


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부임/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사투/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분노/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고투/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숙적/경사 기쿠치 하루나의 동요/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귀환


총 7가지 에피소드 식의 이야기들이 해프닝처럼 진행된다.

 

처음 시작이 보기 좋은 오해로 시작되어반복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프라모델 제작에 관해서는 상당히 완고한 제작 정신을 지닌 주인공다나카 서장은 프라모델을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긍지에 후퇴는 없다라는 무의식의 한 마디가 교체는 없다”(일본어상으로 발음이 같다고 함)로 전달되고일선 형사들의 열의를 더 불태우게 한다그런 작은 오해의 시작으로 사건은 순방향을 타고 무사해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매번 다른 사건이 발생될 뿐이같은 오해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엘리트 관료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같은 존재가 되어가지만, 부하직원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으로 변모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빽(?)도 생기게 되니...이런 우연함으로 가득한 삶이면 살아볼만 하지 않은가. 본인은 절대 의도하지 않았지만, 좋을대로 해석되는 오해들로 인해 뼛속부터 경찰인 사람이 돼버리고, 그러나 머릿속엔 온통 프라모델 생각뿐인..별다른 갈등과 장애물이 없는, 유연한 삶이 아닌가. 물론 이런 유능한 부하들이 있다는 가정 하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도 생각보다 잘 구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실제로 영상화해도 될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표정변화가 없는 모리 부서장비서 격인 기쿠치 경사돼지마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행동대장 마쓰노코지 순경과 니노미야 주임수사관이들에게 각각 비슷한 오해와 우연들이 겹쳐 사건해결에 공을 세우는 것은 정작 본인들이지만이를 모른 채 뛰어난 직감과 통찰력으로 사건을 면밀히 보고 있다는 오해로 다나카 서장을 존경으로 대한다그의 아내인 가오리는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그들만의 기념일만 잘 챙겨주면 만사 오케이인 인물로 드물게 등장한다.

 

사건이란 것도 결코 작지 않다조용한 시골마을이지만연쇄살인사건테러뺑소니공갈협박주가조작납치 등등 그 종류와 스케일도 남다르다어떤 부분은 아예 엉뚱하게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짜인 사건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어설픈 구석도 보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도 단순한 구성의 반복인데다 읽고 나면 또 다음이 궁금해지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 없이가볍게 읽기에 아주 좋다.

 

각 에피소드의 앞엔 말줄임표로 가득한내면의 소리 같은 표현들이 이어지는데처음엔 의미를 전혀 파악하기 힘들기도 하지만읽다보면 누구의 속내인가 파악하는 재미도 있다.

 

또한잦은 부상으로 남들이 살아가는 동안 다 경험하지 못할 온갖 상황과 부상을 입게 되는 게 또 다른 웃음 포인트 같다마치 매 사건마다 부상과 공적을 등가교환하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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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 가와사키 소시는 일본에서 아주 어두운 호러미스터리를 잘 쓰는 작가로 유명하다고 한다그러다 보니 기존 독자들에게 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우울은 다소 놀라웠을 것 같다아주 정반대의 분위기로 코믹한 경찰소설을 가지고 나왔으니 말이다그의 전작도 궁금해졌지만다나카 겐이치의 다음 이야기도 더 만나보고 싶다.


어조나 문장을 판단하는 건 어렵지만, 나열하는 식의 표현들이 이어졌기 때문에 그리 매력적이진 않다. 그러나 정보전달은 잘 되니 그 기능은 제대로 하고 있는 듯하다. 이 또한 번역이 아닌 원문으로 읽는다면 더 잘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원문을 읽을 능력은 없지만.

 

요즘 내 즐거움 중에 하나인 해머시 맥베스 시리즈와 그 결이 닮은 듯하다비슷한 듯 다르지만확실한 건 팍팍한 일상 속에 하나의 큰 즐거움이 되어준다는 점이다잠깐 동안 유쾌한 이야기 속 세계가 잠깐의 일탈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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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이시도로, 원더풀 라이프
엔리코 이안니엘로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상실 속 희망이 교차되는 휘파람 소년의 성장기,



『원더풀 이시도로, 원더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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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이시도로, 원더풀 라이프』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 마티넬라를 배경으로 이시도로의 익살스럽고도 동화 같은 성장기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구성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눠져 있다. 1부는 평화로운 마을을 배경으로 이시도로의 순수한 소년 시절을 환상적이고도 유쾌하게 보여주며, 2부는 대지진 이후, 상실을 겪게 된 이시도로가 조금씩 현실과 마주하며 성장하는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다.



말보다 더 능숙하게 휘파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소년 이시도로매일 욕실에서 사랑의 편지를 쓰는 낭만적인 공산주의자 아빠 퀴리노사랑스러운 파스타 장인 엄마 스텔라. 다정하고 행복한 분위기가 가득한 이 가족은 독특한 자신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덕분에 이시도로는 특별한 소통 방식을 가지는 동시에, 삶에 대한 여러가지 태도들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습득하게 된 게 아닐까.


이시도로는 태어났을 때 "응애대신에 "프리"하고 휘파람부터 불었다그때부터 이시도로의 휘파람이라는 독특하고 멋진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알리라는 인도 검은 새와 휘파람으로 대화를 자유자재로 나누게 된다. 무려 두 살 배기 아이가 말이다. 


이는 그들만의 하나의 '언어' 이며, 휘파람 언어인 '우를라피스키오'를 만들어 낸다.


작품 초반부에 이시도로의 가족을 소개하며 이름 짓기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가 등장한 것은 이시도로에게 붙여질 다양한 이름에 대한 암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평화로운 이 마을에서는 한때 성 따라 이름 짓기가 유행이었고, 그 뜻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 익살스럽고, 어처구니 없는 이름투성이다. 이시도로 역시 그런 위험에 처할 뻔 했으나, 다행히 그런 유행이 한차례 지나간 후였고, 후에 불리게 된 다른 이름들은 전혀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런 이름짓기가 유행한다는 자체가 이야기 속 마을의 분위기가 어떠한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1부는 전반적으로 이시도로의 가족, 이시도로의 첫사랑 마렐라, 이시도로를 무대 위로 올려 그의 재능을 널리 펼치게 도와주는 칸초네 아저씨, 이시도로에게 폭넓은 가르침으로 표현력을 길러준 프랑스 민속학자 르노 아저씨 등 소박하고도 유쾌한,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평범한 일상 이야기가 이어진다.


때론 떠들썩하게, 때론 고요하게. 1부 이야기 속 분위기는 대체로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부모님의 행복한 결혼식, 마렐라의 갑작스러운 뇌성마비로 인한 헤어짐, 1980년 6월 26일 라체도니아 광장의 기적 등 굵직한 사건들이 중심이 된다. 


특히 라체도니아 광장에서 노첼라 아저씨의 연주에 이어 이시도로의 우를라피스키오가 펼쳐진 후, 염려 속에서 관객들에게 혁명적 연설을 하는 이시도로에게, 이 신기한 휘파람으로 노래하며, 말하는 소년에게 사람들은 점점 이끌리게 된다. 


소년의 말에 귀 기울이며, 우를라피스키오를 하나 하나 따라해 보는 사람들 마음 속에 <자유롭고단결하고굳건하라주인도 노예도 없다.>는 말이 용기와 희망으로 다가오게 된다. 관객을 하나로 아우르게 한 휘파람 소년의 힘용기와 희망을 주는 휘파람 언어를 보며 이시도로가 가지고 있는 특별함에 대해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1부의 말미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부모님을 잃게 된 이시도로는 갑작스러운 상실을 겪으며, 이내 말을 잃게 된다. 아이였지만 마냥 아이 같지만 않던, 애어른 같던 이시도로는 벙어리로 몇 년을 살아가게 되지만, 여전히 휘파람 언어를 나누며 자신의 곁을 지키는, 형제 같은 검은 새 '알리'와 함께 한 단계씩 성장해간다. 


2부에서는 마을과 멀리 떨어진 어느 지역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이시도로의 모습이 그려진다. 처음 수도원 생활을 시작할 때 알게 된 간호사 레나타 누나, 가족을 잃은 슬픔에 이시도로와 비슷한 듯 다르게 극복하며 살아가는 장님 엔초 체호프 아저씨 등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치유해가는 인연들을 만나게 된다.


어느 정도 성장하여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시도로는 엔초 아저씨(빈첸초)의 집에 머물게 된다. 이른 아침, 나폴리 길 안내 등 도시 산책을 도우며 지내게 되고, 또 하나의 비밀을 알게 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관계 속에서 이시도로는 좀더 현실을 마주하게 되고, 점차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게 된다.


새로운 곳에서 생활하기 시작됐을 때 이시도로에게 뜻밖의 선물과 같은 인연을 만나게 됐음을 알리는 마지막 욕실에서 보내는 사랑의 편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뭉클하게 했다. 마치 아버지 퀴리노에 이어 아들 이시도로의 사랑이 아름답게 이어지고 것처럼.


자신의 전부와 같은 가족을 잃었지만, 그 상처를 잘 헤아려 볼 줄 알았던 소년의 성장기는 아프지만 온기와 용기를 품고 있다. 솔직하고 투명한 아이의 시선이 당혹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유쾌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이시도로는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마주하며 현실을 알아가고 배워나가게 된다. 아주 어린 소년일 때부터 다정한 부모님으로부터 잃어봐야 알게 되는 것에 대해 듣고 익혔기 때문일까. 그래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마치 숨처럼, 자연스럽게 내뱉는 말처럼 능숙하게 휘파람 언어를 구사하는 이시도로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희망을 전달해줄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넘기 힘든 산 같이 막막한 역경이래도, 누군가에겐 함께함으로써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걸 친히 보여주는 삶을 살아갈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좌절만 남는 상황 속에서 다행히 별 탈 없이 견뎌내고, 천천히 세상 속에 스며드는 삶의 방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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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작가의 첫 작품이자, 여러 권위 있는 상을 수여한 작품이다.

국내 문학과 다르게 외국 문학 작가들은 그 스펙트럼이 넓다 해야 할까,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 같다. 배우이자 감독, 그리고 작가로써 활약할 수 있다니. 감탄스럽고 신기하다. 그래서 인지 작품 속 여러 장면들이 마치 화면으로 보여주는 듯 생생하게 그려지기도 했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적정선을 지키며 조심히 진행돼갔다. 


이시도로가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아픔을 긍정하며, 이겨내가는 끝에 그토록 그리웠던 인연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앞으로의 삶도 잘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가진 특별함은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또다른 위안이 되었을 것만 같다. 1980년도 라체도니아 광장의 기적처럼. 또다른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을까, 하고 내심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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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트리스텔리체란다이시도로세상은 네가 좋아하는 놀이와 닮았단다놀이터에서 하는 그거 있잖니한 사람은 이쪽에또 한 사람은 반대쪽에 앉아서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는 시소 말이야. 72-73

 

아이들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알리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의 꿈은 바로 현실이 되지만 어른들의 현실은 꿈이 실현된 현실이 아니야……."

157-158

 

"아이는 이렇게 생기는 거야." 조금 후에 엄마가 말했다.

"뭐라고요어떻게요?"

"불가능한 것도 믿어야 한단다."

160

 

이해하기 위해서요이해하려면 몸으로 체험해봐야 해요머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바꾸어야 하죠뭔가를 이해하려면 몸의 일부를 바꿔봐야 해요당신을 변화시키면 알게 될 거예요당신의 일부를 잃고 새로 얻게 되면 이해하게 될 거예요잃고 나면 얻을 수 있어요.”

211-212

 

기억해라이시도로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흥얼댈 뿐이고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노래를 부른단다.”

263

 

“(우리 모두는 살아가는 법을 알지만 세상을 들려주는 법은 모르지이것은 최고의 예술이자 완전한 재창조란다세상을 작게 조각내서 먼지로 만들어 불어서 날려버리는 사람이 없으면 세상도 존재하지 않아재료를 노래나 휘파람가곡 또는 패러디소설낱말 놀이음악춤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은 그저 짝짓기태어남과 죽음배설과 섭취가 무작위로 무감각하게 반복되는 곳일 분이다. ()”

323

 

기독교인유대인이슬람교도들은 신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말하지창조하기 이전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이렇게 말해. ‘오페라리 엑스 니힐로.’ 그런데 난 그 반대로 말하고 싶구나무로 회귀하는 작업 무를 만드는 일이라고이것이 내 인생이었으면 한단다힘겹게 얻은 최고의 무내 임무이고 과제이자 일상을 건설하는 것이지.”

350

 

말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 내가 말을 할 줄 알았던 어린 시절과 연결되어 있다촌스럽고 무뚝뚝한 농부의 말이었고아빠의 공산주의자 연대의 파급력 있는 외침이거나 욕실에서 쓴 사랑의 편지의 감성적이고 사색적인 말이었다노첼라 아저씨의 재미있는 말르노 아저씨의 이국적이고 신비한 말아빠를 납치하려고 앴던 청년의 입에서 나오는 침울하고 껄끄러운 말아니면 엄마의 숨에서 느껴지는 귤과 누가 향의 맑고 부드러운 말이었다

364-365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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