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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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등에서 당신을 보았다, 

왜 당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환상의 빛




 

계절에 바뀔 때, 따스함이 조금씩 스며들 때 묘한 감정들이 그 모습을 달리 드러내곤 한다. 이를 테면 해질 무렵 저녁 즈음에 부는 바람이라든지, 푸른빛이 도는 밤하늘이라든지,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라든지. 딱히 그리워하는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그리워지고, 향수에 젖어드는 것이다. 이런 낯선 감정들. 너무 많이 무뎌져서 슬픈 날엔 이런 기분, 코끝에 맴도는 그리움의 향 같은 걸 다시금 느껴볼 수 있길 간절히 바라보곤 한다.


임시방편으로 찾는 게 바로 아름다운 이야기나 문장들인데, 그래도 뭔가 조금 아쉽긴 하다. 아마도 너무 큰 기대는 안한 것만 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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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은 어느 유명 펑론가들의 추천에 의해서 접하게 되었다. 물론 구매한지는 좀 되었는데, 읽지는 않았었다. 지적 허영심은 있으나 게으른 사람의 특징이다. 어찌 됐든, 우연히 도서관에 마주한 이 책을 집어들고 그 자리에서 간만에 집중력을 발휘하며 열독했다. 처음 단편이 참으로 좋았다.


표제작인 단편은 자살한 남편의 등과 바다 끝에서 마주한 빛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한 여자, 유미코가 등장한다. 그녀의 과거 어린 시절, 남편과의 첫 만남, 인연이 이어질 때까지. 그리고 결혼생활이 지속된 가운데 갑작스런 그를 잃게 됨으로써 변하게 되는 생활의 어느 부분, 새로이 시작된 인연과 관계 속에서, 멍하니 질문을 던지는 유미코가 계속해서 뒤돌아선 남편의 등을 찾게 되는 상황과 왈칵 쏟아진 울음과 새로운 가족들 사이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담백한 문장들이 유미코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듯 하다. 일본의 문학작품 중에서도 처음 접하게 되었던게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었는데, 그때의 느낌이 다시 떠올려지기도 했다. 상실과 공간과 외롭고 고독한 인물, 그리고 그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감정들이.


그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왜 그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지,

이 질문의 답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혼이 빠져나가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에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무심코 던진 질문에 유미코의 새 남편이 해준 답. 그리고 전남편의 잔상과 상실에서 비롯한 여러 감정들이 유미코의 시간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는 게 인상적이다.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건 인정하기 힘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난하지만 조촐하게. 제 삶의 형식에 맞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선택으로 떠나가버린다면, 당연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갑작스런 상실에 따른, 그에 대응해나가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이다.


이어진 다른 단편들도 가족이나 친구, 타인의 상실로 인해 남겨진 사람들의 어떻게 느끼고 살아가는지를 덤덤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래 전 이혼한 부부가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아들을 잃고, 홀로 남겨진 집에서 마당에 핀 밤 벚꽃으로 인해 엮인 다른 인연의 이야기 <밤 벚꽃>, 상성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인연에 과거 어느 특정한 사건을 비밀스럽게 간직한 친구의 죽음으로 떠올리게 된 이야기 <박쥐>, 어릴 적 두 번의 고비끝에 결국 떠나버린 친구와 낯선 침대 차에서 보게 된 어느 노인의 울음, 그로 인해 떠오른 이야기가 이어지는 <침대차>


모두가 무채색과 같은 이야기들인데, 그나마 가장 색채가 짙은 이야기는 역시 <환상의 빛>이다. 그래서 아쉽다는 것이다. 뭔가 더 여운이 깊은 소설이 나올 것 같은데, 그쳐버린 느낌이라서. 분명 이 작품은 덤덤하면서도 아련한, 그리고 생의 기운을 불어넣는 듯한 분위기를 가졌다. 하지만 묘하게 처음 접한 단편의 좋은 점이 갈수록 옅어져서 비슷한 이야기들의 나열로만 느껴졌기에...

 비슷하면서도 다른, 또다른 색채를 가진 작품으로 구성되었다면 더 좋았을 지도 모르지만. 



**



찾아보니 이를 각색한 영화가 있는 듯 하다. 그 작품 또한 많은 추천을 받은 것 같다. 이번엔 역으로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아봐야 겠다.


요는 그렇다. 표제작인 단편은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봄날 오후, 소소하게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며 읽기에 좋은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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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스, 기호학자를 만나다 - 논리와 추리의 기호학
움베르토 에코.토머스 A. 세벅 엮음, 김주환.한은경 옮김 / 이마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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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과 허구의 콜라보레이션, 기호학과 연역, 퍼스와 홈즈





『셜록 홈스, 기호학자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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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과 홈즈, 홈즈와 기호학. 대체 홈즈는 생소한 학문과 어떤 연관성이 있고, 어떤 내용들이 뒷받침되는 것일까. 홈스, 사소한 차이지만 조금 낯선 발음이다. 더불어 살짝 다른 길로 걸어가보는 것 같은 새로운 기분이 든다.


먼저, 들어본 것도 같은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던 기호학에 대해 간략해 알아보려 한다.


* 기호학이란? (요약해보면) 넓은 의미로 기호의 기능과 본성, 의미 작용과 표현, 의사 소통과 관련된 다양한 체계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라고 한다.


인간은 문자를 포함해 상징, 지표 등으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며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 여기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을 의미 작용이라 하고, 의미 작용과 기호를 통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행위를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며, 이 둘을 합하여 기호 작용이라고 한다. 즉, 기호학은 이 기호 작용에 관한 학문인 것이다.


책의 서문을 읽어보면, 이 책은 구체적으로 기획되어 구성되지 않았으나, 각각의 학자들이 연구하는 데 하나의 점점으로 모두가 모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우연히도 그건 기호학자 퍼스와 탐정 홈즈라는 접점이다. 


서문부터 줄기차게 등장하는 이름인 '퍼스' 그는 또 누구인가. 

지식백과를 검색해보았다. 


퍼스는 현대분석철학 및 기호논리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기호실재론이라는 독특한 형이상학을 가진 철학자였다. 그리고 그 핵심요지는 우리의 사고가 곧 기호라는 것이다. 또한 탐구를 '의심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가 사고를 기호라고 간주한 것은 우리의 탐구와 실천 자체도 우주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도입에서부터 굉장히 낯설고 전문적인 내용들이 등장한다. 단순히 '홈즈'에 관한 책이라 호기심에 들었다면 읽는 태도부터 달리해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목차에서 한 번 갸웃, 서문에 읽을 때쯤 확실한 판단이 설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했던 책이 아니구나, 하고 말이다.


연구와 강연, 논문과 저서. 언어학자, 기호학자, 심리학자등 학자들이 쓴 글을 묶어놓은 것이니 담긴 내용은 그득하게 전문적인 내용일 터인데, 다만 그 매개체가 된 게 바로 대중적인 탐정 캐릭터인 홈즈인 셈이다.


옮긴이가 친절하게도, 세세하게 풀어놓은 주석만 해도 한 파트를 장식할 분량이다. 호기심에, 그저 가벼이 재미로 읽기에는 중량감이 대단한 책인 것이고, 이 리뷰 또한 아직은 겉핥기식으로밖에 정리할 수 없다는 변명을 하기 위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댄 것이라는 것을 앞서 밝혀두려 한다. 


(재밌게 읽었던 부분을 중점으로 정리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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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컨대, 1장은 묶어진 글들을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듯한 뉘앙스의 글 같이 느껴진다. 그동안 쌓아온 독서력을 통한 높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나, 기호학 관련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어려운 내용들의 나열이었기에 붙잡고 있는 게 고역이였다. 고로 나와 같이 호기심에 이 책을 든 사람에게 추천하기로 2장 " 자네는 내 방법을 알고 있네" /토머니 A 세벅 ·진 우미커 세벅의 글을 먼저 읽으라 하겠다. 마치 퍼스가 홈즈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제목인데, 홈즈의 부분부분을 인용하여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꽤나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토록 많은 학자들이 애정하는 학자, 퍼스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인하여 자신의 확신을 다듬을 기회가 얻게 되는데, 바로 탐정놀이를 하게 된 도난 사건 덕분이다. 


뉴욕으로 가는 증기선에서 시계를 도난 당한 퍼스는 객실 내 사람들에게서 차례차례 얘기를 듣기 시작한다. 그리고 머릿 속에서 정리하여 범인을 지목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핑커턴 탐정 사무소장인 뱅스가 퍼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자신의 추리와 신념으로 가리킨 인물이 범인이 아니였다는 점이다. 대담하게도 범인의 집까지 찾아가 결국은 자신의 물건을 되찾아온 퍼스가 지목한 인물이 범인으로, 그의 추리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퍼스는 위와 같이 말하며, 그가 배에서 탐정처럼 추리를 하게 되었을 때, 최대한 수동적인 자세로 듣기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과연 누가 범인일까 추측하려다 보니, 문득 범인이 무언가 단서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무자아-의식적"인 방식으로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2장의 글쓴이들은 퍼스의 일화와 더불어 홈즈의 추리장면을 인용하여 설명하기를, 홈스가 추리를 잘하기 위해서는 세세한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또한, 홈즈가 추리를 잘하는 이유는 추측을 너무 잘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유인즉, 관찰을 한 뒤, 자신이 아는 내용을 토대로 추측을 하는데, 그 정확성이 꽤나 신빙성이 있기 때문이다. 홈스는 자신도 모르게 퍼스의 충고인 최선의 가설을 따르라는 것을 이행한 셈이다.  


퍼스의 주장에 따르면, 최선의 가설은 가장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며 가장 검증하기 쉬우면서 모든 가능한 사실들을 광범위하게 설명해주는 것이다.  


왓슨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추론을 펼치는 홈스의 일화에 더불어 전개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가추법은 법칙과 사례를 통해 결과에 도달하는 연역법, 사례와 결과를 통해  법칙을 도출해내는 귀납법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법칙과 결과를 통해 사례를, 즉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성은 떨어지지만 그만큼의 풍성함도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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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즈의 모델이 된 에든버러의 벨 박사>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그 사실. 바로 홈즈의 모델인 코난 도일의 스승 벨 박사는 환자를 진료할 때 대단한 분석과 직관력으로 병의 발병원인을 도출해냈다고 한다. 또한 개업의로서 도일 경은 의학 교육을 통해 이미 관찰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논리법과 그걸 쌓는 과정은 특히 흥미로운데, 재밌는 점은 홈스는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인물은 연구자들이 한 번쯤은 언급하고 넘어갈 만큼 자주 등장한다. 이렇게 보면 홈스는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실존인물 못지 않은 존재감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퍼스의 일화와 홈스의 추리과정을 같이 보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탐정으로서의 퍼스의 방법론과 기호학자로서의 홈즈의 방법론을 나란히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각기 다른 강의를 듣는 자세로, 다시 한번 차근차근 읽어나가야 겠다.

또 어떤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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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된 퍼스의 말 중 인상 깊은 표현이 있는 구절을 마지막으로, 

부족한 독서력으로 인한 허접한 리뷰를 이만 마치려 한다.




( 이 리뷰는 위즈덤하우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하나의 순수한 가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귀납법은 단지 (이미 만들어진 지식을) 보다 확실하고 세련되게 할 뿐이다. 그저 막연히 바라보는 단계를 넘어서서 약간의 지식이라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추법을 사용해야만 한다. / 42쪽

표면적인 의식 상태에서는 구분되지 않으며 실제적인 판단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임을 깨달았다. / 44쪽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 내는 것은 "통찰의 행위", 즉 "가추적 제안"인데 이는 "섬광처럼" 문득 나타난다. /45쪽

"과학의 추론의 첫 단계"이자 "새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논증 형태"인 가추법은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세계의 여러 측면들 사이의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지각하는 것에 의존한다. /45쪽

어떤 개인의 외모나 말하는 습관 등을 보고 단서를 모아서 정체에 관해 가설을 세우고 시험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추측이 필요하다. 바로 이 때문에 퍼스는 이런 과정을 가추법적 귀납법 또는 추리적 모델링이라고 불렀다. /75쪽

"하나의 논증으로서 우주는 분명히 위대한 예술작품이며 시이다. 마치 모든 참된 시가 훌륭한 논증이듯이, 훌륭한 논증 역시 하나의 시이며 교향약이다
…. 그 전체적인 영향력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일정 한도 내에서 전체의 한 부분이며 결과물로서 질적인 것을 식별할 수 있다. 이 질적인 것은 전제에 속하는 기본적인 질의 결합물로부터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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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의 모험 에오스 클래식 EOS Classic 11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승영조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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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폭발 추리콤비의 모험담 속으로





셜록 홈즈의 모험







지난 해는 그야말로 고난이었다. 발암의 해가 지나고 새해가 밝아오는 게 되레 반가울 정도였다. 물론 나이를 먹어가는 건 그래도 뭔가 서글프긴 하다.


그런데!

이를 달래줄 기쁜 소식에 두근두근, 설렘으로 새해를 맞이하다니 이런 일도 다 있을까 싶은데.


바로 영국 드라마 <셜록>의 크리스마스 스페셜판 격인 에피소드가 극장에서 상영되어 큰 스크린에서 셜록과 존을 볼 수 있게 된 것 때문!

시즌 하나 하나 완결될 때마다 인기가 날로 더해졌던 셜록은 이제 시즌4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도대체, 다음 시즌은 언제 방영될 것인지에 대한 인내심으로 일관하고 있던 찰나였으니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신년의 출발의 꽤나 좋았기에 예전에 선물받아 고이고이 아껴두었던 책 한 권을 꺼내보게 되었다.


현대문학 출판사의 에오스 클래식 시리즈로 발간된 셜록 홈즈 시리즈 중 모험담을 위주로 한 단편 12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아서 코난 도일경의 셜록 홈즈는 워낙 유명하고, 다양한 매체로 매번 재탄생되는 훌륭한 컨텐츠이자, 세계 각국에서 셜로키언들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는 단순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닌 살아 숨쉬는 실존인물과 같은 아우라를 지녔다고나 할까, 대단한 유명세를 오랫동안 누려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현상 같다.


즉, 그의 인기는 가히 무한대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내가 처음 셜록 홈즈를 접하게 된 배경에는 어떤 방송사의 독서권장 프로그램으로 인해 불었던 독서열풍 덕분이었다. 추천을 받아 일년에 백권 읽기를 실행하곤 했는데, 말 그대로 당시의 상황에 휩쓸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행했기에, 약간의 강박적인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당연히 독서의 큰 즐거움을 얻게 해준 책도 있는 반면, 몇 번이고 책장을 열었다 덮었다 반복하기를 수십 번, 앞장만 낡게 변색된 책도 있었다.


이중 단연 독서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 준 책은 셜록 홈즈 시리즈였다. 어린 나이에 어려운 단어는 이해하지도 못했고, 인물들의 대화 속 말투 또한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중간 중간 삽화와 내가 상상해본 이미지를 가지고 인물을 대조해보며 읽어나가며 그들의 모험에 대한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다양한 사건과 해결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보물같은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이전에 여러 동화책과 위인전기를 바탕으로 시작된 독서도 있었지만, 꾸준한 즐거움과 그 폭을 넓혀주었던 것은 단연 홈즈 시리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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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단편 모두 흥미진진한데, 이중 더 재미가 느껴졌던 편은 [보헤미아 왕실 스캔들], [보스콤벨리 사건],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푸른 석류석] 등등이 있다. 이렇게 꼽았지만 사실 전편 모두가 재밌게 읽기 좋은 단편들이라, 굳이 선택했다는 게 무색할 정도다.


다만 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근한 홈즈의 다양한 얼굴도 좋아하는 터라, 원작 다음으로 가장 애정하는 영드의 각색과 연관된 에피소드들이 눈이 더 들어왔을 뿐이다.


각색가들 또한 어지간한 셜로키언들을 능가하는 덕력을 지니고 있는 분들이라 그런지, 현대적으로 해석한 셜록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꾸 옆으로 새어 버렸지만, 셜록은 그저 좋은 것. 그야말로 진리 아닙니까...


열두 편의 단편들은 무료하거나, 지루한, 정신없이 바쁘고, 꿀 같은 휴식이 고플 때 읽을 거리가 필요할 때에 제 기능을 발휘하며, 훌륭한 텍스트가 되어준다. 


홈즈의 추리의 과학과 왓슨 박사의 서술과 사건 진행과정 등을 읽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가 버릴 테니 말이다.




[보헤미아 왕실 스캔들] 잠깐의 맛보기



홈즈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강렬한 감정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도 없었다. 그것은 예민한 악기에 모래가 들어가거나, 높은 배율의 렌즈에 금이 간 것보다 더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에게 딱 한 명의 여성이 있었으니, 그 여성이 바로 故 아이린 애들러다. 수상쩍고 미심쩍은 추억 속의 그 여성 말이다.  / 10쪽


"척 보고 추리하는 거지. 자네는 최근에 비를 흠뻑 맞았고, 일솜씨가 영 서툴고 경솔한 하녀를 두었군. 그런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아냈을 지 한번 맞춰봐." /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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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시리즈는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다. 난 황금가지 출판사를 통해 처음 셜록을 접하게 됐는데, 현재 읽고 있는 현대문학의 에오스 클래식 시리즈로 출간된 번역물도 나름 괜찮다. 모험에 이에 회고록, 사건집까지, 마지막까지 읽은 후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주홍색 연구> 부터 차근차근 읽어보려 한다. 


그밖에도 엄청난 두께와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주석달린 셜록홈즈>가 있고, 아서 코난 도일 재단에서 추천하는 작가가 쓰는 셜록 홈즈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오리지널 창작물도 있다. 뭐, 아이들이 보기 좋은 만화책은 물론 드라마 케이스북도 있다. 최근에는 컬러링 북까지 나왔다. 


자기 취향대로 골라 읽을 게 다양하니, 골라 읽고 보는 재미가 있다. 또한 에피소드 군데군데 사건명으로 언급된 케이스들은 언제고 재창조될 수도 있으니, 앞으로도 홈즈의 인기는 식을 날이 없겠다.




고로 셜록 홈즈 포에버!






(이미지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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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직톤의 초상 이승우 컬렉션 1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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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두 얼굴, 무수한 에리직톤들과 그를 위한 변명




『에리직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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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인간의 역사는 왜 폭력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



소설의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는 1980년대 초에 쓰인 1980년대 초의 이야기이고, 2부는 1980년대 말이 쓰인 1980년대 말의 이야기이다.


병욱은 신학대학 출신이나 목회자의 길을 걷지 않은 인물이다. 신문기자가 된 그는 교황저격사건과 관련한 취재로 인해 은사인 정교수를 찾아가게 된다.


폭력과 자유에 대한 주제로 시작된 강의에서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어떻게 하여 인간의 역사가 탄생되었는지, 폭력의 탄생과 변명에서 비롯한 항의 등,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관계성에서 세상을 이루는 배경요소들의 탄생비화를 들려준다. 


모든 것은 굴절하고 왜곡되며, 결국 폭력의 기원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모든 폭력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것이다. 완전한 에덴을 허문 것은 뱀이었고, 폭력 또한 뱀과 함께 들어온 것이며, 유전자를 통해 우리영혼 속에 보존되어 있다고 말한다. 


병욱이 사랑했던 연인인 혜령은 그가 목회자의 길을 걷지 않음을 알게 된 후, 이별을 고했다. 형석이라는 다른 남자와 유학을 떠난 혜령에게 미련이 남아있던 병욱에게, 정교수는 혜령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혜령과의 새로운 시작을 기대한 병욱과 달리 많이 지쳐보이는 모습을 한 혜령은 단호하게 지친 마음의 안식을 얻고자 신앙생활에 집중하려 한다. 아쉬움에 뒤돌아서 병욱에게 독일에 남은 형석이 편지를 보내온다.


중학교 시절 받은 기묘한 체벌 방식으로 인한 어떤 트라우마의 잔재가 남은 듯한 형석.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한 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했던 혜령과 겉보기에는 잘 맞는 상성같았지만, 어딘가 늘 불안해보이는 형석은 결국 홀로 남게 된다.


형석은 어린 시절의 허물어진 가정에서 받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하찮게 여겨지거나 부정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때문에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탈피하고자  추크슈피체 산을 오른다. 우연히 들린 사격장에서 키작은 서양인 델브루케를 만나게 된다.


병욱의 미련과 달리 혜령은 수녀가 된다. 새로이 접점을 찾지 못해 어긋난 인연은 이로써 종결되는 듯 했다. 


정교수의 설교에서 언급되는 에리직톤이란 인물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신성을 부정하고 여신 시어리어스가 아끼는 참나물 베어버렸기에 굶주림의 저주에 걸리게 된다. 먹을수록 허기가 지는 이 저주로 인해 재산도 탕진하고 하나 뿐인 딸까지 팔아버리는 등 분별력과 인간으로서의 도리마저 빼앗기게 되고, 종국에는 자신의 육신마저 뜯어먹음으로써 파멸에 이른다.



# 에리직톤을 위한 변명



혜령이 수녀원이 들어간 후, 교황 저격사건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병욱은 지금 만나고 있는 희수와 결혼을 생각해보지만, 자의에 의한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수동적이다. 희수의 압박에 못이겨 주례를 부탁한다는 핑계로 찾아간 정교수에서 다시금 혜령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신학대학 동기였던 태혁과 뜻밖에도 수녀원에서 재회하게 된 혜령은 자신의 삶, 그리고 그에 임하는 태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수직이 전제되지 않은, 모든 수평적인 것은 부정하고 수직의 절대성을 지원하는 예화로 인용됐던 에리직톤은, 태혁이 행하는 노동운동의 방법(폭력, 방화와 같은)에 대해 반대하며 말하는 혜령에 의해 다시금 인용된다.  


하지만 권력 앞에서 성역은 존재치 아니하게 되고, 박신부와 수녀들은 힘에 의해 끌려가야 했다. 태혁은 자해라는 표면적 이유로 입원하였으나, 고압적이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눈과 입마저 틀어 막혀 버린다. 젊은 한 사람의 존재가 지워져 버릴 수도 있는, 무서운 힘이 작용되는 시대인 것이고, 슬프고 아프다.


지금도 별반 다를 것은 없는 것 같다. 되레 다른 방식의 억압이 심화되고 있으니 말이다. 



혜령의 손에 겨우 남겨진 태혁의 노트에는 그는 말한다. 보통 가지고 있는 생각과 달리 신화는 객관적이지 않고, 세계상을 제시하는 모형도 아니면서. 신화는 탄생된 특정시대의 사고와 세계관과 언어로 이뤄지므로, 있는 그대로가 아닌 읽는 이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재해석하는 비신화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에리직톤은 정말 어떤 인물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신화 속 그대로 저속한 인물이었을지, 신성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한 구조를 개혁하고자 싸움을 벌인 의인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신에게 반기를 든 에리직톤의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났고, 신성모독의 죄를 가진 저속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반면, 파라오의 권력 앞에서 이집트 노예들을 구원하려 한 모세는 끝내 성공하였고, 그 과정에서 행한 살인은 정당화되기까지 했다. 에리직톤은 신화와 권력에 도전했지만, 실패함으로써 신화를 계속 유지하고 강화해준다. 반면 모세는 신화와 권력에 도전하여 성공함으로써 신화를 종결시킨다. 


이로 인해 신화에 기댄 권력은 사실상 붕괴되고 안정과 질서의 신화는 자유와 해방의 삶으로 대치된다. 모세에게 와서 비로소 에리직톤은 명예를 회복한다. 고로 모세는 비신화화한 에리직톤이다.


태혁은 에리직톤의 신화를 부수기 위한 더 많은 에리직톤이 필요하며, 그 순간 얻게 될 이름은 바로 모세라고 말한다. 즉, 해방자이자 구원자인 인물인 것이다.



# 구원과 폭력의 관계



형식과 개혁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억압으로 변한 굳은 형식과 삶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잘못된 개혁에 대한 경계이다. 형식은 개혁을 요청하고 개혁은 형식을 지향한다. 


소설 속 시대를 가리켜 병욱의 동료기자인 최는 한 사회심리학자를 인용하며 인간을 지배하는 두 가지 경향성에 대해 말한다. 바이오필리아는 생명을 사랑하는 정열이고, 네크로필리아는 생명을 파괴하는 정열이다. 생명을 사랑하고자 하는 정열이 성장을 멈추면 생명을 파괴하는정열이 증식한다는 것이다. 즉,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게 된 자아가 고립될 때, 유일한 대안은 생명 파괴로 나타나게 된다.


인간의 역사에서 폭력은 오래된 층에 속한다.


피에 대한 욕구가 신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시초에 산에 바쳐진 제물이 피였다는 사실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오래전, 사람들은 금방 죽인 양이나 비둘기의 피를 제단에 뿌렸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피의 상징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성례를 치른다고 한다. 


이처럼 피와 생명력은 맞닿아 있다. 형석은 자신의 살아있는 인간이며, 붉은 피가 가진 생명력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욕구를 실행한다. 단지 생에 대한 집착으로, 가축이 아니고, 굼벵이도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확인하고자 하는 모든 부분에서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온다. 내가 겪은 통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릿해온다. 



고독한 어린 시절, 버림받았던 형석은 올바른 양육과 애정을 느껴보지 못했다. 피의 생동감을 확인하고자 첫 자살시도를 한 나이가 아홉살이었다. 자신의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특별한 인연의 델브루케가 또다시 실패의 저격으로 붙잡혔을 때도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살고자 하는 열망이 강할수록 죽음의 흔적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형석은 이내 그 그림자에 잠식당하고 만다. 제일 아픈 손가락같은 인물 같다. 


지속된 관계가 드물었고,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병욱에게 자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친밀함과 적의가 한데 뒤섞인 모양새다.


사람은 어떤 위치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인간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살인자인 동시에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상대적인 속성을 지닌다. 세상과 종교에서 받지 못한 구원을 버림받은 아이들로부터 받는 혜령. 살아있음을 인정받고자 했던 형석, 권력이 행사하는 그릇된 형식과 개혁을 바로잡고자 했던 태혁, 표현을 하기 이전에 자기검열을 해야만 했던 병욱. 먼길을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원점으로 복귀한 것 같다. 다시 시작할 일만 남은 것 같다. 학생들의 지지에 의해 학장이 된 정교수는 어느새 권력의 위치에 서 있단 이유로 퇴진을 요구받는다. 위치와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종교와 신화의 관점에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무관심과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이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작용될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는 없다. 다만 보지 못한 부분을 슬쩍 엿보게 된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폭력의 근원, 인간의 역사, 구원 등. 


고로, 슬픔으로 점철된 생이 조금은 줄어들었으면...하고 바라본다.




( 이 리뷰는 위즈덤하우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우리 영혼의 습지 한쪽에 독성의 혀를 날름거리는 뱀을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것이다. / 23쪽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아니면, 보아야 할 것만 본다. / 88쪽

지나친 빛 또한 어둠만큼 끔찍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빛 또한 소리와 같아서 수용할 수 있는 밝기에 제한 있는 것일까. 어떤 식으로 그 밝음을 표현하든, 우리가 느끼고 수용할 수 있는 밝음에는 한계가 있는 것일까. / 151쪽

뉴스는 뉴스를 덮는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뉴스가 만들어진다는 것. 새로운 뉴스들이 다투어 교황과 아그자를 잊게 했다. / 165쪽

모든 신화는 권력으로부터 나온다. 권력만이 신화를 생산할 자격을 가진다. 권력 구조의 신성화. 그것이 신화의 참된 기능이다. / 243쪽

구원은 이처럼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희생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폭력이다. 그리고 그 둘은 한 몸이다. / 269쪽

인간은 근본에 있어서 미친놈이며 범죄자이며 동시에 순교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개인의 특별한 정서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내면이야말로 개인에게 고유한 영역이다. 모든 일이 그곳으로부터 비롯한다.
/ 279쪽


개개인의 고유한 정열에 대해 그것의 합당함과 부당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든 정열은 하나다. 오직 삶에 대한 열정만 있을 뿐이다. (…) 우리는 개인에게 자신의 고유한 삶에 대응하는 그만의 정열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권을 인정해야 한다.
/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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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 - 짜릿한 자유를 찾아 떠난 여성 저널리스트의 한 달에 한 도시 살기 프로젝트!
마이케 빈네무트 지음, 배명자 옮김 / 북라이프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자유를 향한 열망, 결국은 나를 여행한 것임을,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








프리랜서 기자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마이케 빈네무트. 183cm의 장신의 50대 싱글 여성이다. 어느날 그녀는 유명 퀴즈 쇼 <누가 백만장자가 될 것인가?>에 도전하여 상금 50만 유로를 받는 큰 행운을 누리게 된다. 인터뷰에서 말했던 그대로, 1년에 한 달씩, 12개 도시를 여행할 것이라는 목표를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22kg의 커리어 하나와 노트북, 그리고 가벼운 옷차림


그녀가 지구를 돌고 돌아 자신의 거처인 함부르크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긴 이 에세이는 가벼운 듯, 묵직한 무언가가 담겨 있다.


여행에 관해 별 관심이 없었기에, 그와 관련된 서적을 잘 찾아보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도시를 방문해 현지인처럼 생활하며 여행하는 방식은, 만약을 가정하여 내가 꿈꾸던 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떤 걸 얻고, 어떤 것들이 남았을까?




**




그녀의 글들은 모두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대상은 친구나 가족이 되기도 하고,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또는 과거의 자신이나 전 남친이 되기도 한다. 받는 대상이 따로 있지만, 읽다 보면 친근한 말투 속에 녹여진 에피소드나 자신이 느낀 점들을 모두 솔직하게 풀어져 있어 저자와의 거리감이 가깝게 느껴지게 한다.

 

어쨌든 남들이 쉽게 누리지 못한 행운을 얻은 것에 대해 알차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만약 내가 상금을 타게 된다면 어떠할까. 도전의 시작 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했던 목표를 그대로 실천할까, 아님 지금 당장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용도로만 쓰여질까. 


물론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가 가장 크게 깨달은 것들 중 하나는 꼭 이렇게 자금이 없어도 여행은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 작용된 건 떠날 수 있는 '용기' 라는 것.


(글쎄요)



무계획, 무약속, 무타협의 여행



사람마다 여행하는 방식이 각자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대학시절 친한 친구들과 2박3일로 국내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물론 꼼꼼하게 계획을 세운 친구가 있어 좋은 점도 많았지만, 의견조율이 잘 되질 않아, 자꾸만 엇갈렸었다. 시간대비 가장 효율적으로 여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대한 그 도시에 사는 사람처럼 생활하듯이 여행하는 걸 즐기는 사람도 있다. 난 후자 쪽에 속하기에 빡빡하게 세워진 계획으로 진행되는 여행에는 거부감을 느꼈고 그 후론 '여행'이란 것을 가본 적이 없다



그녀는 계획이 없었다고 하지만, 적어도 어디를 가고 어디를 안 갈건지는 분명히 정해뒀기에, 큰 틀은 있되, 세부계획만이 부재했다고 생각된다. 여행지로 자주 선택되는 도시들이 그 틀에는 제외되어 있어 의문이 들었다고는 하나, 결국은 여행자의 마음대로다. 자기가 가고 싶은 도시를 방문하는 게 가장 최선일 것 같다. 많이들 방문한다고 해서 꼭 자신에게도 잘 맞는 곳이라고 말할 순 없을테니 말이다.


그녀는 우연에 몸을 맡기어 친구의 친구, 타지에서 새로이 사귄 친구가 소개해준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만들고, 우연의 허락을 받아 점차 커진 눈덩어리처럼 널리널리 관계를 불려나간다.


또한 저널리스트기라는 직업의 속성상 어떤 한 장소에 구애받지 않기에, 여행 속에서 생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게 가능했다. 아파트형 게스트 하우스에 묶고 제2의 도피 장소를 정해, 매일같이 방문하여 현지인처럼 생활했다.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고 그 인연들의 또 다른 인연을 얻기도 했다.


그녀는 여행준비의 일면으로 여행블로그를 개설했는데, 앞으로 쌓일 추억들을 기록해두고, 소통하는 방식으로 그때 그때의 호기심을 해결하기도, 또다른 즐거움을 얻기도 했다.


그녀는 독특하게도 일을 벌이는데, 여행하는 틈틈이 색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약간은 개인적인 성향이 담긴 실험들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쥐트도이체 차이퉁>과 같이 독자에게 주문을 받아,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도시에서 무언가를 부탁하면 자신이 대신해주는 것이다. 주문은 사소한 것부터 허무맹랑한 것까지 천차만별이다. 현지 물건을 구입하는 것부터 동창을 대신 만나보는 것을 포함하여, 요구사항은 참으로 다양했다. 

어찌보면 미친 짓 같기도 한데, 이런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것을 보면 활력이 넘치는 사람 같다. 걷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과 만나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는 듯 하다(술 얘기가 빠지질 않는 걸 보니, 사람자체를 좋아하는 인물같다).


각 도시별로 배움은 분명히 존재했기에, 대략 열 가지로 추려 정리하는 식으로 마무리한다.



좋아하게 될 일 말고 지금 당장 좋아하는 일 하기.



그녀는 가보고 싶은 곳을 방문하기도 하지만, 배움에도 열성적이다. 우쿨렐레를 배우기도 하고, 스페인어와 탱고를 배워본다. 많은 배움을 통해 그녀가 다다른 결론은 좋아하게 될 일이 아닌 당장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특히 탱고를 배우면서 더욱 확실히 깨달은 듯 하다. 


세상엔 하고픈 일도 많지만 해야 할 일도 참 많다. 사실 해야 할 일의 목록을 해치우는 게 그리 즐겁지 만은 않다. 막상 닥쳐보면 꼭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 아닐 때도 있다. 


단지 실행에 옮길 용기가 부족했을 뿐. 

허니 내가 사랑하는 게 뭔지 찾아내서 그것을 하면서 최대한 매순간을 누려보라고 한다. 


사실 마음 내키는 대로 살기가 그저 쉬운 시대는 아닌 것 같다. 사회에 따라 그 분위기도 달라지는 것일까. 그녀가 반복해서 말하는 내려놓기, 버리기, 눈치 안보고 살기, 하고 싶은 대로 살기, 아무 것도 안 하기 등등. 실행해 보고픈 매력적인 것들은 참으로 많은데 왜 이렇게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다행스러운 한 가진,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대답을 바꿔도 된다는 것이다. 사이의 틈이 존재하니까. 질문을 던지는 힘으로, 질문을 사랑하는 힘으로 살아가보자.



순간을 사랑하기



도시와 사람 간에도 상극이 있다. 긍정적인 성향에 뭐든 잘 흡수하는 듯 보이는 그녀에게도 상극인 도시가 있었는데, 인도 뭄바이가 그러했다. 빈부격차와 만원버스, 오염된 공기와 단절된 환경.


도시와 대화를 나누듯 여행을 해왔는데, 상극인 도시를 만나고 좌절하게 되고 친구 네트워크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만나는 사람도 없게 되었고, 기껏 세웠던 여행이 다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좌절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인도 뭄바이에서 인내심이라는 걸 기르게 된다. 맞지 않음, 견디기 힘듦. 그걸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었기에 그녀의 마음이 더 진심으로 다가왔다.


역사적으로 맞닿아 있는, 이스라엘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프고 또 아픈 공간. 엄숙한 분위기의 속죄일. 도시 곳곳이 멈춰서 고요한 적막이 감도는, 속죄하는 날. 

겸손하였고, 지난 역사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얘기하였다.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내전, 참혹한 현장. 위험이 도사리는 공간. 그녀는 이 곳을 '삶이 다시 시작되는 곳'이라 말한다.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겸손을 배워간다.

 


 

자유를 향한 열망



여유로움과 설렘으로 시작해서, 색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고, 상극인 도시에서 인내심을 길러야 했다. 또한, 한없이 머무르고픈 곳에서 떠나는 게 아쉽기도 했으며, 생활하고픈 곳을 찾기도 했다. 


그녀는 자유를 향한 열망으로 도전하였고, 변하였다.


현실, 자신의 거처였던 함부르크에 돌아와서도 그녀는 여전히 짐을 풀지 못했고, 여행자의 시각을 버리지 못했다. 이미 자신의 내면이 조금 다른 시선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당연할 것 같다. 여러 도시에서, 여러 사람들과 여러 방식으로 마주하고 그 순간을 나누었다. 되새겨볼 것들과 앞으로 맞이할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여운을 다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육체의 피로감과 안도가 이런 변화의 시작을 원래대로 돌이킬 수는 없을 것 같다.


현실로 돌아와선 되레 낯선 감각이 주는 안도감에 기뻐한다. 낯설게 하기. 여행자처럼 우연에 몸을 맡기고서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묻히지 말고, 새로이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실행하는 것.


가벼운 마음과 기쁨으로 행한 일에는 반드시 보상을 받는 것처럼. 자유의 피를 느낀다. 1년 이라는 시간의 다른 형태의 공백과 변화를 감지한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금 떠날 채비를 한다. 1년 간 12도시를 여행했던 것은,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나를 알아가기 위한 '진짜' 여행길의 시작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사람은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다른 것을 보고 배우고 느낀다. 각자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다른 방식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싶기도 하다. 경험하고 느낀 것의 제한을, 그 선을 넘어서고 싶은 것이다.


열 두 도시를 여행한 마이케 빈네무트도 그랬다. 그녀는 각 도시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각자 다른 인격의 자신을 보았다고 했다. 스스로도 말투와 분위기의 묘한 변화를 느꼈다. 생활하면서 그곳의 얼굴로 닮아가는 것이다.


답답한 현실을 자조하는 내게, 어떤 사람은 늘 같은 조언을 해주었다. 그것 역시 여행이었다. 여행을 떠나보면, 완전히 낯선 곳에서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하지만 사실 난 여행에 딱히 생각이 없어서 이런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렸다. 


하지만 요즘엔 가끔씩 그런 생각도 든다.

 

한 번쯤은 떠나봐도 좋지 않을까. 너무 한 곳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지금이 지긋지긋하니까. 그냥 도피하는 식이 아닌, 조금은 즐기고픈 마음으로 떠나고 싶다. 또 만약을 가정해서.

 

 

진짜 자유라는 것이 존재할까.

아직 어디로든 떠나보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단정하고 싶진 않다.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책을 읽는 내내 부러움 반 설렘 반이었지만. 그렇게 배아픈 현실이지만.


차라리 떠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자꾸 여건을 따지게 된다.

그저 떠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설렘을 기대할 때, 다시 펼쳐보려 한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곳과 사랑하는 것을. 

숨어 있는 나의 다른 얼굴을 찾아서.



(이 리뷰는 북라이프 북트레일러 스크랩 이벤트에 선정되어 작성되었습니다.)






8. 기대에 부응하느라 삶을 허비해선 안 된다. 남의 기대든 자신의 기대든.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꼭 해야 하는 일이 별로 없다.
(p 153 / 호놀룰루에서 배운 열 가지 中)

인류학에는 ‘리미널리티‘라는 개념이 있다. 두 발달 단계 사이에 낀 상태로 ‘더는 아닌‘과 ‘아직 아닌‘ 사이의 단계를 말한다. 나는 지금 정확히 리미널 단계에 있다. 더는 떠나지 않고 아직은 여기 있는 상태.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리미널리티 단계에 있는 사람은 주로 목표 상태에 벌써 도달한 것처럼 흉내를 낸다고 한다.
(p 356 / 함부르크, 독일)

내 삶의 최대 장점은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올해 무엇을 할지 나는 모른다. 또한 알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살아보면 이미 내 안에 있었던 걸 그저 끄집어냈을 뿐이다. 나는 세계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여행한 것이다.
(p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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