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15층 내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창 밖의 세상은 창 안의 세상과는 완전 딴판인 얼굴을 하고 있다. 새벽 4시 고대의 악명높은 지하 감옥의 철문보다 더 굳게 닫힌 것 처럼 보이는 아이보리색 블라인드를 밀치고 창문을 여니 창 밖의 세상은 처음 보는 낯선이의 표정을 짓고 있다. 비가 온다. 고개를 내미니 텅빈 허공에서 빗방울이 확 떨어졌다. 빗물이 머리에서 이마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니 머리가 가려웠다.
15층 허공 바로 아래 땅에는 텅빈 아파트 뒷편을 비추는 가로등이 하나 둘 있고, 그 옆에는 길쭉한 삼각형 형태의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깜깜한 놀이터에서 식별되는 놀이기구는 산 모양으로 솟은 미끄럼틀 뿐이다. 미끄럼틀 앞으로는 시소가, 옆으로는 그네가, 그 뒷편으로는 철봉이 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15층 아파트에서 창 밖으로 뛰어내릴 생각을 해 본적은 없지만 이런 밤에 창을 열고 아래를 바라보고 있으면 고층 빌딩에서 투신자살한 사람들의 뉴스가 떠오른다.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의 심리는 어떨까 자못 궁금해지는 것이다. 각자 말 못할 사연이 있었겠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뛰어내리려고 창문턱이나 베란다 난간에 올라선 기분이 어떨까? 곡예하는 기분일까? 그곳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겨우 좁은 몇미터의 판대기를 밟고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까? 이런 밤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층에서 아래를 내다보면 가끔은 땅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게 느껴져 어느 순간 한번쯤은 창틀 위에 올라서서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창 밖과 창 안을 구분짓는 건 겨우 두께 몇십센티의 벽돌뿐이다. 그러고보면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공에 붕 떠 있는 셈이다. 공중에 떠 있는 사람들은 땅을 그리워하는 걸까? 땅이든 물이든 생명이 다 거기서 오니까 내 몸도, 피도, 근육도, 뼈도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가겠지..
창 밖에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의 십자가가 있다. 좁은 공간에 많기도 하다. 사람들은 저 아래 시꺼먼 거리에서 돌아다니다 약속한 때에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 기도를 한다. 나도 한 때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지금도 가끔씩 십자가 안을 생각한다. 지은 죄가 많아서 두려운가 보다. 허공에 집 짓고 사는 인간에게 구원은 어디에 있을까? 십자가 안에 있을까? 저 아래 땅에 있을까? 아니면 창 밖의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얄팍한 벽돌로 둘러쌓인 허공 위에 붕 떠 있는 한평 남짓한 방 안에 있을까? 과연 구원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비를 맞으면서 오래된 친구보다 훨씬 다정한, 그러나 처음 보는 듯 낯선 가로등에게 묻는다. 지금 이 시간은 흘러서 어디로 가는지? 내가 가는지? 시간이 가는지?
나는묻는다. 나보다 훨씬 오래 여기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가로등에게 묻는다. 그러나 가로등은 뿌옇고 노란 불빛만 내 보일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을 뿐더러 대답도 안 한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창 안의 세상은 창 밖의 세상과 완전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지금 땅으로부터 몇십미터 위의 허공에 떠 있는 한평 남짓한 좁은 공간 안에서 이 글을 쓴다. 허공에 침대를 놓고, 옷장을 놓고, 거울을 달고, 책장을 놓고, 컴퓨터를 올려 놓았다. 나는 허공 위에서 글을 쓴다.
내 마음도 허공에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