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나방
장용민 지음 / 재담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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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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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민의 《귀신나방》은 “히틀러가 살아 있다”는 음모론적 설정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그 설정을 출발점으로 삼아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죽음을 넘어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축복인가,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가능해진다면 인간은 어디까지 인간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밀어붙이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특히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아주 교묘하게 흐린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1969년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소년을 오토 바우만이 총 다섯 발로 살해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사형을 앞둔 바우만이 기자 크리스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독자는 사건의 진짜 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한 사람의 충격적인 범죄처럼 보였던 사건이 히틀러의 생존설, 나치의 잔당,
비밀 조직인 아디헌터, 그리고 뇌 이식이라는 과학적 상상으로 확장되는 과정이 상당히 흥미롭다.

무엇보다 마음에 잔류했던 것은 “히틀러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과 완전히 다른 몸으로 옮겨 살아가는 것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다른 문제다.
육체가 바뀌었을 때 그 사람을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억을 가진 뇌가 다른 육체로 옮겨간다면 그 육체의 주인은 누구인가?
반대로 뇌의 일부가 교체되거나 손상된다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원래의 나’가 아니게 되는 걸까.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테세우스의 배가 떠올랐다.
부품 하나하나를 계속 교체해 결국에 모든 부품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면, 그것은 여전히 처음의 배인가 하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이다.

《귀신나방》에서는 이 질문이 훨씬 섬뜩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적용된다.

육체를 바꾸어도 기억과 의식이 이어진다면 같은 인간일까.
그렇다면 반대로 육체가 같더라도 기억과 의식이 완전히 달라진다면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는 ‘영생’이라는 단어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사람은 죽지 않는 것을 축복처럼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 오래 살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무한히 할 수 있으며, 시간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영생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몸으로 옮겨 다녀야 하는 삶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자연스러운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특히 이 부분에서 묘한 공포를 느꼈다.
귀신나방이라는 존재가 소설 속에서 작품 전체의 인간상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설명되는 귀신나방은 평소에는 흉측하지만 산란기가 되면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변하고, 산란을 마친 뒤 죽음을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그 죽은 나무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 즉 죽음과 탄생이 끊어지지 않고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

그런데 인간은 이 순환을 거부한다.

늙으면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인데, 누군가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다른 몸으로 옮긴다. 더 젊은 몸으로, 또 다른 몸으로. 그러면서 자신의 생명을 계속 연장한다.

그 순간 귀신나방과 인간의 모습은 묘하게 대비된다.

귀신나방은 죽음을 향해 날아가고,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친다.
귀신나방은 자신의 죽음 이후 새로운 생명을 남기고,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막기 위해 다른 인간의 몸을 빼앗는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히틀러라는 인물 자체보다, 죽고 싶지 않다는 인간의 욕망이 과학과 결합했을 때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라는 상상이 더 무서웠다.

특히 🔖“우리는 아디헌터 (Ady Hunter)다.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다들 그렇게 부르지. / 우리는 공식적으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팀이야.”라는 부분은 바우만이라는 인물이 어떤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는지를 단번에 보여준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조직, 작전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사람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이후 이야기가 훨씬 더 큰 비밀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또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려면 적군이든 아군이든 무조건 믿어야 할 때가 있어. 지금은 날 믿어야 돼.”라는 문장도 오래 기억에 남았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는 평소라면 절대로 믿지 않을 사람을 믿어야 할 순간이 생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작품 전체에도 묘하게 적용된다.
독자인 나 역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계속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의 말이 진실인지, 그가 쫓는 존재가 정말 존재하는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특히 🔖“그리고 중심엔 히틀러가 있다.”라는 문장은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미 역사 속에서 죽은 인물이라고 알고 있는 히틀러를 다시 현재의 사건 한가운데 끌어오는 순간, 과거의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섬뜩한 감각이 생긴다.

🔖“늑대를 잡으려고 숲속을 뒤지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가장 어린 양을 무리에서 떼어 놓아야 한다.”라는 문장에서는 또 다른 긴장감을 느꼈다.

상대의 심리와 행동 패턴을 이용해 사냥한다는 사고방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추적극이 액션보다 심리전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목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은 귀신나방에 대한 묘사였다.

🔖“귀신나방이라는 나방이 있습니다.”

이 부분부터 이어지는 귀신나방의 생태에 관한 설명은 작품의 핵심적인 은유처럼 느껴졌다. 특히 산란을 마친 뒤 죽음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의 모습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생명과 죽음을 거부하는 인간을 대비시키는 장면처럼 읽혔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까?
죽음이 사라진 삶은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시간이 소중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선택에는 의미가 생긴다. 모든 것을 무한히 반복할 수 있다면 사랑도, 성취도, 후회도, 용서도 지금과 같은 무게를 가질 수 있을까.

게다가 영생을 위해 다른 사람의 몸을 필요로 한다면 이야기는 더욱 끔찍해진다.
그것은 더 이상 ‘죽음을 이겨낸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인간을 수단으로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라는 역사적 악인을 소재로 선택한 것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인물이 죽음을 초월해 계속 살아간다는 설정은 훨씬 근본적인 불안을 건드린다.

악이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육체만 바꾸면 악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존재가 완전히 다른 얼굴과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나타난다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장용민 작가의 이야기는 ‘말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현실에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과 사건, 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허구적인 비밀 조직과 뇌 이식이라는 설정을 겹쳐놓으니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리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굉장히 그럴듯한 세계로 변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작품 속 음모의 한가운데에 들어가게 된다.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게 만드는 반전과 추적극도 재미있었지만,
책을 덮은 뒤 더 남은 여운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

나는 영원을 잘 상상하지 못한다.
끝이 있기 때문에 시작이 있고,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지금이라는 순간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귀신나방》 속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웠다.
죽음을 알고 살아가는 인간과 죽음을 거부하기 위해 끝없이 몸을 바꾸는 인간.
죽음으로 돌아가는 귀신나방과 죽음에서 도망치는 인간.


‘계속 살아 있다는 것’과 ‘계속 같은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같은 의미일까?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삶은 과연 지금과 같은 삶일까.

이 작품이 진짜로 무서운 이유는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 자체가 가장 무서운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

한동안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죽음을 피해 계속 살아가는 인간보다,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 죽음을 향해 날아가는 귀신나방이 더 평온하게 느껴졌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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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백나무성의 라푼젤
배명은 지음 / 고블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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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고블린2기 서포터즈에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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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은의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을 읽기 전에는 제목에서 먼저 동화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책장을 펼치고 나니 그 익숙한 동화의 세계는 금세 낯설고 서늘한 공간으로 뒤집힌다. 이 책에서 무서운 것은 현실에서 이미 알고 있는 폭력, 상실, 고립, 죄책감, 무력감,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기이한 존재들과 결합하면서 훨씬 선명한 공포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배명은 작가의 글은 독자에게 익숙한 이야기의 ‘뼈대’를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그것을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 정서 속에 옮겨놓는 방식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모자 장수와 나>에서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비극과 전통 설화적 존재가 만나고, <1월 16일생>에서는 고향과 가족이라는 익숙한 공간에 죽은 자와 귀신날이라는 기묘한 감각이 스며든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역시 이미 알고 있는 라푼젤의 이미지를 반복하지 않는다. 높은 탑 대신 폐쇄된 집과 울타리, 측백나무, 그리고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라는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갇혀 있다는 것’의 의미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의 호러는 ‘무엇이 튀어나올까’ 하는 일차적인 공포보다 이미 알고 있는 세계가 어느 순간 낯설어지는 순간의 공포에 더 가깝게 다가온다.

귀신에게 쫓기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후회와 죄책감, 혹은 그 상처를 어떻게든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숙제일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순간은 지나고 나면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의 후회도, 폭력을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기억도, 잘못 들어선 공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도 같은 감정으로 수렴한다.


첫 작품 <모자 장수와 나>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역사적 비극과 기괴한 환상이 겹쳐지는 방식이다. 아리가 할머니를 잃은 상황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린아이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상실과 혼란,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두려움이 숲이라는 공간과 만나면서 공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짧지만 상당히 강렬하다.

🔖“망할! 지들은 남의 나라도 빼앗아놓고 그깟 모자 하나 훔쳤다고 죽이려 들어?”

이 문장은 빼앗긴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대의 모순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역사적 폭력과 개인에게 닥친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한 문장 안에서 부딪힌다. 그래서 ‘모자 하나’는 누군가에게 빼앗긴 시대와 존엄, 삶의 흔적까지 겹쳐 보인다.

<결계의 방>에서는 익숙한 ‘집’이 더 이상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 섬뜩하다. 집은 원래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공간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고, 평범한 일상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공포영화나 호러소설에서 가장 효과적인 장소가 바로 이런 익숙한 공간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낯선 폐가보다 내가 매일 잠들고 씻고 밥을 먹는 공간이 이상해졌을 때 훨씬 도망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귀로부터 살려면 내가 마귀로 살아야 하는 거야.”

무섭지만 동시에 슬픈 문장이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싫어하는 존재의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생존일까. 폭력적인 세계에서 피해자가 다시 폭력의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매혹>에서도 다시 이어진다.

서은에게 남편의 폭력은 현실적인 공포다. 그런데 그 고통을 해결해주겠다고 나타난 ‘천녀’ 역시 마냥 선한 존재가 아니다. 여기서 호러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절박함이 또 다른 선택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바라보게 한다.

특히

🔖“네 고통을 나에게 주면 돼.”

라는 말은 무척 묘한 감정을 남긴다. 처음 들으면 구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누군가가 나 대신 고통을 짊어져 준다고 한다면 얼마나 간절한 제안인가. 하지만 호러의 문법 안에서는 바로 그 달콤함이 위험 신호가 된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지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대가로 내놓고 있는지 제대로 살피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나를 부르는 소리> 역시 무서움의 방향이 흥미롭다. 공동주택이라는 공간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군가 울고, 싸우고, 폭력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생활 소음’으로 넘겨버리기도 한다.

한밤중 들려오는 주기도문과 보이지 않는 존재는 분명 전형적인 호러의 장치이지만, 그 이전에 주인공이 목격한 것은 훨씬 현실적인 폭력이다.
누군가가 여성을 강제로 끌고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경험이 이후의 공포와 겹쳐진다.

그리고 가장 아픈 기억의 문장은 이것이다.

🔖“여자의 눈빛 속에 담긴 말들을 제대로 듣고싶었다. 그 날의 처절한 비명또한.”

이 문장이 유독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소리’보다 오히려 듣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를 이야기하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 분명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알아차리고도 외면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나간 사건과 외면했던 순간을 끊임없이 되돌려 보여주는 기억처럼 다가온다.

이미 지나간 뒤에야 알게 되는 것들. 그때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갔다면, 조금만 더 용기를 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바로 그 ‘만약’은 현실에서는 시간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표제작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머리카락이다. 라푼젤이라는 원형에서 머리카락은 탑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탈출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 머리카락이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불러오는 이미지가 된다.

🔖“손에 잡힌 건 긴 머리카락 뭉치였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앞서 거미줄처럼 느껴졌던 것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호러에서 이런 순간이 가장 재미있게 느껴진다. 평범한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 단 한 문장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순간.

그리고 표제작의 중심에는 ‘가족’이라는 말이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절대로.”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겠다는 약속처럼 들리지만,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는 그 말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함께한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것일까. 사랑과 집착, 보호와 구속, 가족과 소유의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희미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호러라는 장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호러는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존재, 어둠, 피, 벌레, 기괴한 소리 같은 장르적 장치가 주는 쾌감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좋은 호러는 그 공포가 사라진 뒤에도‘왜 이것이 무서웠을까?’라는 질문을 남긴다.

각각의 괴물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인간의 현실적인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가장 무서운 존재가 귀신인지, 괴물인지, 벌레인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면서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 혹은 너무 늦게 알아차린 순간, 그리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붙잡아두려는 마음 같은 것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 잃어버린 사람을 되돌릴 수 없고, 한 번 발생한 폭력을 지울 수 없으며,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했던 순간 역시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책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과거와 마주한다.

어떤 이는 숲으로 들어가고, 어떤 이는 낯선 방에 머물고, 어떤 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며, 어떤 이는 기이한 존재의 손을 잡는다.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바깥의 괴물이면서 동시에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상처일 것이다.

읽고 난 뒤 남겨진 느낌은 무서웠다는 감정보다 슬펐다는 감정에 가까울 것 같다.

핏방울처럼 피어나는 공포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피는 상처에서 나오지만 동시에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의 공포 역시 애써 외면했던 상처를 드러내고 그 상처가 왜 생겼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사람이 끝내 놓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잃어버린 사람, 되돌리고 싶은 순간, 말하지 못했던 진실, 외면했던 누군가의 눈빛, 그리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고통.

서평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떠오른 생각은...

정말 과거에서 벗어난 것일까.
아니면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시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서늘한 ‘소리’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부르는 어떤 목소리일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귓가에 남는 것은 어쩌면 이 한마디일 것이다.
🔖“우리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절대로.”

이 말이 무서운 이유는,
누구도 영원히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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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르네상스의 대화
이케다 다이사쿠.루 매리노프 지음 / 중앙일보S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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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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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고 하면 왠지 어렵고 멀게 느껴진다.
철학자들이 오래된 책상 앞에 앉아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고민하는 모습,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과 사상을 해석하는 학문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 르네상스의 대화》를 읽으며 철학은 매일 반복해서 던지는 아주 평범한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이런 질문에는 검색창에 몇 글자를 입력한다고 해서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AI에게 물어도 수많은 답을 얻을 수 있지만, 그중 어떤 답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는 자기 자신이 결국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마음에 남은 것은 ‘답’보다 ‘질문’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철학을 정답을 전달하는 학문에서 끌어내어,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하는 행위로 되돌려놓는다. 특히 매리노프가 말하는 철학 상담의 의미가 인상적이다. 상담자는 상대에게 삶의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이미 존재하는 생각의 힘을 발견하도록 곁에서 돕는 사람이라는 점 때문이다.

너무 자주 누군가에게 답을 요구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내려준 답은 잠시 우리를 안심시킬 수는 있어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까지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힘을 회복하는 일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책의 초반부에서 만나는 이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철학이나 교양은 결코 겉치레가 아닙니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에서 철학을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성실하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연결하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철학을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철학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철학자의 이름을 알고, 어려운 철학 용어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철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그 지식은 삶의 태도에서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

그 점에서 책 후반부의 이 문장은 앞의 생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덕’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는다 해도, 그것만으로 덕 있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이 문장을 읽고 나니 철학과 교양을 대하는 나 자신의 태도도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은 책을 읽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밑줄을 긋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저장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그 문장이 내 행동을 바꾸었는가를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타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라고 알고 있는 것과
결과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았을 때 과정의 의미를 인정하는 것도 다르다.

‘대화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듣는 것 역시 다르다.

철학은 결국 살아내는 만큼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최악의 환경에서 최상의 결과를 끄집어낼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문장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인생에서 환경은 분명 중요하다.
누구나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경제적인 상황, 가족관계, 사회적 환경, 예상하지 못한 사건처럼 자신의 의지만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환경 자체를 당장 바꾸지 못하더라도, 그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때때로 달라질 수 있다.

고통은 실제로 고통스럽다.
누군가에게 힘든 상황을 견디라고 쉽게 말해서도 안 된다.
다만 모든 조건을 통제할 수 없는 인간에게도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다음 행동을 선택할 가능성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이 문장이 가진 힘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문장이 그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고뇌를 극복해 가치를 창조하는 인생이 진정으로 좋은 인생이며 승리의 인생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고뇌’보다 ‘창조’인지도 모르겠다.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삶이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 고통을 지나오면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지키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에 따라 그 경험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상처가 저절로 가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놀라운 힘일 것이다.

🔖“철학은 '삶의 의미'를 깨우고, '살아가는 힘'을 일으키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철학을 이렇게 정의하면 철학은 갑자기 아주 가까운 것이 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힘든 순간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때로는 돈이나 정보일 수도 있고, 실제적인 해결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해결할 방법이 당장 보이지 않는 순간에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삶에서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미의 문제가 더욱 절실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책에서 이어지는 질문,
🔖“괴로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격려할 것인가? 그리고 어려움에 맞서는 힘을 마음속에서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는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실제로 마주하고 있는 질문처럼 느껴진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만이 아닐 때가 있다.
“괜찮아질 거야.”
“힘내.”
이런 말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지만, 너무 깊은 고통 앞에서는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 힘인지도 모른다.

철학이 줄 수 있는 위로가 있다면 바로 그런 위로일 것이다.
문제를 없애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다시 세우는 것.
상황을 당장 바꾸어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지 질문하게 하는 것.
그래서 철학은 위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얕은 위로를 넘어서는 순간 철학이 시작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특히 오늘날의 사회와 연결해서 생각하게 만든 개념은 ‘중도’였다.

현대에서는 무엇이든 빠르게 판단하도록 요구받는다.

찬성인가 반대인가. 옳은가 틀린가. 좋은가 나쁜가.

SNS에서는 짧은 문장 하나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뉴스의 제목만 보고 사건 전체를 이해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의견을 이해하기보다는 상대방이 어느 편에 속하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한 사람에게도 서로 모순되는 감정이 함께 존재하고, 하나의 사건에도 여러 원인이 얽혀 있다. 지금 옳다고 생각했던 선택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 삶에서 ‘중도’는 무조건 가운데를 선택하는 타협과는 다른 의미로 읽혔다.
쉽게 어느 한쪽으로 몰려가지 않고,
복잡한 현실을 복잡한 그대로 바라보려는 태도.

그리고 판단을 미루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한 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극단적인 언어가 넘쳐나는 시대에 필요한 철학적 태도가 아닐까 싶다.


책 제목에 ‘대화’가 들어간 이유 역시 생각해 볼 만했다.
과거 어느 시대보다 많은 소통 수단을 가지고 있다.
메신저, SNS, 댓글, 영상 통화 등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방법은 넘쳐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로를 이해하는 일은 더 어려워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말은 많아졌지만 대화는 줄어들었다.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듣기보다 반박하기 위해 듣고, 상대가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하기 전에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할지를 준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이야기하는 대화는
상대방을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에게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생각과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책을 읽으며 ‘좋은 대화란 무엇일까?’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좋은 대화는 반드시 의견이 일치하는 대화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이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그것이 더 어려운 대화일 것이다.
그러니 대화에는 말솜씨보다 태도가 먼저 필요한지도 모른다.


특히 제17장 [‘인간혁명’이야말로 ‘세계시민’] 부분에서 문화에 관한 대목이 기억에 남았다.

다른 문화권에 자신의 사상이나 가치관을 전달할 때에는 그 문화가 가진 고유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는 문화와 문화의 관계를 넘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바꾸려고 하는 순간, 도움은 쉽게 간섭이 된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 속에는 때때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되어줬으면 한다’는 욕심이 숨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경험과 상처와 가치관이 있다.
그것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함부로 지워서는 안 된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의 모든 생각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 동의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 사람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세계시민’이라는 말도 국제사회에만 적용되는 개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서 이미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 생각나는 것은 철학의 거창함이 아니라 일상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누군가의 말 때문에 마음이 상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차이를 불편함으로만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배울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일 것인지.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좋은 것들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지.

그래서 《철학 르네상스의 대화》는 철학적 지식을 더해주는 책이라기보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삶의 자리로 가져오는 책처럼 느껴졌다.

철학은 어려운 개념을 외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순간마다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묻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은 혼자만의 사유로 끝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때로는 나와 다른 생각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내가 가진 생각을 수정하고 넓혀가면서 비로소 깊어진다.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철학과 교양이 겉치레가 아니라면 그것은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로 드러나고, 갈등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드러나며,
내가 약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실수했을 때의 태도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철학은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명함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삶의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뒤 ‘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 행동으로 옮기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충분히 듣고 있는가.

지금 필요한 르네상스는 다시 생각하고, 다시 질문하고,
다시 대화하는 인간의 르네상스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오늘 내가 만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더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한 번쯤 의심해보는 것.
알고 있는 좋은 것을 작은 행동 하나로 옮겨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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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머문 자리 - 고전과 함께하는 도시 기행, 그리스
주정이 지음 / 한경비피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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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_

그리스 신화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무엇이 생각날까.

제우스와 아테나, 아프로디테와 아폴론 같은 신들의 이름일 수도 있고, 트로이 전쟁과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의 모험일 수도 있다. 혹은 미노타우로스와 미궁, 판도라의 상자,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신화 속 인물과 사건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정작 그 이야기가 태어나고 전해졌던 공간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킬레우스가 걸었던 세계, 오디세우스가 돌아가고자 했던 바다, 신탁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갔던 델포이, 신들의 이름을 빌려 권력과 명예를 드러냈던 신전과 도시들.

이야기만 읽을 때는 모두 상상의 세계처럼 느껴지지만, 그 이야기들이 실제 산과 바다와 도시와 폐허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신화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이 책은 고전을 읽으며 생겨난 질문을 들고 직접 그 장소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다시 고전을 바라본다.

이 책에서 여행하는 것은 신화에서 역사로, 역사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인간에게 남겨진 질문으로 이동하는 여행이다.


저자는 이 책을 여행기로도, 학술서로도 쓰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대신 실제 장소를 걷는 경험과 고전을 읽으며 생각하는 일이 만나는 지점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오래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현장에서 읽는 고전은 책상 위에서 읽을 때와는 다른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책상 앞에서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를 읽을 때 텍스트 속 세계를 상상한다. 하지만 그 문장을 실제 산과 바다와 폐허 앞에서 다시 떠올린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스의 바람을 맞으며 신화를 생각하고, 오래된 돌을 바라보며 몇천 년 전의 인간을 상상하고, 지금은 폐허가 된 공간에서 한때 그곳을 가득 채웠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

그 순간 고전은 현재의 나에게 질문을 건네는 살아 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여행'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조금 달라졌다.

여행은 반드시 새로운 장소를 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다시 보는 것,
그것 역시 여행일 수 있다.


프롤로그의 올림포스 이야기는 이 책의 시작으로 무척 인상적이다.

저자는 올림포스로 향하던 길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험난한 비포장 산길을 만난다. 인간이 편안하게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관광지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렇게 적는다.
🔖“그 순간 알았다. 올림포스는 관광지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가 끝나는 경계라는 것을.”

오늘날에는 대개 높은 산을 관광 명소나 등산 코스로 바라보지만, 고대인에게 산은 지금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쉽게 올라갈 수 없는 높이, 안개와 구름으로 가려지는 정상,
일상의 세계에서 벗어난 험준한 공간.

그런 장소를 바라보며 고대인은 그곳에 인간의 세계와 다른 존재가 살고 있다고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신화는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며 느꼈던 경외와 두려움, 호기심과 상상력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신화 속 신들은 허구의 캐릭터가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었던 자연과 운명, 죽음과 사랑, 권력과 욕망에 이름을 붙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델포이는 이 책에서 매력적인 장소 가운데 하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신탁을 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신탁이라는 행위가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인간은 지금도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중요한 선택 앞에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고, 운세를 찾아보고,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때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말에조차 기대를 건다.

기술과 과학이 발전한 지금도 미래는 여전히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델포이를 찾았던 고대인과 우리는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신에게 미래를 물었고 우리는 데이터와 전문가와 통계에 미래를 묻는다.

도구가 달라졌을 뿐,
불확실한 삶 앞에서 답을 찾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은 그대로인 셈이다.
그래서 델포이에서 중요한 것은 신탁의 내용만이 아니라,
왜 인간이 신탁을 필요로 했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미케네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신화와 역사가 서로 맞물리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미케네 문명과 영웅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처럼 익숙한 이름들이 한때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갔던 문명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고대 문명이 쇠퇴한 뒤에도 그들의 이야기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도시는 무너지고 왕궁은 폐허가 되었지만 이야기는 살아남았다.

인간이 남기는 것은 건축물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돌은 무너질 수 있지만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입을 거쳐 다시 살아난다.
그런 의미에서 신화는 기억을 전달하는 인간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스파르타 역시 마찬가지다.
스파르타를 강인한 전사와 혹독한 훈련의 이미지로 기억하지만, 책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도시와 사회가 어떤 가치관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는지 생각하게 된다.

강함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의 규율이 우선하는 사회에서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이 질문은 2천 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낯설지 않았다.


마라톤, 테르모필라이, 살라미스.
이름만 들어도 페르시아 전쟁과 관련된 역사적 장면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책은 그 장소들을 산과 들판, 좁은 해협이라는 지형이 역사적 사건과 만나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특히 테르모필라이처럼 좁은 길목 하나가 전쟁의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역사란 추상적인 연표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발을 딛고 움직였던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현대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아테네를 다룬 이야기였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너무 익숙하게 사용한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처음부터 당연한 제도였던 것은 아니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를 누가 판단하는가.
그리고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결론을 내릴 것인가.

오랜 시간 동안 인간 사회를 따라왔다.
아고라와 프닉스, 아레오파고스 같은 공간을 따라가다 보면 민주주의가 추상적인 정치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말하고 듣고 판단했던 구체적인 공간에서 작동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특히 '말'이라는 행위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과정 없이는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테네를 바라보며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충분히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충분히 듣고 있는가.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된 질문은 현대에도 끝나지 않았다.


파르테논과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흥미롭다.
거대한 신전은 신에게 바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규모와 위치, 건축과 장식에는 당시 사회의 힘과 가치관이 함께 담겨 있다.

건축은 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누가 이곳을 만들었는지.
얼마나 많은 자원이 동원되었는지.
어떤 신을 섬겼는지.
누구의 권력이 강했는지.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오늘날의 건축물 역시 다르게 보인다.

도시의 높은 빌딩과 기념비, 광장과 공공건축물에도 현재의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욕망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수천 년 전의 신전이 그러했듯이.


에피다우로스에 대한 이야기는 책의 제목과도 잘 어울리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저자는 그곳에 도착했을 때 느낀 정적과 자연 속에 둘러싸인 공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온전하게 나를 느끼는' 경험을 말한다.

고대인에게 치료란 병든 신체를 고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몸과 마음, 자연과 환경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현대인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고, 마음이 힘들면 상담을 받고, 스트레스가 심하면 휴식을 취한다.

각각을 서로 다른 문제로 나누어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인간의 몸과 마음은 그렇게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고대의 치유 공간을 바라보며 현대인은 너무 많은 것을 잘게 나누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책의 후반부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소는 이타카였다.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타카는 귀향의 상징이다.
수많은 모험과 전쟁, 유혹과 위험을 지나 결국 돌아가야 하는 곳.
그래서 이타카를 생각하면 '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대개 여행의 목적지를 새로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지는 자신이 떠나온 곳이었다.

멀리 떠나야만 비로소 돌아갈 곳의 의미를 알게 되는 사람도 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장소를 지나고 수많은 일을 경험한 뒤에야 자신이 정말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귀향은 자신에게 돌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책의 끝으로 갈수록 신화 속 영웅들의 이야기가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신화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그 안에 신들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안에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승리하고, 패배하고, 욕망하고, 두려워하고, 떠나고, 돌아오는 인간.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신화는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완전히 낡아버리지 않는다.
지금도 사랑 때문에 고민하고, 권력 때문에 갈등하고, 전쟁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생각하고, 선택 앞에서 흔들리고, 결국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들은 사라졌고 신전은 무너졌다. 영웅들은 전설이 되었고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남긴 물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 문장이 이 책의 가장 깊은 여운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우는 것은 공간의 모습일 수 있다.
신전은 무너지고 도시도 폐허가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한 번 던진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그리고 삶의 끝에서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신화가 머문 자리》는 그리스에 가본 사람보다 아직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 더 흥미로운 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리스의 장소들이 단순한 의미의 관광지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올림포스는 신들의 산이라는 이름만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델포이는 신탁의 장소라는 설명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테네의 아고라는 고대 유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말하고 판단했던 민주주의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올림피아의 경기장은 단순한 스포츠 유적이 아니며, 이타카의 바다는 단순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다.

각 장소마다 인간이 남긴 이야기가 겹쳐 있다.

그래서 언젠가 그리스에 가게 된다면 유명한 유적을 빠르게 둘러보고 사진을 찍는 여행보다는, 이 책을 들고 천천히 한 장소씩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돌 하나를 바라보면서도 '이곳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믿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싶다.

폐허 앞에서는 '무엇이 사라졌고 무엇이 남았을까?'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오디세우스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집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를 떠올려 보고 싶다.


어떤 장소에 직접 가면 과거는 완전히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그곳에 남은 돌과 길과 바다와 산이 과거의 흔적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신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질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마 고전을 다시 읽는 이유도, 먼 과거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오래된 질문 속에서 지금의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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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일을 하지만
박은정.서지현 지음 / 등(도서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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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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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라는 직업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논리, 법률, 판결, 승소, 그리고 냉철함.

누군가의 권리를 대신 주장하고, 복잡하게 얽힌 사실관계를 풀어내며,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 앞에서 법이라는 기준을 들이대야 하는 사람. 그래서 변호사는 감정보다는 이성이 앞서야 하고, 개인적인 마음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우선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익숙한 이미지에서 한 걸음 벗어나게 한다.
책에서 법은 목적이라기보다 사람을 들여다보기 위한 하나의 창에 가깝다.

박은정 변호사와 서지현 변호사는 같은 법을 공부했고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의뢰인을 대하는 방식도,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도, 삶을 해석하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다. 한 사람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선택을 돕고, 또 한 사람은 먼저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 차이가 이 책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같은 사실을 보면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 않다. 같은 사건도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다. 피해자에게는 억울한 사건이 가해자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방어해야 하는 사건일 수 있고, 부모에게는 자녀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법정에서는 사실과 증거를 따져야 하지만, 그 사건을 법정까지 끌고 온 것은 대부분 사람의 감정과 관계, 그리고 삶의 사정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자꾸만 법률보다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책 속에서 마음에 오래 머물렀던 이야기는 ‘부모라는 이름의 무게’였다.

자녀의 학교폭력이나 범죄와 관련해 부모를 찾아오는 사건을 접하면서 저자는 쉽게 부모를 비난하지 못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부모를 ‘자녀를 잘못 키운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 역시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이 대목이 마음에 남은 이유는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타인의 삶을 아주 작은 장면 하나만 보고 판단하는지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자녀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사실만으로 그 부모의 삶 전체를 평가할 수 있을까.

회사의 일이 잘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무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혼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관계의 실패를 한 사람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돈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했다고 해서 사랑했던 시간까지 모두 잘못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처럼 타인의 인생을 너무 쉽게 요약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삶은 거의 없다.


특히 변호사라는 직업은 사람들의 인생에서 가장 복잡하고 힘든 순간을 마주하는 일이기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법률 지식만이 아닐 것이다. 사건의 이면을 살피고, 한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려는 태도 역시 중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변호사의 업무를 소개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책의 목차에서 유난히 눈길을 끌었던 단어가 있다.

‘경청’.

변호사에게 경청은 의뢰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사건의 핵심을 놓칠 수도 있고, 당사자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법률적인 해결책만 제시하게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결책보다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을 찾는 경우가 많다.

'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다.'
의뢰인의 마음속에는 이런 바람이 먼저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변호사가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선택지를 함께 찾아가는 과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의 역할이 ‘승소율’이라는 숫자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지만, 중요하다.”

그리고 승소율 자체보다 의뢰인의 사건을 한 번 더 들여다보는 시간, 소통하는 횟수, 서면을 충실하게 작성하는 정도에 더 신경 쓰겠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직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다.
결과를 숫자로 평가하는 데에는 익숙하다.
합격률, 매출, 연봉, 조회 수, 팔로워 수, 승소율….

숫자는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을 평가하기 편리하다.
하지만 숫자만으로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을 위해 얼마나 오래 고민했는지, 몇 번이나 이야기를 들었는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는 숫자 하나로 표현하기 어렵다.

좋은 결과란 결과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성실하게 사람을 대했는가에도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놓쳐버린 타이밍의 대가’에 등장하는 장씨의 이야기도 오래 생각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일. 소송을 선택했지만 받아야 할 금액보다 적은 금액으로 조정하며 사건을 마무리한다.

그녀는 그 돈을 일종의 인생 수업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승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법률 사건에서는 승소와 패소라는 비교적 명확한 결과가 존재하지만,
인생에는 그렇게 깔끔한 판결문이 내려지지 않는다.

어떤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그 관계가 처음부터 잘못이었던 것은 아니다.
돈을 잃었다고 해서 그동안의 믿음까지 모두 무의미했던 것도 아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일에는 완벽한 승리도, 완벽한 패배도 없다.

조금 잃고, 조금 배우고, 다시 선택하는 것.
그 과정을 견디며 다음의 나로 넘어가는 것.
그것이 삶에 더 가까운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꿈꿨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고 또 다음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른다.”

살다 보면 과거의 내가 상상했던 현재와 지금의 내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릴 때 꿈꾸던 삶과 실제로 살아가는 삶이 다르고, 한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관계나 하루의 작은 순간이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소중한 기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꾸 미래의 나를 미리 결정하려 한다.
몇 살에는 무엇을 이루고, 언제까지 무엇을 가져야 하고, 어떤 모습이 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 책은 말한다.
삶은 그렇게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저자 역시 사법시험 합격, 취업, 이직, 개업,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자신이 생각했던 삶과 실제 삶이 달라지는 경험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완성된 나’ 역시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조금 편안해진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나를 완벽하게 설계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 된다.


가족, 이별, 계약, 동업, 회사, 부모와 자녀, 돈, 죽음, 민원, 사고….

목차를 하나씩 보고 있으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변호사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된다.
살아가면서 마주할 수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깨지는 순간, 뒤늦게 법을 찾는다.

그래서 ‘계약서는 왜 모든 증거를 이길까’, ‘친구였기에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동업은 신뢰로 시작하지만 법으로 끝난다’ 같은 제목들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좋은 관계는 계약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관계가 좋을 때 약속을 명확하게 해두는 것이 서로를 보호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AI와의 동행’, ‘AI가 변호사를 대체할까, 아니면 함께 갈까’라는 목차 역시 지금의 시대와 맞닿아 있다.

AI가 법률 문서를 작성하고 판례를 검색하고 정보를 빠르게 정리하는 시대가 되어가면서 전문직의 역할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분명해지는 부분도 있다.

사건을 법률적으로 분석하는 것과 한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 사건을 겪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혼은 단순한 가족법 사건이 아니며,
누군가에게 돈을 돌려받는 문제는 단순한 채권 사건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 또한 단순한 법적 분쟁이 아니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쌓여온 관계와 기억과 감정이 있다.

AI가 정보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함께 고민하는 역할까지 동일하게 수행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기술이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 사람에게만 남겨진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감하고, 듣고, 관계를 맺고, 함께 책임지는 일일 것이다.


두 변호사가 보여주는 ‘같지만 다른’ 삶.

같은 법을 공부하고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두 사람은 똑같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도 같은 세상을 살아도 서로 다른 경험을 한다.
같은 말을 듣고도 다르게 받아들이고, 같은 사건을 보고도 다른 감정을 느낀다.

그렇다면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같은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고, 실패하고, 배우고, 성장하는 것.

그 차이가 모여 한 직업의 더 넓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은 변호사라는 같은 직업 두 사람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아둔다.


책을 덮고 난 뒤 남은 것은 ‘다정함’이었다.
저자가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며 🔖“여전히 나는 다정함을 잃지 않았다.”라고 쓴 대목도 인상 깊었다.

이 문장은 단순하게 친절한 사람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삶을 오래 살아갈수록 쉽게 지친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믿음이 깨지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만나면서 마음에 방어막을 하나씩 세운다.

특히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직업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꽤 어려운 선택이다.

상처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날카로움을 돌려주지 않는 것.
타인의 잘못을 보면서도 그 사람의 삶 전체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
내가 힘들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사정까지 무시하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도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건네는 다정함은 위로보다 조금 더 깊다.

세상은 복잡하고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없으니, 조금 천천히 바라보자는 것.
판단하기 전에 한 번 더 들어보자는 것.
결과만 바라보기보다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는지를 생각해보자는 것.


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긴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법이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도 분명히 있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사람일 것이다.

경청하고, 이해하려 하고, 때로는 기다리고, 누군가의 선택을 존중하는 사람.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조금 덜 판단하고, 조금 더 듣고, 조금 더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법을 다루는 두 변호사의 이야기를 읽었지만, 마음에 남은 것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단단함 속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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