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소설집엔 그동안 뿔뿔이 흩어져 있던 단편들을 한데 모였다. 창작 배경도 각기 다르고 숨겨진 사정들도 다르다. 여러 색채를 지닌 이야기들이 살아 숨 쉬는 듯한 인물들의 개성과 더불어 생동감이 넘친다.
작가 후기에서 엄살을 부리며 작가의 생명이라든지 엉뚱하게도 통계학적으로 살펴볼 때, 자신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무려 16년이나 남았다. 게다가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에 한에서 얻은 통계치이다.
이 엉뚱하고 익살 맞은 작가에게 솔직히 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전에 몇 번 접해본 소설 두어 권이 전부다. 안타깝게도 나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맞지 않으면 잘 찾지 않게 된다. 그야말로 무관심. 그래서 한쪽으로만 치중된 독서를 이어 왔는데, 이번에는 꼭 열심히 읽겠다는 사명감으로, 이 습관을 고치기 위해 열독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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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장이다> / 2007.12
이 소설은 다음에 이어질 단편과 맞닿아 있는 소설이다. 원래는 한 권의 책으로 묶을 기획에서 비롯되었으나, 결국 별개의 작품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나타이 가즈히로, 38세의 준대기업인 광고기획사의 프로듀서로 활약한 지 10년 차, 아무리 큰 수익을 내도 처우는 한결같은 회사의 태도에 실망한 가즈히로는 독립하여 창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 소설이 실린 시기는 2007년이지만,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창업이란 게 쉬운 게 아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가 홀로 덩그러니 떨어져 시작해야 하고, 책임감과 부담감은 배가 된다. 거기에 쉽게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 입장이기에 고독까지 더하게 된다.)
가즈히로는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올곧고 정직한 편이다. 그만큼 고집도 자존심도 센 인물이다. 그냥 무작정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된 계획도 세워 놨으나, 도중에 모두 어그러지고 만다. 능력 있는 직속 후배인 오가와를 스카웃 하려다 직속 상사인 하라다 부장에게 들통나 큰 방해를 받게 되기 때문.
하라다는 유능한 부하 직원들에 의존하는 소심한 상사였으나, 자신의 체면을 구기게 한 가즈히로에게 앙심을 품고서 그가 퇴사 전에 제출한 기획서로 일을 진행시킨 것. 안타깝게도 퇴사 결심 후, 그걸 모두 오가와에게 모두 털어놓은 게 큰 실수였던 것이다.
가즈히로는 사무직으로 들어온 아내의 사촌인 유카와 스카웃 해달라 청한 젊은 영업 직원인 오카자키와 함께 열심히 위기 극복에 나선다. 여유는 없었지만, 다행히 문을 닫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영업을 뛰고 또 뛴다.
전에는 그냥 넘겼을 법한 것도 사장의 위치가 되자 직원의 생계 뿐 아니라 협력 업체와의 신뢰를 위해서라도 굽히고 들어가는 태도로 변화를 이루게 된다. 마지막 창업 멤버로 원래 오가와와 함께 스카웃 제의를 했던 자유분방한 성격의 계약 직원 모치즈키까지 합류하며, 본격 '나카이 에이전시'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궁금증을 유발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야기의 구성도 탄탄했고, 무엇보다 조사는 하되 취재는 잘 하지 않는다는 오쿠다 히데오는 역시 타고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물을 잘 그려낸다. 가즈히로의 아내 구미코의 성정, 그의 자녀들까지. 한 권의 책으로 묶으려 했던 기획만큼 이야기와 인물들이 잘 그려진다. 업계 상황도 리얼하게 전개되어 더욱 신뢰가 간다.
이로 인해 오쿠다 히데오에 대한 불호가 호로 점차 변화를 맞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첫 신호탄이 매우 좋았다.
<매번 고맙습니다> / 2008. 8
앞 단편과 이어지는 나카이 에이전시의 이야기.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나눠 교차되며 진행된다. 그의 큰 딸인 초등학생 유키의 사회 숙제의 인터뷰를 하는 것과 나름 사업 기반을 잘 다질 수 있는 초석이 되어 줄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 속 갈등을 보여주는 이야기.
그동안의 영업 결과 미나토 부동산에서 아오야마 건물 1층 운영을 맡게 되고, 이를 일정 기간 대여해주는 기간 한정 안테나숍으로 활용할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테리어 회사인 '가네코 플래닝' 대표 가네코와 연이어 부딪히게 된다.
오사카 사람인 가네코 대표는 회사 규모는 작지만 나름 성공의 궤도에 오른 사람이며, 인맥이나 처세술이 대단하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신출내기 가즈히로는 그와 상성이 잘 맞지 않는다. 예산을 부풀려 잇속을 챙기는 것도 모자라, 와하하하 웃으며 넉살로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게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원 생활과 다르게 예산 측정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른 상황에서 그는 올곧게도 필요한 만큼만의 합리적인 추정을 하고, 협력 업자들에게도 회사를 다닐 때만큼 후하게 쳐준다. 가네코의 뻔뻔스러운 처사에 분개하는 가즈히로도 시간이 지날수록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아끼기 위해 무조건 깎고 보게 된다.
이런 사업이 진행 중에 딸 유키의 인터뷰는 적재적소의 유머 포인트가 되어준다. 그날의 상황과 어찌나 적절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지 허세로 일관하던 답변이 당혹스럽게 바뀌는 게 우습다. 고로 나카이 에이전시의 다른 이야기도 너무 궁금해진다.
작가님, 더 써주시면 안 될까요?
<드라이브 인 서머> / 2006
신인시절 썼던 단편이라고 하는데, 진짜 환장할 스토리다. 서른 중후반이 되어 뒤늦게 소개로 결혼한 노리오와 히로코는 일본의 명절인 오본에 히로코의 친정에 가게 된다. 노리오는 운전면허가 없기에 운전석에는 히로코가 앉아 있다. 능력도 있고 미인인데다 육감적인 바디까지 가졌다고 묘사되어 있는 인물.
교통 체증이 이어지는 가운데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는 청년 사이토를 흔쾌히 태워주는 히로코 때문에 노리오의 수난기가 시작된다. 그 뒤로도 차 안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들이 추가로 탑승하기 때문이다.
휴게소에서는 하와이로 여행을 떠난 자식 내외 때문에 홀로 관광을 하는 노인, 미야자키
도로 위에서는 추돌 사고를 일으킨 뒤차가 에어컨이 고장 났다며 태우게 된 아이들,
손에 식칼을 들고 자신을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한 남성까지.
정말이지 골 때리는 이야기이다. 이런 걸 총체적난국이라 하는 것인가.
나아질 것 없이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정말 상식은 쥐톨 만큼도 없는 사이토가 히로코의 가슴을 만지며, 노리오의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된다. 식칼까지 빼앗아 휘두르다 마지막까지 진상 짓 하는 사이토를 쫒아 내리던 노리오가 범인으로 오인돼 체포되기에 이른다.
실감 넘쳐 짜증 유발한 이야기, 그러나 지금은 히치하이킹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크로아티아 VS 일본> / 2006. 8. 12
쇼트 쇼트 스토리라고 하는데, 이건 그냥 그랬다. 실제로 열린 이 축구 경기를 바탕으로, 경기를 보는 크로아티아 사람의 입장에서 쓴 글인데,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냥 작가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다만, 그 사이에서도 묘하게 풍자적인 요소가 보이는 게 있어 그 부분만 흥미로웠다. 그 외엔 조금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정말 짧은 이야기.
<더부살이 가능> / 2012. 3
아타미 역 앞에 위치한 식당 미쿠리야. 고전적인 외관과 온천 부근이라는 좋은 입지 덕에 번창하고 있으나, 맛과 서비스가 그저 그런 곳이다. 우에무라 에이코는 폭력 남편과 빚을 피해 두 살 배기 아들과 함께 이곳으로 도망오게 된다. 아직 스물 여섯이라는 젊은 나이기에 대우를 보고 고를 수 있었던 그녀는 직원 아파트를 따로 구해주겠다는 미쿠리야에서 일을 하기로 한다. 홀 서빙만 한 지 1 년째, 여전히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에이코.
미쿠리야에는 종업원 중 우두머리 격인 60대 도시코가 있다. 이 역시 상식도 뭣도 없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자신에게 걸린 한 사람만 계속 혼내는 것이다. 최근 표적이 된 스즈키 교코는 얌전하고 미인이지만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직원이다. 또래이기에 친해지려 노력을 해보는 에이코지만, 뜻대로 잘 되진 않고, 퇴근길 도시락을 사 들고 가는 그녀를 관찰하기만 한다. 외로움에 주말에 같이 외출하기를 권하게 된 에이코는 쿄코의 집에서 동거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형사들이 찾아와 움진리교 특별수배범을 숨겨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때문에 직원 전체가 사정 정취를 받게 되자, 다시금 도주를 생각하는 에이코. 사기와 공갈 전과가 있는 부모 때문에 눈치 보며 자란 자신의 신세를 탓하다, 식당의 돈을 훔쳐 달아날 생각이 이어지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하는 씁쓸한 바람을 남기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비릿하게 씁쓸한 뒷맛을 가진 이야기. 움진리교 사건이 화제가 되자 이에 영감을 받고 썼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다른 곳에 더 치중된 이야기 같기도.
<세븐틴> /2009
유미코는 딸 아키나가 크리스마스 이브 날 친구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통보를 해오자, 첫 경험의 디데이임을 눈치 챈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유미코의 고뇌가 이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남편에게 외식을 하자고 말해보았으나, 회사 일로 거절 당하고, 대학 시절 친구를 만나 고민을 토로해보았으나, 막을 수 없으니 피임이나 잘하게 하라는 이야기만 듣게 된다.
문득 지난 시절을 회상하게 되는 유미코는 처음으로 동경했던 남자아이, 첫 고백, 첫 키스와 첫 데이트 등 수줍은 마음으로 처음 해 보았던 추억들을 꺼내 본다. 졸업 앨범 속 앳된 얼굴들을 보며.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지금. 성숙해진 여인의 얼굴을 한 딸이 먼저 주도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짐작으로, 상대아이의 사진까지 찾아보게 된다.
이내 마음 속 어느 곳에서는 딸을 막으려고 했던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아키나의 친구 아이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고 이를 능숙한 거짓말로 넘겼을 때 비로소.
이브 날, 문을 나서는 딸이 뒷모습을 보며 유미코는 마음 속으로 조용히 읊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