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가 남편과 사별하고 장사를 독하게 하는 여자를 소개해줘 아버지는
서울로 새장가를 들었는데 헐벗은 산 중턱에 지어진 천막촌에는 수돗물이 들어오지 않아
우물에서 물을 실어와야했다. 새엄마는 장사를 하러 새벽부터 나가기에 명숙이는
집안일도 하고 진주도 돌봐야만 했다. 진주를 업고 기저귀를 빨려고 우물로 향하다
펌프가 있는 집에 들어가 기저귀를 빨다 할머니에게 물 도둑질을 한다고
싸리나무 빗자루로 맞는 명숙이를 보니 얼마나 각박한 살림살이였는지,
명숙이 주변에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어줄 어른의 부재가 참 안타까웠다.
새 엄마는 진주를 잘 본다고, 윤기 나게 장판을 닦았다고, 밥을 태우지 않고 잘했다고 칭찬해주지 않았다.
친자식이 아니여서 사랑을 해주지 않는 걸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진짜진짜 열심히 집안일을 하면 엄마들이 준다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던 명숙이가 새엄마에게 물도둑질했다는 말이 전해질까 두려워하는 명숙이의
모습이 애잔했다. 엄마처럼 쑥버무리도 해 주고, 곁에서 엄마 품에 있는 것처럼 잠들게 해주던 언니가
공장 기숙사로 돈 벌러 간 것이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언니가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날아와줬으면 좋겠다고 큰 소리로 울음을 토해내는 명숙이와
그런 명숙이를 두고 공장 기숙사에서 고생하고 있을 언니의 처지를 생각하니
두 자매에게 언제 봄날이 올까 싶었다.
고향을 떠난 것도, 언니가 공장에 간 것도, 엄마가 진주를 낳자마자 장사를 나가야 하는 것도
모두 밥 때문이니까 들고양이들이 먹는다는 괭이밥이 고양이 밥도 되고
우리 밥도 됐으면 좋겠다는 명숙이의 소박한 소망에 가슴이 아렸다.
진주를 돌보느라 학교에 제대로 가지도 못하지만
진주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듯 진주를 살뜰히 보살피는 명숙이가 정말 기특했다.
이쁜 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밀려들자, 꽃잎들이 자신을 자꾸 따라오는 것이
자신에게는 어디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있어서 부러워서 그런거라며,
들판 너머 뭐가 있는지 궁금해도 다리가 없어 답답한 꽃보다 움질일 수 있는
자신이 굉장한 것 같다고 긍정의 힘을 끌어내는 걸 보니 명숙이는
고단한 삶을 탈피해낼 아이임이 분명했다.
한자 이름의 뜻을 알아오라는 선생님의 숙제에 아버지는 제대로 응답해주지도 않고
새엄마까지 진주만 남긴 채 돌아가시게 되자 아버지는 술만 퍼마셔 술병이 나
진주를 혼자 둘 수 없어 학교엔 가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난지라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퇴학이라고
아버지께 꼭 학교를 보내라고 다짐도 받고, 육성회비도 선생님이 냈으니 걱정말고
학교에 오라고 했다. 남씨네 할아버지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밝을 명 明, 맑을 숙 淑
이란 뜻임을 알게 된 명숙이는 어둠을 내쫓는 빛과, 산속 깊고 맑은 우물처럼
이름답게 살아가리라 굳게 약속하고 학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선생님과 한 약속을 깨버리고는 진주를 돌보라며 학교에 가질 말란다.
어차피 못 갈 학교는 당장 관두고 진주나 보라는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된 명숙인
"아버지 자식이니까 아버지를 보라고, 난 학교에 갈거라고!"라며 울분을 토해냈다.
부모님과 함께 달리기 쪽지를 펼치면 애들 부모님이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오지만,
명숙이 아버지는 애타게 불러도 멀뚱멀뚱 쳐다만 보는 사람이었다.
종종거리는 명숙이가 애처러워 보다 못한 선생님이 뛰어나와 명숙이의 손을 잡고
달려줬을 때도 어째서 저런 사내가 내 아버지인지 명숙이가 풀기엔 너무나 어려운 숙제였다.
진주는 아버지 자식이고, 자기에게는 엄마가 다른 반쪽짜리 동생인데
왜 자기가 학교도 못 가고 돌봐야 하냐며 소리 소리 지르고서는
진주의 허리에 천 기저귀를 두르고 안방 뭄고리에 꽁꽁 묶어놓고
퇴학 당하지 않으려고 학교로 내달리다 교문을 앞에 두고
혼자 있을 진주가 눈에 밟혀 다시 집으로 향하는 명숙이의 모습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이 진주의 엄마는 아니지만, 언니가 명숙이에게 엄마의 역할을 했듯이
명숙이 또한 진주에게 그러할 것이다. 지금은 학교를 못 가도 언제가는 갈 것이라며,
오늘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날의 시작이 내일부터 이듯이,
진주를 데리고 나의 교실로 가서언덕에 있는 학교로 돌아올 때까지
국어 숙제도 하고 한자도 외우자고 다짐하는 어른스러운 명숙이의 모습에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희망의 끝을 놓치 않았던 세대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시대극을 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