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 된 후, 지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실천의 일환으로
대중교통 이용하기를 결심하고, 20여 년을 뚜벅이로 생활하고 있다.
불편하지 않냐는 시선들이 있지만, 기동력을 요하는 직업군이 아니라
크게 불편한 것도 없고 오히려 출퇴근 시간 동안 편하게 독서를 할 수 있어 좋다.
다만 비가 오는 날 옷이 홀딱 젖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라 근래에 맘이 살짝 흔들렸는데
이 책을 읽으며 각성하게 되었다. 초심을 잃지 말고, 내가 지구에 해줄 수 있는 작은 실천,
뚜벅이 생활을 고수해야겠다. 뚜벅이 생활을 해도 하루 만보도 걷지 못할 때가 많은
운동 부족인 내게 최소한의 운동량 확보, 1시간 이상의 독서시간 확보, 지구 사랑의 실천은
여러모로 남는 장사이다.
주로 숲에서 사는 곰과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는 사자가
자연 상태에서 만나서 싸울 확률은 극히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곰과 사자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라는 저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
사자는 밀림의 왕이고 곰은 덩치만 큰 미련 곰탱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곰에 대한 오해를 반드시 풀어야 할 것이다.
곰은 우사인 볼트보다도 빠르다. 100m를 7초 대에 주파하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원숭이처럼 날아다니는 날렵하고 강인한 존재라서
세계 곳곳마다 곰 신화가 산재해 있다. 옛사람들은 곰의 강인함에 경외감을 느꼈다.
스위스의 베른, 독일의 베를린,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 영국 아서왕의 이름 모두 곰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곰이 사람이 되거나 곰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영웅이 된다는 신화나 곰 숭배 사상들이
기독교 전파에 방해가 되었다.
곰이 동면으로 사라지면 숲에 겨울이란 죽음이 찾아오고,
곰이 돌아오면 봄에 만물이 소생한다는 민간신앙은
예수가 아닌 곰을 부활의 상징처럼 만들어서 중세 교회가 곰을 척결해야 할 이교도 또는 미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대대적인 곰 학살이 진행되었고, 곰을 음탕하고 게으르고 더러운 존재로 홍보하고,
사자를 동물의 왕좌에 앉힌 것이라고 하니 놀라웠다.
교회가 앞장서 자행한 곰 학살로 인해 서유럽의 곰이 말살되었고,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와 개발로 인해 다른 대륙의 곰들의 개체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곰은 기후변화를 막는 최후의 전사로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생명체이다.
곰을 보호한다는 것은 곰이 사는 숲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인데,
숲은 엄청난 탄소와 물을 저장하고 이산화 탄소를 걸러주는 마지막 보루다.
곰이 먹이를 구하려고 숲을 돌아다니며 나뭇가지를 밟고 헤치며 부러뜨려
숲 깊은 곳까지 햇빛이 들어가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배변 활동을 해서 식생지가 더 넓어진다.
다양한 식물들이 잘 자라면 동물들 번성하고 다양한 종의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곰은 우산종(umbrella species)로 불린다.
미련 곰탱이가 아니라 숲의 다양성을 도와주는 백수의 제왕 자리의 왕관을 다시 찾아
숲에서 평화롭게 잘 살아가는 날이 도래하길 바란다.
세계 자연기금의 생태 발자국 프로젝트에 따르면 현 인류는 지구 1.6개가 재생할 수 있는 분량의
자연 자원과 생태 서비스를 소비하고 있고,
만일 인류가 오늘날의 한국인처럼 살아간다면 3.3개 분량의 지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함께 공존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나와 다르니 열등하다고 미개하다고 착각해
다른 생명을 없애버리는 그 오만함과 무지함에 너무나 부끄러웠다.
저자가 툰드라의 법칙으로 "일방적인 희생은 없다. 받으면 받은 만큼 돌려준다."
라고 했는데 툰드라의 법칙이 시베리아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규칙이라는
의견에 동감한다. 지구가 인간에게 자원을 내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인간이 돌려주는 것 없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져다 썼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기후 악당인 우리나라는 이산화 탄소 배출국 1위인 중국보다는 낫다고 착각한다.
1인당 배출량으로 산출하면 우리나라가 6위이고, 중국은 18위이다.
환경이 귀찮고 불편한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를 해결할 방법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기회이자
도전이라는 저자의 말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방법을 찾아 나섰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