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신 연못의 작은 시체
가지 다쓰오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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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본 미스터리 마니아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밀도 높은 전개와 신들린 복선 회수,

그리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충격적인 반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숨죽이며 끝까지 달려갈 수밖에 없는 치밀한 구성,

모든 단서가 마지막에 완벽하게 맞물리는 쾌감.

그러나 1979년 출간 이후 오랫동안 절판된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중고본이 희귀해졌고,

소수의 독자들 사이에서만 비밀스럽게 전해지며, …


─ 옮긴이의 말, 「복선의 신, 깨어나다」 中


일본 본토에서 프리미엄 주고 사서 보던 전설의 작품이 도쿠마쇼텐에서 복간되고, 블루홀식스 출판사를 통해 한국에도 출간되었다. 40여 년 만에 부활한 그 작품은 바로 가지 다쓰오(梶 龍雄)의 『용신 연못의 작은 시체』. 


책은 첫 시작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머니의 유언으로 건축 학과 교수 나카조 도모이치는 동생 슈지가 학동 소개(*2차 대전 말기인 1944년 7월부터 전화[戰禍]를 피해 대도시 아동들을 집단 또는 연고로 시골 등에 피난시켰던 일.)로 갔던 지바현의 깊은 산골마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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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죽음이 임박한 걸 아는 상태에서 마지막 이성을 다해 그 말을 내뱉었을까.

아니면 단지 죽음을 앞둔 자들이 흔히 빠지는 혼탁한 환상 때문이었을까.

그때, 도모이치의 어머니는 말했다.

"도모이치, 네 동생은 살해됐단다. 슈지는 살해당한 거야……."


조사를 위해 대학의 동료들은 콘크리트 결함 실험의 협조를 해주거나 강의 시간을 조정해 주는 등 도와주지만, 도착한 마을에서 정보를 얻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 당시 함께 지내던 친구는 어려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지금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사건에 관여했던 당시의 어른들은 이미 죽었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협조적이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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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지가 사고로 죽었는지 누군가에게 살해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어머니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화장이 진행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머니는 아들이 '살해당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 P.90


당시 젊은 선생이었던 구도의 진술, 그리고 자신을 미행하는듯한 낌새로 폐쇄적인 마을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도모이치 (그리고 추리소설 마니아인 대학 총무과 직원 사가와 미오)는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내가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까지 숨도 못 쉬고 페이지를 넘긴 적이 있었나?


사건이 점점 심화되고, 본격적인 전개가 시작되며 용신 연못 익사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데,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까지 숨도 못 쉬고 페이지를 넘긴 건 처음이었다. 발단과 전개 부분에서 보여준 텍스트가 그런 식으로 전체를 관통하게 될 줄은…. 추미스 마니아라면 이미 읽을 이유야 충분하겠지만, 책을 읽으며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의 정취가 살짝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메시지도 느껴지니 두 작품을 좋아한다면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n회독에 독서모임까지 하고 싶게 만드는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고전이나 인문교양서적은 얼씬도 하지 않고 호러, 미스터리, 추리 소설만 읽었었다. 지금처럼 감상을 남기지는 않아서 그땐 그런 게 재미있었다는 얄팍한 감상만 남아있지만. 이 책, 그리고 더 나아가 블루홀의 책을 읽으며 그때의 순수했던 즐거움이 다시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우혁의 『퇴마록』 전권을 단숨에 해치우고, 다른 작품까지 읽고 싶었던 그때의 욕망이 가지 다쓰오에게서도 느껴졌다. 더 읽고 싶다! 전작을 탐하고 싶다! 그러려면 이 작품이 잘돼야 하지 않은가.


『용신 연못의 작은 시체』, 나를 위해 다들 꼭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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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팅의 정석 - 간다 마사노리, 절대 불변의 카피라이팅 공식 100가지
간다 마사노리.기누타 준이치 지음, 김지윤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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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현대지성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제조업이 급속도로 고도화되었고, 누구나 자신의 상품을 만드는 시대가 왔다. 그만큼 상품을 판매할 때 뭔가 차별점을 두거나 이목을 끌지 않으면 안 되는 치열한 경쟁의 시대이기도 하다. 즉, 이제는 제조는 기본이 되었고 고객 유치와 판매의 기술이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많은 회사들이 판매량을 높이기 위해 팔로워 수가 많은 인플루언서에게 광고를 주거나 연예인에게 협찬을 해주는 모습은 이제 익숙해졌고, 때론 특수 업체에 의뢰해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을 타게 만드는 바이럴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방식이 매출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겠지만, 광고나 협찬은 비용이 많이 들고, 바이럴은 대중들이 바이럴임을 간파하는 순간 부정적 이미지가 쉽게 쌓이는 리스크가 있다.


그러니 이제는 과도한 비용, 커다란 리스크에서 벗어나

나의 글이 무기가 되는 카피라이팅의 기술을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25년 경력을 가진 일본 최고의 카피라이터 간다 마사노리와 재택근무로 카피라이팅을 시작해 지금까지 800명 이상에게 카피라이팅을 교육한 기누타 준이치의 두 번째 공저 책 『카피라이팅의 정석』이 현대지성에서 출간되었다.


카피라이팅이란?


카피라이팅(copywriting)은 광고나 브랜딩에서 문장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말한다. 모든 상품이 거기서 거기처럼 보이는 시대이기도 하고, 각자의 취향이 극도로 세분화된 시대이기도 하다. 내 상품이 고객들에게 조금이라도 선택받기 위해서는 카피라이팅은 필수불가결한 기술이다.


간다 마사노리는 카피라이팅의 기술을 이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불타버린 들판 한가운데서도 종이 한 장, 펜 한 자루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라고. 광고만으로 직접 판매가 가능하고, 고객에게 필요한 진짜 '베네핏'을 전달하고, 24시간, 365일 쉬지 않고 영업하고, 지속 가능한 수익 구조를 만드는 글의 힘, 【카피라이팅】. 책은 두 저자의 방대한 경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화된 100가지 카피라이팅 공식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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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은 상품 자체가 아닌 상품이 만드는 변화와 효과를 산다.


─ P.49


내 상품의 베네핏을 찾고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일부터 임팩트 있는 도입부를 쓰는 15가지 패턴과 이를 더 강화하는 버터넛BTRNUTSS 8요소, 상세페이지 작성 방법에 더해 온라인 시대에 최적화된 파스비코나PASBECONA 등 세일즈에 도움 되는 거의 모든 팁이 한 권에 다 들어있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구체적이고, 방식에 대한 예시도 풍부하다.


내가 만약 한 권의 책을 팔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요즘 텍스트힙이니까 다들 읽어보세요'는 NG. 책의 제안대로 『카피라이팅의 정석』을 판매한다면, 실적이 저조한 마케터나 셀러들로 타깃을 좁히고, 과도한 부대비용 없이 글만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음 강조하면 어떨까?


1) 검증된 도입부 공식 15가지 패턴

책 한 권으로 【 카피라이팅 고수 】 되는 방법

만약 당장 내일 실무적 카피라이팅 기술이 필요하다면?


2) BTRNUTSS

【 25년 경력의 일본 최고 카피라이터 】가 말하는 카피라이팅 테크닉


3) PASBECONA

심혈을 기울인 상품이 안 팔려서 걱정이시라고요?

【 카피라이팅의 요령 】만 알아도 매출을 올릴 수 있습니다.


먼 미래에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었다. 좋은 기회로 받게 되었지만, 관련 전공도 아니었을뿐더러 카피라이팅도 마케팅도 문외한인 내가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도 솔직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이 책이 카피라이팅을 바탕으로 하는 고객 유치와 지속적인 판매의 기술은 당장 적용해볼 수 있을 정도로 쉬웠다. 디테일한 설명과 실무에서 가져온 예시는 과장 좀 보태서 원숭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 역시 서문에서도 카피라이팅은 생각보다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한다.


이토록 치열한 세상에서 적어도 하나의 영역만큼은 내 손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상품이든, 기술이든 무언가 판매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이 책, 『카피라이팅의 정석』을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읽기 전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조차 읽고 난 뒤에는 카피라이팅과 함께 세일즈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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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누구나 교양 시리즈 6
페르난도 사바테르 지음, 유혜경 옮김 / 이화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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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우주님이 모집하신 #우주서평단 과

이화북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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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지식은 단순한 의견을 넘어야 한다.

즉, 생각할 수 있고 이성을 제대로 쓸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 탄탄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철학이 추구하는 바다.


─ 플라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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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싸움을 좋아한다.

서로 모일 경우 그들은 협력하기보다 조롱하고 이용하려 들 뿐이다.

세상이 드물게라도 질서 있는 사회를 이루고 폭력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인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타고난 사회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 본성의 야만성을 억누르는 절대적이고 강력한 권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홉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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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주의 가벼운 바람에도 쓰러지는 약한 갈대지만, 생각하는 갈대다.

우리는 비참한 존재지만 적어도 우리가 비참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나무도, 허리케인도, 별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안다.

무한한 우주는 손쉽게 우리를 파괴할 수 있지만

지적 자각, 즉 자기 인식의 능력만큼은 빼앗을 수 없다.


─ 파스칼 中


철학과가 밥 굶는 학과라는 인식이 만연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철학'이라는 단어나 철학자의 이름을 마주치는 일이 익숙해진지도 오래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로 시작해서 소크라테스까지 온 세상에 철학이 넘치고 사랑받는 요즘, 철학이 삶의 자세를 배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기르는 학문이라는 건 대충 알겠는데… 조금 더 정확하고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철학? 그게 뭐지?

'철학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여기 기원전부터 20세기까지, 2500년을 넘는 방대한 역사 속의 철학 이야기를 한 권으로 압축한 책이 하나 있다. 이화북스의 '누구나 교양 시리즈'의 6번째, 페르난도 사바테르의 『철학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가 바로 그 책. 『철학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는 2019년에 한국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올 8월경에 대폭 수정된 개정판이 나왔는데, 시리즈 자체가 청소년으로 분류되어 있기도 하고, '누구나'라는 키워드답게 거의 모든 교양의 시작을 도와주는 책인 만큼 전반적인 철학의 이해를 이 책으로 권유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고 알찼다.


​책은 철학의 정의부터 시작한다. 질문을 하고 사유하는 우리 인간의 습성을 짚으며, 쉽고 간단한 질문에서 심오한 질문으로 넘어가는 서술을 통해 철학의 정의를 설명한다. 철학은 진리를 찾고 오류나 거짓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철학이 인간의 사고로부터 비롯된 만큼 정의를 이해시킨 다음은 철학자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철학의 시작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부터 비트겐슈타인과 한나 아렌트를 포함한 현대 철학자까지. 50명이 넘는 철학자들을 짧게 다루는데 이렇게 가볍게 훑어보는 것으로 시작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철학자를 찾고 본격적인 탐구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서점 매대에서 쇼펜하우어와 니체만이 거대한 목소리를 내는 와중에 나는 이 책에서 파스칼과 홉스라는 철학자를 다시 발견하고 이들의 철학에 매료되었다. 제목만 얼핏 들어본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파스칼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탐구는 어떤 생각을 낳았는지에 대한 서술로 더 깊은 탐구로 넘어가고 싶어졌다. 저마다의 시대에서 인간 본성에 대해 지적하는 철학의 텍스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의성을 가지니 그냥 넘어가버릴 수 없지 않은가.


​─

부끄럽지만 꽤나 근본 없이 책을 읽어왔다. 입문을 도와주는 좋은 책을 마주칠 때마다 참 기쁘고 반갑다. 이 책도 그랬다. 주위에 청소년이 있었다면 꼭 권장했겠지만…, 없으니 나나 일단 실컷 읽기로 했다.


다음에 읽을 '누구나 교양 시리즈'는?

『행복의 공식, 최대한 쉽게 설명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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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역사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6
존 파커.리처드 래스본 지음, 송찬면.송용현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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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교유당 서포터즈로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출판사마다 단행본이 아닌 브랜드가 되는 시리즈를 낸다. 아르테에서는 '필로스 시리즈'를 내고, 세창에서는 '오퍼스 총서'가,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출판사에서는 '아무튼 시리즈'가 나온다. 하나의 거대한 결로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책을 만든다는 점이 시리즈만이 가지는 매력이지 않을까?


​문학동네의 출판 브랜드 중 하나인 교유서가에서도 특정 분야에 입문하기 좋은 인문교양 시리즈 '첫단추 시리즈'를 꾸준히 발행하고 있다. 첫단추 시리즈의 책 제목만 봐도 호기심이 자극된다. 『인류세』, 『영화의 역사』, 『신화』, 등 누구나 궁금해할 주제로 60권 이상이나 되는데, 어떤 분야에 대한 첫 시작으로 책은 무엇을 알려줄지 상상만 해도 좋지만, 이번에 내가 읽은 책은 『아프리카 역사』다.


​『헤비』때도 이야기했지만, 사회학자 노명우 교수님은 『교양 고전 독서』의 서문에서 교양 있는 사람의 여러 양상 중 하나는 '세계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고 꼽았다. 그런 생각으로 고른 책이었다. 『헤비』가 미국에서 여러 세대를 거쳐 살아온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회고록이라면, 『아프리카 역사』는 아프리카 땅과 그 땅과 관련된 사람들, 그리고 아프리카의 과거를 어떻게 그리고 기록하는지에 대한 입문서다. 나는 아프리카에 가본 적도 없거니와 솔직히 아예 모르기에 한 번쯤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

'아프리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쩌면 대다수의 한국인은 아주 납작한 말로만 표현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접근성이 좋지도 않고, 사진 영상 미디어로 그려지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늘 열악하거나 병들어있는 등 동정심을 자극하는 모습뿐이었으니까. 거기에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과 식민주의로 미국에 넘어간 흑인종은 『헤비』에서도 그려지듯 미국에서 늘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고….


​이런 모습을 보며 어쩌면 '미개하다'라고 비약적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책은 우리의 오류를 바로잡아준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으로 저자는 과거 유럽의 일반적인 인식, 제국주의를 구성하는 인종적인 인식이 대표적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렇기에 편견을 벗긴 뒤의 아프리카는 매우 새로운 학문적 주제임을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아프리카 대륙은 사람이 살아가기에 매우 척박한 환경임에는 틀림이 없는 곳이지만, 아프리카인들은 그런 땅을 개척했다. 니제르강 내륙 삼각주 지역 '젠네제노'는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이며, 복합 사회를 발전시킨 촉매제가 '외부의 힘'이라는 오랜 가정은 오류가 되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문자성이 없기는커녕 네 개의 큰 어족으로 나눌 수 있는 1,500개의 언어가 있고, 다양한 문화마저 가지고 있다. 이 문화는 블루스, 재즈와 같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이 되었다.


​이렇듯 책은 아프리카에 대한 부정적인 오류를 대폭 수정해 주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서양 노예무역과 식민지 역사도 정확하게 다룬다. 아프리카에는 노예무역으로 1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1,2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수출되는 야만적이고 착취적인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사람들을 단순히 수동적인 희생자로 묘사하는 경향을 지적하는 반론 역시 소개한다. 노예무역 시대에 대서양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었고,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교역 조건을 통제하고 매매를 주도하면서 자신들의 권력 균형을 유지했다고, 즉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른 아프리카 사람들을 팔았음을 말하며 '외세 지향성'에 완벽히 부합하는 예라는 설명 역시 덧붙인다.


​─

이 책으로 아프리카 역사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역시 배울 수 있었다. 그만큼 영양가 넘치는 교양서적. 교유서가의 '첫단추 시리즈'를 전부 집에 두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아마 어떤 책으로 시작해도 전부 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특정 분야에 대한 입문이라면 첫단추 시리즈를,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면 역시 이 책을 추천한다.


한국어판 서문에 '젠더의 유동성'이라는 단어가 나와 아프리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ChatGPT에 물어보았다. '젠더 유동성'에는 고정관념의 해체라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는데, 아프리카 대륙에 서구적 이분법인 남과 여가 도입되기 이전의 토착적 젠더 이해가 훨씬 더 다양하고 유연했다고 한다. 생물학적인 구분으로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기보다 사회적 역할이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했는데, 나이지리아, 남수단, 요루바에서 대표적으로 성별이 아닌 지위 중심으로 각자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성이 겨우 사회로 진출했지만 유리천장은 아직도 존재하고, 가부장제의 문제점이 드러난 지가 오랜데 우리가 과연 이런 문화를 가진 땅을 미개하다고 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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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25만 부 기념 전면 개정판) - 가장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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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웅진지식하우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우리가 지질학적 시간이나 천문 공간을 대할 때처럼 노력한다면 이 엄청나게 방대한 인류의 계보를 조금은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노력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그 현실을 잊고 만다. 우리가 언제든 과거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박물관에 대한 고마움으로 내 가슴이 점점 벅차오른다.

─ P.91-92


가끔 나는 어느 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

─ P.172


동료 경비원이나 관람객과 나눈 짧은 소통에서 찾기 시작한 의미는 나를 놀라게 한다. 부탁을 하고, 답하고, 감사 인사를 건네고, 환영의 뜻을 전하고…. 그 모든 소통에는 내가 세상의 흐름에 다시 발맞출 수 있도록 돕는 격려의 리듬이 깃들어 있다. 비탄은 다른 무엇보다 그 리듬을 상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삶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한동안 그 구멍 안에 몸을 움츠리고 들어가 있게 된다.

─ P.197


이제 이런 순간은 예전만큼 자주 오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하며 슬퍼진다. 위대한 그림은 경외감, 사랑, 그리고 고통 같은 잠들어 있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메자닌의 골동품에 대한 호기심과는 다르다. 이상하게도 나는 내 격렬한 애도의 끝을 애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내 삶의 중심에 구멍을 냈던 상실감보다 그 구멍을 메운 잡다한 걱정거리를 더 많이 생각한다. 아마도 그게 옳고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 P.262



2008년 6월, 패트릭 브링리의 형 톰이 죽었다.

원인은 암이었다.

원래라면 패트릭의 결혼식이 열렸어야 했던 날에 톰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운 좋게 얻은 전도유망한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특별했던 가족 형을 잃은 그는 도저히 앞으로 나아가거나, 어떤 일에 매달리거나, 할 수 없었다.

아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숨어버렸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이미 한국에서는 스테디셀러 반열에 든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가 25만 부 기념 전면 개정판으로 또다시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다. 25만 부 판매를 기념하여 제작된 이번 개정판은 초판과 본문의 모든 내용은 동일하나, 167점이나 되는 예술 작품의 이미지와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QR코드가 수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민 수가 5150만 명이라는데, 아직 읽지 않았다면 이번 기회야말로 읽어볼 때가 아닐까.


책은 친애하는 형을 잃은 한 남자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회사를 그만두고, 단순한 일을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일을 하며 쓴 에세이다. 뉴욕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라는 곳으로, 이곳에는 옛 거장의 회화부터 그리스, 로마, 프랑스, 영국, 아시아까지 아우르는 예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경비원의 근무지는 몇 달 주기로 바뀐다.


저자 역시 10년간의 근무 기간 동안 전시실을 여기저기로 옮겨 다녔다. 그는 그곳에 근무하며 특정 구역에 머무르는 동안 그곳의 작품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며 홀로 무언가 떠올리기도 하고, 살아 숨 쉬는 사람들과 짧은 교류로 다시 세상의 흐름에 발맞출 수 있는 격려의 리듬을 느끼기도 한다. 옛 거장 전시관에 있는 티션의 <남자의 초상>을 보며 생전 형의 모습들을 떠올린다. 특별 사진전 구역에서 근무를 할 때 현실의 사람들 개개인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슬람 전시관의 양탄자를 들여다보며 세상이 어떻게 직조되어 있는지를 그 은유를 읽어낸다.


저자 패트릭 브링리는 한국어판 특별 서문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왜 이토록 큰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으며, 거기에 따른 답을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 질문에 나는 책을 읽기 전에는 조심스럽게 '이동진 평론가가 올해의 책으로 꼽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겠지만 다 읽고 난 뒤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지 않을까. '유한한 생명이라는 비극적 운명을 지닌 인간이 창조해낸 영속적인 작품으로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진실되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예술가들은 그 덧없는 순간을 기록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들은 덧없이 흘러가버리지 않고 세대를 거듭하도록

계속 아름답고, 진실되고, 장엄하고, 슬프고, 기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믿게 해 준다.

─ P.330


책 가장 마지막에 있는 문장이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경비원 일을 하며 많은 예술품을 마주하고, 관람객이나 경비원과 교류하며 느낀 것들을 적기도 했지만, 죽은 형 톰과의 추억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미술관의 예술품처럼은 아니더라도 글이라는 형태로 패트릭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 형이 살아있는 순간을 남기려 한 게 아닐까 하며.

우리가 지질학적 시간이나 천문 공간을 대할 때처럼 노력한다면 이 엄청나게 방대한 인류의 계보를 조금은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노력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그 현실을 잊고 만다. 우리가 언제든 과거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박물관에 대한 고마움으로 내 가슴이 점점 벅차오른다. - P91

​가끔 나는 어느 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 - P172

​동료 경비원이나 관람객과 나눈 짧은 소통에서 찾기 시작한 의미는 나를 놀라게 한다. 부탁을 하고, 답하고, 감사 인사를 건네고, 환영의 뜻을 전하고…. 그 모든 소통에는 내가 세상의 흐름에 다시 발맞출 수 있도록 돕는 격려의 리듬이 깃들어 있다. 비탄은 다른 무엇보다 그 리듬을 상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삶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한동안 그 구멍 안에 몸을 움츠리고 들어가 있게 된다. - P197

​이제 이런 순간은 예전만큼 자주 오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하며 슬퍼진다. 위대한 그림은 경외감, 사랑, 그리고 고통 같은 잠들어 있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메자닌의 골동품에 대한 호기심과는 다르다. 이상하게도 나는 내 격렬한 애도의 끝을 애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내 삶의 중심에 구멍을 냈던 상실감보다 그 구멍을 메운 잡다한 걱정거리를 더 많이 생각한다. 아마도 그게 옳고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 P262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진실되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예술가들은 그 덧없는 순간을 기록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들은 덧없이 흘러가버리지 않고 세대를 거듭하도록 계속 아름답고, 진실되고, 장엄하고, 슬프고, 기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믿게 해 준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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