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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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언가를 비판하며 "역설", "모순", "아이러니"와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역설적으로 모두 역설적이며 모순에 차있고 아이러니하다.

(…)

세상은 흰색 도화지가 아니다.

완전무결한 제도 따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말과 같다.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타협할지를 정하며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스켑티컬하다는 것도 순수한 합리성이 아니라

지금의 토양 위에서 조금 더 나은 제안을 생각하는 것뿐이다.

모든 것은 타협의 결과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이러니야말로 세상의 유일한 진리이자 방식이라 생각한다.


─ 「회의주의자에게 새해 인사하는 법」, 오후




2018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장편소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소설의 첫 장부터 독자들에게 혼란스러움을 안겨준다.

사슴을 사냥하는 사냥꾼, 왕발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화자 야니나 두셰이코는 교사를 은퇴하고 별장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이웃인 왕발의 죽음 현장에서 비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의 죽음은 사냥당한 동물들의 복수라고 주장하고, 죽음을 점성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왕발의 생년월일에 집착한다. 그 뒤로 이어지는 폴란드 고원에서의 연쇄살인사건.

사실 이 작품은 장르상으로는 스릴러이지만 범인이 썩 중요하진 않다.



모피와 업진살

​밈이 되어버린 '업진살 살살 녹는다'를 알고 있는가? SNS에서 한 유저가 '인조가죽조차도 도살 장면이 연상되어서 소비하기 힘들다'라고 했던 발언에, 과거에 고기 사진과 함께 올렸던 글이 발굴되어 지금까지도 여전히 조롱 받는 일이다. 물론 업진살 얘기는 안 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모피 착취의 잔혹함을 지적하는 부분마저 비웃음거리로 전락된 점은 유감이 아닐 수가 없다.(나 또한 한때 밈으로 소비했던 적이 있기에 반성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의 화자, 야니나 두셰이코 역시 모순적이다.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를 같은 선상에 놓고 바라보기도 하고, 별자리로 타인의 운명을 읽기 위해 출생일과 출생지를 캐묻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묘사되었을까 봐 이웃인 작가의 저서는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인간 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사회구조나 규칙은 비판하지만, 자신 역시 동물들 ─ 심지어 자신의 자동차까지도 ─ 을 다소 인간 중심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화자가 동물을 착취하는 이들에게 '당신들에겐 살아 있는 생명체를 향해 총을 쏠 권리가 없다'라고 일갈하는 부분은 미친 여자의 미친 소리가 아니다.

​악은 이토록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데 어째서 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가끔 눈에 들어오던 이 문장은 검색해 보니 드라마 환혼의 대사라고 한다. 모든 문제에서 자유로운 인간만이 타인을 비판해야 할까?


​─
역설적이고 모순에 차있고 아이러니해도

​동물 사냥과 연관된 이들의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서사를 가진 이 작품은 스릴러가 주는 도파민보다는 모순적인 문장들이 주는 혼란스러움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선과 악의 모호함, 텍스트화된 법과 텍스트화되지 못한 도덕, 어쩌면 이성과 비이성 사이의 줄타기일 수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해도 분노를 유발하는 사건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하지 않았는가. 악행에 동참했을 때 면죄부 같은 것이 주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완전무결할 수 없으니 차라리 놓아버리는 게 맞을까? 소설은 역설적이고 모순에 차있고 아이러니하더라도 왜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주는 영향력을 끊임없이 돌아봐야 하는지, 또 어떤 것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


/
체코 쪽에서 나의 처녀 비너스(금성)가 지평선 위로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 P.368

​화자가 별을 읽는 서술은 상당히 디테일하지만 별자리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주장에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이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동물들을 위한 정당방위를 실천한 화자가 별을 읽고 무사히 도주에 성공하는 결말에서는 그동안 인간의 손에 의해 스러진 말 할 수 없는 생명들이 지켜준 건 아닐까 하는 두셰이코스러운 여운이 남는다. 이러한 해석이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해도 그렇게 믿고 싶은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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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박효은 옮김 / FIKA(피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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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A4 한 장을 쓰는 힘』이라는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며 저자가 강남구 소재의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라는 이력에 눈길이 갔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비건 수업이나 코딩 수업을 진행하는 학교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어느 학교에서는 철학 수업도 하는구나. 오히려 이상하다. 철학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기초교육과정에 철학은 왜 없을까? 요즘에야 니체나 쇼펜하우어가 자주 '샤라웃'되고 있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철학이라는 분야는 썩 선호되는 분야는 아니었다. 돈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쯤 살아보니 이제는 돈보다 어떻게 삶을 잘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철학의 쓸모'는 여기에 있었다.



『모든 삶은 흐른다』로 바다가 건네는 철학을 들려줬던 로랑스 드빌레르의 또 다른 저서 『철학의 쓸모』는 우리가 살면서 생기는 운명과 그에 따르는 고통에 철학으로 처방을 내려준다. 육체와 영혼, 사회, 그리고 그 외의 흥미로운 고통들, 태어난 이상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만능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때도 있다.

/
철학자들은 본래 철학은 의학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정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철학자의 이야기는 공허할 뿐"이라고 말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혹은 스스로를 '문화의 의사'라 칭한 니체 같은 몇몇 철학자들은 치유의 철학을 강조했다.​

진단명도 다르고 치료법 역시 다르겠지만, 치료의 목적은 같다. 문제가 있는 곳, 통증이나 종양이 있는 곳을 파악하고,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이든 진리든 나에게 주어진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 P.13

저자는 고대 철학자부터 현대 철학자까지 망라하며 우리의 병을 진단하고 처방해 준다. 텍스트 속에서 독자는 이전부터 명확하게 느끼고 있던 고통을 처방받을 수도 있지만, 불편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해 달고 살아온 삶의 병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창작물에서 좋은 이미지로 표상되는 '열정'은 사실 병일까? 인생에서 수없이 나타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는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 모든 것이 극도로 상업화된 시대에서 '질병'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개의 경우 자유를 위협하는 병은 정신을 고통에 빠뜨린다. 행운이나 불운, 운명이나 숙명, 운수나 우연 같은 것들 때문에 우리의 자유의지는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또한 통제할 수 없고 일이 벌어진 후에나 수습할 수 있는 사건들과 되돌릴 수 없는 시간 때문에 우리의 행동은 제약을 받는다. 그래서 철학은 불행이 닥쳤을 때는 이를 견디거나 저항하거나 피할 수 있는 생존법을, 행복할 때는 이를 지키거나 바라거나 만끽할 수 있는 요령을 제시한다.
─ P.118-119



짧은 글들의 모음이지만 참 '쓸모'가 많다. 좋았던 부분들에 플래그를 붙이려다가 너무 많이 붙일까 봐 그만 놓아버렸다. 어제는 '사랑'에 대한 글이 와닿다가도, 오늘은 '실패'에 대한 글이 더 눈에 들어온다. 내일은 '일상'에 대한 처방이 궁금해질 수도 있다. 어쩌면 매 페이지에서 답을 찾게 되는 내 인생이 그냥 잔뜩 병들어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

죽지 못해 살고 있다면,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기보다는 적절한 처방을 받자. 먹는 약이 아닌 철학이라는 형태로. 피할 수 없는 운명에는 철학이 쓸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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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회의론자 - 신경과학과 심리학으로 들여다본 희망의 과학
자밀 자키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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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푸른숲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

그냥 인간은 다 죽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혐오와 갈등을 부추기며 무한으로 확산되는 텍스트와,

온갖 쓰레기와 공장으로 지구가 끝장날 거라는 뉴스들,

또 내게 벌어진 개인적인 일들은

나를 포함한 모든 타인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지난 2021년 『공감은 지능이다』로 처음 국내에 소개된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 자밀 자키의 최신작, 『희망찬 회의론자』가 출간되었다. 그는 에밀 브루노라는 동료 교수가 있었기에 이 책을 쓸 수 있었다. 에밀은 희망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자밀은 처음에 그가 세상 물정 모르고 낙관적인 사람인 줄 알았지만, 에밀에게도 어두운 유년 시절이 있었고,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아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에밀의 모습을 바라본 저자는 스스로의 냉소주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냉소주의는 영리할까? 냉소주의는 안전할까? 냉소주의는 도덕적일까? 


/

희망하는 것은 뭔가를 긍정적으로 보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당장 그 사람의 삶에는 적용되지 않지만 언젠가 실현될 수도 있다.

─ 리처드 라자루스

/


냉소주의가 해롭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는 에밀처럼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의 희망적 태도가 주는 교훈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회의주의'는 추정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고,

'냉소주의'는 사람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다.


나는 회의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책을 읽어보니 꽤나 냉소주의자였다. 일부러 냉소주의자가 되고자 했던 건 아니다. 다른 책의 문장을 일부 빌려서 말하자면,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는 계기는 순전히 운이기도 하다. 타인에 대한 신뢰가 낮아진 건 매스미디어의 영향도 있었지만, 하루는 처음 보는 사람이 친하게 지내자고 했을 때 그 말을 순전히 믿었는데 사이비 종교가 목적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내게 있었던 일들을 전부를 털어놓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내 안에는 무수한 사회적 상어가 여러 가지 이유로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이유로 냉소주의자이지 않을까?


/

좋은 자료는 우리 개인 생활에서 오판을 줄여주고 희망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이끌어준다.

─ P.236

/


인터넷으로 수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오늘날 어떻게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좋은 답을 주는 책이었다. 우리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드는 기사의 이면에는 그렇게까지 유해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카사스와 FARC에 대한 일화는 작은 오해와 이어지는 불신이 어떻게 평화를 깨고 더욱 많은 비용을 소모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서울리뷰오브북스 10호의 기고문, 홍성욱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밈의 힘」이라는 글에 의하면, 과학 분야 스테디셀러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뼛속까지 이기적인 자본주의적 인간에게 타당성을 주었기에 그들이 즐거워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 주장이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부추기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도 한다.


반세기 동안 『이기적 유전자』가 끊임없이 읽히면서 사람들의 이기주의적 행동에 힘이 실렸지만, 이제는 신뢰나 공감, 다정, 이타주의와 같은 키워드가 떠오르는 시대다. 자밀 자키의 이전 저서 역시 '공감'을 긍정하는 책이었고, 매일경제신문사의 『공감하는 유전자』 역시 이듬해에 출간되었다. 최근 디플롯 출판사에서는 『이타주의자 선언』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집단선택설의 지지자들은 한 집단 내에서는 이기주의자가 이타주의자를 앞서지만, 집단 대 집단으로 봤을 때 이타주의자의 집단은 이기주의자의 집단에 비해 더 우월한 경쟁력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우리가 서로를 좀 더 믿어본다면 더욱 괜찮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신경과학과 심리학을 바탕으로 무수한 근거와 함께 쓰인 이 책이 오늘날 우리 안의 냉소주의를 깨는 도끼가 되어주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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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치유할 수 없는 질병
슬라보예 지젝 지음, 노윤기 옮김 / 현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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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현암사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럴 자유는 있다.
하지만 어떤 자유와 그로 인한 행동은 왜 마음에 걸리는 걸까?


길었던 억압과 통제, 제한의 시대에서 벗어나, 더 이상 구속받지 않고 모두가 자유를 누리는 시대가 왔다.(물론 특정 국가나 문화에선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타인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지 않은가? 오늘 마주한 몇 건의 기사 역시 그랬다. 한 기사에서는 중국의 SNS 샤오훙수에서는 한국이 중국의 문화를 훔쳐 가고 있다는 날조 영상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기후 위기는 점점 심각해져 가는데, 어제는 SNS에서 자신이 만든 물건을 전량 폐기하는 ─ '장인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쓰레기 생산의 ─ 영상을 보고 말았다.

우리는 이 모든 행위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해해야 할까?

슬라보예 지젝의 『자유』는 노골적이고 가시적인 억압이나 통제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자유'가 가지는 그 자체를 논의하고 우리가 그 속에서 느끼는 자유와 부자유, 그리고 야기되는 사회적 혼란을 이야기한다.


'프리덤'과 '리버티',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하는 행동은 '프리덤'인가 '리버티'인가?


/
프리덤과 리버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프리덤'이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가능한 한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는 능력과 권한을 의미한다면, '리버티'는 작위적인 제약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관련된 모든 이들의 권리도 고려한다. 때문에 '리버티'는 행사자의 능력에 따라 범위가 달라지며, 타인의 권리에 의해 제한되기도 한다. (…)

─ P.33-34
/

한국어는 그저 '자유'라는 단어 하나만 존재하지만, 자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지젝은 '프리덤'과 '리버티'로 두 가지 자유를 명확하게 구분하며 시작한다. 하나의 예시로 등장했던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미국의 백신 반대자들이 백신 접종을 거부했던 것은 그들이 누린 자유로 타인에게 위협이 되었기에 '프리덤'이 된다. '표현의 자유'로 확산되는 수없이 많은 글들도 때로는 '프리덤'에 속하게 된다.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하는 행동은 '프리덤'인가 '리버티'인가?


"가장 위험한 것은 마치 자유인 것처럼 누리는 비자유다."

자유에 대한 의미를 다룬 다음, 지젝은 '자유'가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되는지 다양한 사례들을 들며 지적한다. 가상의 재화와 암호화폐에 열광하는 젊은 사람들, SNS를 통해 상품으로 권해지는 경험들, 나의 성향에 맞게 콘텐츠를 보여주는 알고리즘….

/
마크 슬루카의 명료한 공식에 따르면, "하루 중 가공된 환경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삶 자체는 더욱 상품으로 변한다. 누군가 그것을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구매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된다."

─ P.276
/


우리는 '자유'롭게 사고 싶은 것을 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지만 사실 또 다른 형태의 노예가 되고 있는 건 아닌가.


책은 영화나 문학뿐만 아니라, 철학, 물리학, 정신분석학, 심리학, 생물 유전학 등 분과학문을 넘나들며 텍스트라는 어원이 가진 '직물'처럼 논리가 촘촘히 짜여있다. 이 한 권의 책은 마치 직물 공예처럼 완성된 한 폭의 그림이 되는데, 그 그림은 우리가 미미하게는 느끼고 있지만, 너무 모호해서 달리 설명이 안되는, 이 시대가 가진 '자유'의 역설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한다. 지젝의 지적 수준에 얼핏 보면 어려운 책이라 느껴질 순 있어도, 현재의 시대를 담고 있어 아주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과도한 향유 속에서 우리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고, 또 우리는 '자유'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지배받고 있지는 않은지 그가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로 세상을 돌아봐야 할 때이다. 모두에게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안 읽어볼 자유'라는 이름으로 거부되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

이 책을 받을 무렵 나는 앤절라 첸의 『에이스』와 아사이 료의 『정욕』을 다시 읽고 있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들어가는 말에서 '만일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한다. 『에이스』에서는 성애를 갖지 않음을 뜻하는 '무성애'라는 개념을 까다로운 체크리스트를 통과하지 않고도 이용할 수 있는 언어의 집으로 구축한다. 하지만 『정욕』에서 등장한 물에 대해 성적 욕구를 느끼는 '물 성애자'의 등장,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사건은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적당한 언어인 '수도꼭지 절도범' 혹은 '소아성애'로 환원되어 기사화된다.


/

만일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일이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라고 지시받지 않는다.

지만 우리가 온전히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 그 선택을 자신의 운명으로 체험한다.

그리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때때로 사랑에 빠진 이유를 타인에게 설명하지만 그 이유들은 사랑에 빠진 이후에 알게 되는 것들이다.

우리는 결코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할 수 있는

편안한 외부자가 될 수 없다.


─ P.18, 「들어가는 말」

/


'물 성애자'라는 기표가 등장해버린 문학적 세계관, 어쩌면 실제로 어디선가 은밀히 잠재하는 '비유기적 존재'에 대한 성애를 지젝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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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 우리 본성의 빛과 그림자를 찾아서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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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초크 출판사에서 지난 8월에 처음 국내에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를 선보이고 수개월 뒤, 우연히 읽게 된 브리드라는 잡지에서 해즐릿에 대한 짧은 소개를 마주쳤다. 이토록 유명한 작가인데, 한국에 본격적으로 한 권의 책으로 소개된 건 겨우 작년에 불과하다니. 그런 에세이스트 해즐릿의 두 번째의 에세이,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가 출간되었다.


공화주의자 해즐릿

해즐릿만의 논리와 문체는 여전히 강렬하고 신랄하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서 보여주었던 모두 까기에 이어, 「패션에 관하여」에서는 겉만 화려할 뿐, 정신은 공허한 유한계급의 '패션'과 거짓 우월성만을 쉽게 모방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뒤를 이어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에서는 타인의 권력을 숭배하며 아첨하는 이와 권력에 집착하는 독재자를 겨냥한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서 보여주었던 한결같은 신랄함과 대조되는 몇 편의 에세이도 있었다.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는 삶과 인간에 대한 해즐릿의 따뜻한 시선이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에세이도 있었는데, 「미술가의 노년에 관하여」에서는 노년을 맞이한 베테랑 예술가를 온화하게 바라보고,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에서는 우리들의 인생을 긍정해 준다. 공화주의란 '모두의 이익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공적 이익과 공동체의 안녕을 중요시하며 각각의 개성은 귀족이나 평민 등으로 다를 수도 있으나 공동체의 입장에서 모두 공화적 개념인 국민이나 시민의 미덕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정치철학'을 말한다. 공화주의자 해즐릿이 한결같이 비판하는 대상은 적어도 모든 인간들은 아니었다. 해즐릿은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 '내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대상은 가면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바로 다음 문장에 '가면 뒤에 숨은 사람에게도 인간다운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고 하며 한발 물러나 인간 자체에 대한 비판에는 유예를 두는데, 사실 해즐릿은 그 누구보다도 삶과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

요즘 시대에 필요한 해즐릿의 애티튜드

자본주의가 후퇴하기는커녕 점점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해즐릿의 태도가 필요하다.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를 읽으며 누군가가, 또는 최근의 상황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지금보다 더 부당하고 잔인한 처우를 당할 수 있었을 시기에 해즐릿은 펜촉을 권력가에게 겨눴다. 이런 글 솜씨라면 해즐릿은 어용학자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안녕과 이익보다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화주의라는 신념 하나만을 고집했기에,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에세이스트가 될 수 있었다. 그의 논리나 삶처럼 우리들에게도 돈이 아무리 중요한들 결코 꺾이지 말아야 할 모두를 위한 신념이 필요하다.

당대 최고의 에세이스트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의 주장에 맞춰 전개되는 논리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의 빛을 따라가며 글을 쓴다는 것이 궁금하다면 해즐릿의 에세이가 좋은 예가 되어줄 것이다.






+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를 읽으며 또 한 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린다.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 '눈에 보이는 물체보다 소리와 냄새, 때로는 맛이 더 오래 기억에 남고 어쩌면 연상의 사슬에 더 좋은 고리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해즐릿의 문장이 어쩌면 그 유명한 맛과 향기로 과거의 추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프루스트 효과'의 탄생에 영향을 준 건 아닌지. 또 해즐릿이 저 너머에 있을 흥미로운 것들에 대한 기대를 품는 우리들의 모습을 표현한 부분을 읽으면서, 프루스트가 이름과 고유명사에 대한 몽상을 했다던 주석의 설명이 동시에 떠오른다. 프루스트가 해즐릿에 영향받았다던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니 이러한 주장은 나의 공상에 불과할 뿐이지만 말이다.



시간은 고통의 침을 뽑아 준다. 슬픔을 생각과 격정의 보존액에 계속 담금질하면 그 본질이 변형된다. 원래 가졌던 인상은 우리가 소망을 투영했다는 흔적만을 남긴다. - P57

지극히 보잘 것 없던 일들도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먼 관점에서 뒤돌아보면 회상에 회상을 거듭하면서 확대되고 풍요로워지며 급기야 흥미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지독했던 고통도 시간에 의해 부서져 결국 가라앉는다. - P59

우리는 황량한 허무보다는 수많은 희망과 두려움으로 동요되고, 가지각색의 기쁨과 슬픔으로 다채로우며, 움직임이 있고 번잡한 이 삶이라는 풍경에 더 많은 흥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무어라도 된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낫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흥미를 가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 P88

인간의 마음은 어딘가 기댈 대상을 필요로 한다. 자부심이나 즐거움의 근원에 접근하지 못하면 인간의 마음은 고통과 사랑에 빠지고 압제에 매혹된다. 그 마음은 부와 권력의 무정한 손아귀가 앗아간 자유와 행복, 안락과 지식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고 가난한 채무자는 권력자가 과시하는 모습을 질시와 경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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