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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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폭력의 세기 / 한나 아렌트 저 / 김정한 역 / 이후

 

지적인 글이란 이런 것이다.

이 글에는 일부러 잡는 위엄도, 허세스런 인용문의 나열도 없다.

다만 지성과 통찰이 있을 뿐이다.

 

글은 2차 대전이나 베트남 전쟁 등 그 이전과 질을 달리하는 -한 순간에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들의 출현- 전쟁의 여파와 유럽좌파 학생운동 내부의 폭력예찬 - 프란츠 파농과 장 폴 사르트르가 지지했던 - 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자가 일종의 배경으로서 다루어지는 한편, 후자에 대해서는 폭력예찬의 경향에 대하여

직접적인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아레트는 그러한 폭력예찬이 권력과 폭력이 동일하다는 견해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혁명성공을 위한 폭력의 사용으로 이어진다는 판단 아래,

폭력과 권력의 차이를 밝혀나가기 시작한다.

 

"사실상 권력과 폭력의 가장 명백한 차별성들 중의 하나는

권력이 항상 다수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는 반면에,

폭력은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수가 없어도 어느 정도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사람에 반하는 모든 사람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 사람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폭력과 권력이 같이 나타나는 경우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 둘의 차이는 명백하다.

권력은 사람들의 지지로부터 나타나며 그 자체가 목적성을 가지는 반면에,

폭력은 단지 일종의 도구이며 수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만 폭력에 의한 권력의 파괴가 가능하기에 그 둘을 쉽게 혼동할 뿐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하여 폭력이 승리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테러에 의한 지배이다. )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정당성이고,

폭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정당화이다.

"권력은 언제든지 사람들이 모이고 제휴하여 행동할 때 생겨나지만, 그 정당성은 나중에 뒤따라올 어떤 행동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최초의 모임에서 유래한다."

반면 "폭력의 정당화는 미래에 위치하는 목적으로부터 나오며

그 의도했던 목적이 미래속으로 멀어질수록 설득력을 상실한다. "

 

이렇게 권력과 폭력은 다르다.

따라서 폭력예찬은 혁명을 불러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런 방향성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한나 아렌트는 폭력 자체에 대한 우려도 표명하고 있다.

그러하다면 폭력이 어떠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려를 하게 된 것일까?

 

동물의 세계를 연구하며 그 폭력성을 인간에 대비시키던 당시의 동물학이나

폭력이 자연스러운 본능이며, 이런 파괴적인 본능이 문명 내에서 의미없이 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성을 통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당시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의 연구결과 및 견해에 반하여

한나 아렌트는 '폭력이 짐승같지도 않고 비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논증'한다.

 

분노와 폭력은 인간의 다른 감정이나 행동과 동일선상에 있으며,

오히려 이 감정과 행동의 부재가 비인간화의 징후이다.

"분노와 폭력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변질하는 경우는 오직 그것이 대용물로 향해졌을 때"이다.

물론 사회가 합리성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통제할 때 그러한 위선에 대하여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그 감정이 쉽게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폭력의 행사가 대용물을 향한 비합리적인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도 쉬운 일이다.

 

 "폭력은 본성상 도구적이므로 그것을 정당화시켜야 하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효과적일 때까지만 합리적이다. 또한 우리가 행동할 때 우리가 행하는 것에 관한

가능한 결과들을 결코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폭력은 단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만

합리적일 수 있다."

"폭력은 그 예언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혁명보다는 개혁을 위한 무기이다."

"더구나 폭력의 위험성은 심지어 그 폭력이 단기적인 목표라는

극단적이지 않은 틀 내에서 의식적으로 행해진다고 하더라도,

항상 수단이 목적을 압도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마지막으로 당시의 폭력예찬이

거대화된 정부가 행사하는 익명의 권력이 사람들의 행동능력을 제약하는데서 오는 반발력,

'근대세계의 행동능력의 심각한 좌절에서 기인'하는 반발력이라고 파악한다.

즉, 우리가 만들어낸 권력이 오히려 우리의 행동능력을 제약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현 상황이라는 것이다. 

폴 발레리의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권력 전체가,

마침내 지금의 우리와 대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 우리는 그러한 발전들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갈지 알지 못하지만, 모든 권력의 감소가

폭력의 공개적인 초대라는 것 - 권력을 손에 쥐고 있지만 자신의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통치자들이든 피통치자들이든지 간에,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에 저항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항상 깨닫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 을 알고 있으며, 모르고 있다면 알아야먄 한다." 문장으로 글을 매듭짓는다.

 

폭력과 권력의 차이, 그리고 폭력의 본성에 대하여 잘 정리된 통찰력있는 글이다.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더욱,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지성을 한층 고양시켜줄 좋은 글이므로 모든이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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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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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해바라기 / 시몬 비젠탈 / 뜨인 돌

 

삶은 종종 그 어떤 소설보다도 극적인 순간을 선사한다.

소설 속의 한 장면이었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그 순간은

현실의 한 장면으로서는 받아들이기 부담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장면은 영원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시몬 비젠탈에게 닥친 그 순간이 그러할 것이다.

비젠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서

죽음 아니면 노역만이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노역을 나간 병원에서 비젠탈은 간호사의 손에 이끌려 한 병실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병실 안에는 죽어가고 있는 독일군 장교 한 명이 있었다.

22살의 젊은 독일군 장교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유대인에게 저질렀던 만행을 고백하고 또한 참회한다.

사실 고백과 참회의 그 순간도 비젠탈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헌데 독일군 장교는 비젠탈에 한 가지 부탁을 해버린다.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부탁.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게 되었고 또한 진심으로 참회하는 독일군 장교.

그러나 자신의 동족이 당했던 참상.

비젠탈은 고민 끝에 어떤 선택을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선택이 옳았던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에 빠져버리고 만다.

수용소의 동료들과 이야기해도 답이 나오지 않던 이 기억은

2차 세계대전이 종전 이후 이 책 '해바라기'로 만들어진다.

 

글의 말미에서 비젠탈은 질문한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한국판 '해바라기'에는 2부가 있다.

비젠탈의 질문에 대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자로부터 비젠탈과 같은 강제수용소의 생존자,

반대로 히틀러 치하에서의 정부 수뇌,  달라이 라마, 킬링 필드의 탈출자,

한국의 민주화 투사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답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신은 이 의견 중 하나에 동조할 수도 있고, 답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심지어 전혀 다른 답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답을 하더라도

비젠탈이 던진 질문이 갖는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그 어떤 답도 가벼워 보이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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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jedai2000 > 이 작품을 눈뜨고 놓친다면 바보!
팔묘촌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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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묘촌이란 이름 그대로 여덟 개의 무덤이 있는 마을입니다. 이 기묘한 마을 이름의 유래는 일본의 전국시대 패주한 8명의 무사들이 주군의 황금을 가지고 마을로 들어와 권토중래를 노리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견물생심이라 했던가요. 마을 사람들은 8명의 무사들을 전부 몰살시키고, 황금을 찾지만 무사들은 이미 황금을 꽁꽁 숨겨둔 뒤였죠. 기대했던 황금은 허탕치고, 오히려 죽어가던 무사 대장의 저주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마을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무사들을 달래기 위해 8개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해서 마을 이름이 ‘팔묘촌’이 된 거랍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무사들의 저주 때문일까요. 전쟁 전 팔묘촌의 최고 갑부인 다지미 가의 당주 요조가 광기를 일으켜 총과 칼로 32명의 마을 사람들을 살해하고 사라집니다.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 요조의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나, 타츠야는 다지미 가를 상속받기 위해 팔묘촌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저주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타츠야가 돌아오자마자 마을에서는 연쇄독살 사건이 벌어집니다. 마침 마을에 머물고 있었던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사건에 참여하지만 진상은 오리무중이고, 타츠야는 계속되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는 내용입니다.

 마치 옛날 할머니가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나는 책입니다. 일본 추리소설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요코미조 세이시가 1947년 발표한 이 작품은 약간은 고색창연하고 빛바랜 느낌이라 마치 셜록 홈스나 애거서 크리스티,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를 보는 듯한 고풍스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그 좋아하던 밥도 마다하고,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보게 만들던 책이 주는 즐거움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팔묘촌>에는 보물과 보물지도, 비밀통로, 동굴탐험, 연쇄살인, 오싹한 공포 등 고전 모험소설, 추리소설, 공포소설의 요소가 모두 들어가 있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종래의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와는 달리 1인칭으로 집필되어 독자들의 몰입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더구나 주인공 타츠야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 어디 하나 특출난 구석이 없어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과거도 모르는 인물이라 이 끔찍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당황하기만 하죠. 이것은 우리 독자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주인공과 역시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독자와의 심정적 동화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이 작품에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보물지도를 가지고 종유동굴을 탐험하는 모험소설로도 그지없이 재미있지만, 오싹한 공포감도 제법입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특기인 봉건적 인습이 주는 공포감이 그것이죠. 패전 이후 경제적 악화에도 불구하고 점차 시민들의 인식이 깨어나고 개화되는 대명천지에, 전국시대부터 내려온 저주에 매몰된 사람들이라니요. 패쇄된 공간에 사는 시골 사람 특유의 무지와 편협함, 전해 내려오는 저주에 대한 맹신, 사리를 분별하지 않는 가공할 행동력으로 팔묘촌 사람들은 폭도로 변해 저주의 현신이라 생각하는 타츠야를 공격하게 됩니다. 왜 사리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앞뒤가리지 않는 공격성을 보면서 우리는 무서워하잖아요. 팔묘촌의 마을 사람들이 꼭 그렇거든요. 이 분위기를 잘 살려낸 건 요코미조 세이시의 탁월함이라 하겠습니다.

 더구나 추리소설로도 꽤 뛰어납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비록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나타나 사건을 수사합니다. 마침내 그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밝혀진 연쇄독살사건의 비밀을 풀어냅니다. 최종장에서 모든 용의자들을 한자리에 몰아놓고 진범을 폭로하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모습은 뛰어난 고전 추리소설의 절정에서 느낄 수 있었던 짜릿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잘 안배된 단서들을 가지고 직접 추리할 수 있는 재미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팔묘촌>은 일본 추리소설 사상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 중 한 편답게 재미와 스릴, 흥분과 몰입으로 가득찬 굉장히 뛰어난 작품입니다.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는 총 77편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남겼고, 현재는 후배 만화가들이 코스케의 손자, 긴다이치 하지메(김전일) 시리즈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의 국민 추리소설가와 국민 탐정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팔묘촌>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아주 행복한 일입니다. 충분히 즐길 만하고 만족스러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눈뜨고 놓치는 사람이 있다면...흠흠...바보라고 불러주겠습니다.


 

p.s/ 긴다이치 코스케는 명탐정답게 머리 회전이 비상하지만 유독 희생자의 인권(?)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8명이 죽은 후 사건의 비밀을 풀어낸 긴다이치는 말합니다.

“나는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어요...다만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범인을 알면 증거가 없어도 함정 수사를 하거나, 몰래 숨어 사건 현장을 덮친다거나 하는 행동은 왜 못 하나요? T.T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었을까요. 정말 무서운! 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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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크로우 > 추리와 모험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
팔묘촌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옥문도에 힘입어, 기꺼이 다음 독서대상으로 콕! 찝어버렸다.

아아-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이런 친절한 요코미조 세이시. 감동이다.

일단은 그의 전작에서 충분히 전통적인 요소들을 접해서인지 글의 초입부터 무난히 집중할 수 있었고,

비록 긴다이치가 아닌 사건의 중심 인물이지만 어찌 되었든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해주니 이 아니좋을수가!

팔묘촌. 이 섬뜩한 이름부터 으스스하듯이,  마을 주민들로부터 살해당한 패주무사 8명.

그리고 그 중 대장의 원혼이란 몸서리쳐질 정도의 집념으로 마을 주민들을 괴롭혀왔는데.

이런 사건의 주모자격이었던 다지미가의 후사로 밝혀진 '타츠야'가 대를 잇기위해 팔묘촌으로

돌아가려는 그 순간부터 피로 얼룩진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한다.

출생의 비밀, 집안에 은밀히 마련된 비밀통로, 반쪽짜리 동굴지도, 숨겨진 황금을 찾기위한 종유동굴 탐험,

연쇄살인, 뜻밖의 로맨스, 그리고 거듭 미궁속에 빠지고 마는 용의자의 실체-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최고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다이치는 언제나처럼 머리를 벅벅 긁으며 사건이 모두 종결된 후에야 말하길-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어요. ..........." 라니..

이렇게 불친절할 수가! 덕분에 계획 된 모두가 죽어나갔고, 결국은..........................................

 

아무튼, 이러니저러니해도 아주 전통적이고 고전적이면서도 기본적인 추리의 정석이랄까.

아주 매력적이었다. 자 긴다이치! 다음 사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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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스노트 6, 7권을 보고 -

 

치밀한 두뇌 싸움이 어지럽게 펼쳐지는 만화 데스노트.

6,7권을 통하여 라이토는 L에게 승리를 거둔다.

그 결정적인 장면은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손에 쥐며 기억을 되찾는 순간.

데스노트의 주인인 라이토가 되살아나며 치명적인 계획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러나 이 장면은 나에게는 위화감을 가져다 주었다.

 

 

'기억을 되찾는 순간 데스노트 주인으로서의 라이토가 되살아난다' 는 것은

데스노트 주인으로서의 라이토의 기억과 인격에 우선권을 줄때에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데스노트 주인이 아닌 라이토로서 L과 합동수사를 하고

우정이라면 우정을 쌓아온 기억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또한 그 기간 동안의 라이토로서의 인격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데스노트 주인이 아닌 라이토로서의 인격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은 석연치가 않다.

 

좀 더 자연스러운 장면은 데스노트를 손에 쥔 순간 2개의 인격,

혹은 2개의 기억이 충돌하여 혼란을 겪는 것이 아닐지? 

물론 데스노트 주인이 아닌 라이토의 경우에도 데스노트 주인으로서의 기질이 잠재해 있는 것이지만,

기질이 발현하기까지의 시간조차도 고려되지 않는 장면은 조금 급하지 않았나 싶다.

 

더구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인격도 되살아난다고 하는것은

기억 = 인격의 등식을 인정해야 가능하다.

물론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이건 누구한테 물어봐야 겠는걸^^?)

데스노트 주인이 아닌 라이토의 인격에 그 이전의 기억만 되살아난다면?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며 자백해버리는 장면이 나올지도 모른다.

(물론 그 경우 작품이 끝나 버리는 결과가 발생하긴 하는데^^;)

 

고뇌의 챕터가 1챕터 정도만 더 있었으면 연이어진 추리로 복잡해진 머리도 쉬어갈 수 있고

작품의 인간적인 깊이도 더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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