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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별한 실패 - 글쓰기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힘
클라로 지음, 이세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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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을유문화사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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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실패하도록 부름을 받은 인간이더라도
아무렇게나 실패하지는 말라.
─ 『기사도』, 헨리 미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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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글쓰기에 대한 욕구를 느낀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가끔은 작가가 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책 ─ 잘 만들어진 작품, 또는 상품 ─ 과 내가 쓰는 글 ─ 이걸 돈 받고 판다고? ─ 에서 느껴지는 차이에 삭제하거나, 비공개로 돌리거나, 나만이 아는 어느 은밀한 폴더에 처박아 놓는다.
글과 관련된 우리의 실패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작가는 어쩌면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만 하는 일은 아닌지.
관련 업계에서 일하지 않고서야 우리가 글쓴이의 실패를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작가이자 번역가, 서점원, 출판 교정자로 일해온 클라로의 책, 『각별한 실패』는 글쓰기, 번역 그리고 읽기의 실패를 이야기한다. 그는 '독자'에만 머물렀던 사람이라면 발견하기 어려울 '책에 대한 거의 모든 실패'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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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 대한 은유들
실패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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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하나의 문장, 그다음 한 문장,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한 문장이다.
그 문장의 마침표가 점점 더 두려워진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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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실패의 명문 학교다.
프루스트 말마따나 질투가 사랑의 진실인 것처럼, 번역이 문학의 진실일 수도 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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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잠들기가 두려운 때마다 꾸는 꿈이다.
─ P.38
나에게 '실패'는 그냥 '실패'였다, 클라로를 알기 전까지.
클라로가 '실패'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실패'는 온갖 것으로 변신한다. 실패는 문장이 되고, 발명이 되고, 짐승이 되고, 사다리가 되고, 오늘이 되고, 꿈이 된다. 다른 이미지로 변모하는 순간 우리는 실패에서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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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에서 작업하던 원고를 파기하거나 중단해 보지 않은 자가 과연 있는가?
클라로가 던진 이 질문은 비단 독자에게만 적용되는 질문은 아니다. 카프카는 실패의 귀재요, 그르치기의 흑태자이고, 페소아는 킹이다. 콕토는 모든 것에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책은 작가들의 실패 역시 소개한다. 클라로는 이들의 실패 사례를 이야기하며 그 실패가 불러오는 더 커다란 힘을 보여준다.
실패를 했기에 성공했다고?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하지만 실패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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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약 글을 쓰지 않는다 해도, 책은 읽는 독자라면 이 책의 9장, 「대천사의 회초리, 고르차코프의 촛불」만큼은 꼭 읽었으면 한다. '읽기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탓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서량이 줄어든 건 아닌지. 책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만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책의 가격만큼 가져야 하며, 한 번에 깨닫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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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
아니, 나는 무엇을 읽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도입부를 마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재앙의 이면을 보고 있는가?
…
나는 읽을 줄 모른다.
이 사실은 끊임없이 나를 겁주기도 하고 기쁘게 하기도 할 의무가 있다.
읽을 줄 모른다는 실패의 한복판에서, 나는 읽는다.
─ 「9. 대천사의 회초리, 고르차코프의 촛불」 中
클라로는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완벽을 추구하지만 허상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읽을 줄 알아." 그렇다면 누가 감히 자크 뒤팽의 시구절, "얼어붙은 심장 너머, 약간씩 간격을 두고 엇갈려 쓴 글."을 해독할 수 있을까? 우리를 비틀거리게 만드는 읽기, 시를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깨닫는 순간, 우리는 다시 한번 텍스트에 부딪히는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다고 클라로는 말한다. 클라로가 읽기의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오독은 더 이상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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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쓰면서 실패하기 때문에,
혹은 글을 쓰면서 실패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삭제하고 다시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비단 글 쓰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시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P.71
읽고 나면 글과 관련된 모든 실패에서 한층 자유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패가 나를 그저 좌절시키는 것이 아닌 나를 텍스트에 부딪히게 만드는 각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