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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백나무성의 라푼젤
배명은 지음 / 고블 / 2026년 8월
평점 :
※ 본 게시물은 #고블린2기 서포터즈에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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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은의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을 읽기 전에는 제목에서 먼저 동화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책장을 펼치고 나니 그 익숙한 동화의 세계는 금세 낯설고 서늘한 공간으로 뒤집힌다. 이 책에서 무서운 것은 현실에서 이미 알고 있는 폭력, 상실, 고립, 죄책감, 무력감,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기이한 존재들과 결합하면서 훨씬 선명한 공포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배명은 작가의 글은 독자에게 익숙한 이야기의 ‘뼈대’를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그것을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 정서 속에 옮겨놓는 방식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모자 장수와 나>에서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비극과 전통 설화적 존재가 만나고, <1월 16일생>에서는 고향과 가족이라는 익숙한 공간에 죽은 자와 귀신날이라는 기묘한 감각이 스며든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역시 이미 알고 있는 라푼젤의 이미지를 반복하지 않는다. 높은 탑 대신 폐쇄된 집과 울타리, 측백나무, 그리고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라는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갇혀 있다는 것’의 의미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의 호러는 ‘무엇이 튀어나올까’ 하는 일차적인 공포보다 이미 알고 있는 세계가 어느 순간 낯설어지는 순간의 공포에 더 가깝게 다가온다.
귀신에게 쫓기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후회와 죄책감, 혹은 그 상처를 어떻게든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숙제일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순간은 지나고 나면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의 후회도, 폭력을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기억도, 잘못 들어선 공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도 같은 감정으로 수렴한다.
첫 작품 <모자 장수와 나>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역사적 비극과 기괴한 환상이 겹쳐지는 방식이다. 아리가 할머니를 잃은 상황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린아이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상실과 혼란,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두려움이 숲이라는 공간과 만나면서 공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짧지만 상당히 강렬하다.
🔖“망할! 지들은 남의 나라도 빼앗아놓고 그깟 모자 하나 훔쳤다고 죽이려 들어?”
이 문장은 빼앗긴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대의 모순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역사적 폭력과 개인에게 닥친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한 문장 안에서 부딪힌다. 그래서 ‘모자 하나’는 누군가에게 빼앗긴 시대와 존엄, 삶의 흔적까지 겹쳐 보인다.
<결계의 방>에서는 익숙한 ‘집’이 더 이상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 섬뜩하다. 집은 원래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공간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고, 평범한 일상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공포영화나 호러소설에서 가장 효과적인 장소가 바로 이런 익숙한 공간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낯선 폐가보다 내가 매일 잠들고 씻고 밥을 먹는 공간이 이상해졌을 때 훨씬 도망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귀로부터 살려면 내가 마귀로 살아야 하는 거야.”
무섭지만 동시에 슬픈 문장이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싫어하는 존재의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생존일까. 폭력적인 세계에서 피해자가 다시 폭력의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매혹>에서도 다시 이어진다.
서은에게 남편의 폭력은 현실적인 공포다. 그런데 그 고통을 해결해주겠다고 나타난 ‘천녀’ 역시 마냥 선한 존재가 아니다. 여기서 호러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절박함이 또 다른 선택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바라보게 한다.
특히
🔖“네 고통을 나에게 주면 돼.”
라는 말은 무척 묘한 감정을 남긴다. 처음 들으면 구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누군가가 나 대신 고통을 짊어져 준다고 한다면 얼마나 간절한 제안인가. 하지만 호러의 문법 안에서는 바로 그 달콤함이 위험 신호가 된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지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대가로 내놓고 있는지 제대로 살피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나를 부르는 소리> 역시 무서움의 방향이 흥미롭다. 공동주택이라는 공간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군가 울고, 싸우고, 폭력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생활 소음’으로 넘겨버리기도 한다.
한밤중 들려오는 주기도문과 보이지 않는 존재는 분명 전형적인 호러의 장치이지만, 그 이전에 주인공이 목격한 것은 훨씬 현실적인 폭력이다.
누군가가 여성을 강제로 끌고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경험이 이후의 공포와 겹쳐진다.
그리고 가장 아픈 기억의 문장은 이것이다.
🔖“여자의 눈빛 속에 담긴 말들을 제대로 듣고싶었다. 그 날의 처절한 비명또한.”
이 문장이 유독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소리’보다 오히려 듣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를 이야기하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 분명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알아차리고도 외면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나간 사건과 외면했던 순간을 끊임없이 되돌려 보여주는 기억처럼 다가온다.
이미 지나간 뒤에야 알게 되는 것들. 그때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갔다면, 조금만 더 용기를 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바로 그 ‘만약’은 현실에서는 시간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표제작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머리카락이다. 라푼젤이라는 원형에서 머리카락은 탑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탈출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 머리카락이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불러오는 이미지가 된다.
🔖“손에 잡힌 건 긴 머리카락 뭉치였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앞서 거미줄처럼 느껴졌던 것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호러에서 이런 순간이 가장 재미있게 느껴진다. 평범한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 단 한 문장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순간.
그리고 표제작의 중심에는 ‘가족’이라는 말이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절대로.”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겠다는 약속처럼 들리지만,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는 그 말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함께한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것일까. 사랑과 집착, 보호와 구속, 가족과 소유의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희미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호러라는 장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호러는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존재, 어둠, 피, 벌레, 기괴한 소리 같은 장르적 장치가 주는 쾌감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좋은 호러는 그 공포가 사라진 뒤에도‘왜 이것이 무서웠을까?’라는 질문을 남긴다.
각각의 괴물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인간의 현실적인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가장 무서운 존재가 귀신인지, 괴물인지, 벌레인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면서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 혹은 너무 늦게 알아차린 순간, 그리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붙잡아두려는 마음 같은 것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 잃어버린 사람을 되돌릴 수 없고, 한 번 발생한 폭력을 지울 수 없으며,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했던 순간 역시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책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과거와 마주한다.
어떤 이는 숲으로 들어가고, 어떤 이는 낯선 방에 머물고, 어떤 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며, 어떤 이는 기이한 존재의 손을 잡는다.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바깥의 괴물이면서 동시에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상처일 것이다.
읽고 난 뒤 남겨진 느낌은 무서웠다는 감정보다 슬펐다는 감정에 가까울 것 같다.
핏방울처럼 피어나는 공포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피는 상처에서 나오지만 동시에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의 공포 역시 애써 외면했던 상처를 드러내고 그 상처가 왜 생겼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사람이 끝내 놓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잃어버린 사람, 되돌리고 싶은 순간, 말하지 못했던 진실, 외면했던 누군가의 눈빛, 그리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고통.
서평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떠오른 생각은...
정말 과거에서 벗어난 것일까.
아니면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시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서늘한 ‘소리’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부르는 어떤 목소리일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귓가에 남는 것은 어쩌면 이 한마디일 것이다.
🔖“우리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절대로.”
이 말이 무서운 이유는,
누구도 영원히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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