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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태니컬 가든 인 스크래치 북 : 마음에 위안을 주는 꽃과 시 12 - 펜 하나로 꽃을 피우다 ㅣ 인 스크래치 북 시리즈
정혜선 지음 / 스타일조선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주말 여름치곤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길래 정말 오랫만에 나들이를 다녀왔다. 더운 여름엔 시원한 실내가 진리라는 귀차니스트이지만, 여름의 왕성한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여 싱그러움이 넘쳐나는 초록초록한 산과 들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예전부터 벼르기만 하고 가보지 못했던 안동의 병산서원을 찾았는데, 흔히 백일홍이라 부르는, 그렇지만 본디 이름은 배롱나무인, 진한 분홍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산천초목이 짙은 초록과 진분홍의 배롱나무 꽃의 강렬한 보색 대비가 절로 탄성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그러고보면 나는 꽃과 나무를,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얼마 안 남은 여름이라도 에어컨을 켠 실내를 박차고 싱그러운 자연을 즐기러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한 주말이었다. 물론 더울 땐 만사가 귀찮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이번 여름 내내 나를 방구석 책상 앞에 머물게 만든 장본인을 꼽으라면 당연히 스크래치북이다. 여름이 시작될 때 함께 시작한 스크래치북이 한 권 두 권을 넘겨 이젠 네 번째 책을 만나게 됐다. 고전 동화와 서울과 세계의 야경을 거쳐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식물원, 꽃과 식물을 (보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스크래치북이다. 보태니컬 가든이란 제목에 걸맞게 책 속에는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어여쁜 꽃들이 가득 담겨 있다. 나이트뷰 스크래치북 시리즈에서 불빛을 켰다면 이번엔 나의 펜 끝으로 꽃을 피워내는 거라고나 할까.
책을 주문하면 스크래치북과 전용펜이 함께 온다. 책을 펼치면 스크래치북 사용법과 펜 사용법도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더불어 이번 책엔 또다른 선물이 있는데, 바로 책속에 수록된 꽃그림의 원화엽서가 동봉되어 있다. 물론 엽서는 선을 따라 잘라서 사용하게 되어 있지만, 생각지 못한 보너스를 받은 것처럼 좋았다. 더불어 이책 처럼 원화 작가가 있는 <마이 페어리 테일>도 이런 원화 그림엽서를 함께 주면 독자들이 엄청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같이 온 엽서는 잘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야겠다.
<보태니컬 가든 인 스크래치북>은 블랙보드 8장, 화이트보드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드 구성은 <마이 페어리 테일>과 같다. 다만 블랙보드에는 아름다운 꽃그림을, 화이트보드에는 나뭇잎 선인장 유칼립투스 버섯 같은 꽃 외의 식물들 그림을 담았다. 다양한 식물들이 함께 하는 식물원의 취지를 살린 선택이 아닐까 싶다. 블랙보드에는 라넌큘러스, 수국, 양귀비, 코스모스, 작약, 데이지, 튤립, 벚꽃이 담겼다. 그림 뒷면엔 역시나 꽃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특이한 건 꽃그림 밑에 시(詩)의 한 구절이 같이 걸려있다. 꽃그림과 함께 시 한 구절을 음미해 보는 것은 '아름다운 꽃과 시가 있는 꿈의 정원'이란 책의 카피에 걸맞는 낭만적인 구성이다.
▶ 버섯
▶ 유칼립투스
▶ 선인장
▶ 나뭇잎
<보태니컬 가든 인 스크래치북>에도 <마이 페어리 테일>과 마찬가지로 4장의 화이트보드가 담겨 있다. 이전에 <마이 페어리 테일>의 화이트 스크래치 보드들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으니 함께 온 전용펜으로는 화이트보드가 정말 안 긁힌다는 거다. 화이트보드를 긁으려면 블랙보드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힘이 든다. 전용펜만으로 화이트보드를 완성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러다 우연히 찾아낸 것이 조소용 나무칼이었는데, 뜻밖에도 나무펜으로는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화이트보드의 그림들을 쓱쓱 긁어낼 수 있었다. <마이 페어리 테일>에서 발견한 나무펜의 효과를 다시 확인해 보고자 <보태니컬 가든>에서도 가장 먼저 화이트보드를 선택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쉽게 긁히는 나무펜. 화이트 스크래치 보드엔 나무펜이 진리다! :D
전용펜의 난관 외에도 화이트보드의 문젝가 더 있으니 바로 긁혀나온 하얀 찌꺼기들이 잘 안 떨어진다는 점이다. 심지어 보드에서 털어내는 과정에 다시 애써 긁어낸 그림에 붙어버려 분노를 부르기도 한다. 보드의 마감재가 서로 다른 탓이라 짐작해 보지만 그래도 난감할 따름. 이처럼 긁어낸 선에 다시 하얀 가루들이 붙어 두세 번 긁어내야 하는 낭패를 줄이는 팁이 있으니, 바로 화이트 스크래치 보드는 가운데 부분부터 가장자리 순으로 스크래치를 하는 거다. 바깥쪽부터 스크래치 하면 나중에 긁어낸 잔해들이 가장자리를 지나 가는 과정에 그림에 다시 들러붙어 털어내는 품도 두 배로 들고 마음도 두 배로 상한다. 가운데부터 스크래치 하면 그럴 위험이 확연히 줄어든다. 이제껏 8장의 화이트보드를 경험하면서 생긴 나만의 노하우랄까.
가장 먼저 시작한 버섯과 선인장은 수시로 밑그림이 조금씩 어긋나긴 했지만 조금 더 넓게 긁어주는 것으로 위기를 적절히 모면했다. 바탕과 보드색이 모두 흰색이라 조금 넓게 긁어도 거의 티가 안 난다는 게 다행이었다. 밑그림만으로는 심심해 보였던 유칼립투스는 다양한 농도의 잎들이 이어져 의외로 재미있었다. 여러 나뭇잎들을 한곳에 모아둔 나뭇잎 보드는 그림에 나온 각각의 나뭇잎이 어떤 식물의 것인지 궁금해졌다. (알 길이 없다는 게 함정;; ㅋ)
▶ 수국
▶ 작약
블랙보드의 꽃그림을 살펴보니 의외로 많이 힘들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해보기도 전에 얕잡아 보는 것은 금물! 물론 쉽게 완성할 수 있는 꽃그림도 있다. 그러나 작은 꽃송이들이 끝없이 걸려있는 벚꽃이나 꽃잎 사이의 선들만 남기고 긁어내야 하는 수국, 그리고 동화 속 주인공의 레이스 만큼이나 자잘한 선들과 조금씩 자주 긁어내야 하는 부분이 많은 꽃들이 가득한 라넌큘러스 같은 경우 <마이 페어리 테일> 못지 않게 오랜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오히려 (작약처럼) 선으로만 이루어져 선만 긁어내는 그림이 (수국같이) 선을 남기고 면을 긁어내는 것보다는 훨씬 쉽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수국은, 정말, 힘든 만큼의 보람을 안겨주는 그림이었다. 이책에서 손에 꼽힐 만큼 예뻐서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작약의 경우 그림만 보고 장미라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그림을 완성하고 다시 뒷면을 보니 장미가 아닌 작약이라 깜짝 놀랐다. 작약이 장미랑 이렇게 닮았나 싶기도 하고 제대로 알아봐주지 못해 작약한테 미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약이 참 예쁜 꽃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새로운 배움도 얻게 됐다.
▶ 양귀비
▶ 코스모스
흔히 보지만 볼 때마다 예쁜 코스모스도 스크래치펜으로 새롭게 피어났다. 꽃을 긁어내는 것도 쉽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잎들을 하나하나 긁어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나씩 긁어낼 때는 색이 좀 별로인데? 라고 생각했었는데 완성하고 보니 진짜 잎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색이라 놀랐다. 어쨌거나 올가을 코스모스를 볼 때면 꽃만큼 저 작은 잎들도 애정을 갖고 보게 될 것 같다. 정열적인 빨간색의 저 꽃은 그 이름도 유명한 양귀비다. 미인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양귀비의 이름을 딴 것처럼 꽃도 참 고혹적이다. 그림의 양귀비꽃이 청산도에서 보았던 꽃양귀비인지 아님 대마초의 재료가 되는 양귀비인지는 궁금했는데, 뒤의 설명을 보니 둘 다 꽃은 같은 모양이다. 양귀비의 마약 성분만 없앤 관상용 양귀비가 꽃양귀비라고. ㅎ
▶ 튤립
▶ 데이지
<보태니컬 가든 인 스크래치북>은 같은 책인데도 희한하게도 블랙보드의 상태가 조금씩 달랐는데, 극단적으로 달랐던 그림이 바로 튤립과 데이지였다. 튤립은 다른 꽃그림 보드들보다 한결 부드러워 펜에 힘을 덜 들이고 쉽게 긁어낼 수 있었다. 덕분에 이책의 그림 중 가장 짧은 시간에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반면 데이지는 이제껏 해본 블랙보드 중 가장 이상한 상태였다. 펜으로 긁어내면 깔끔하게 긁히지 않고 주변까지 같이 덩어리가 져서 떨어졌다. 펜을 바꾸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대충 마무리하긴 했지만 지저분한 선들은 못내 아쉽다. 이책에 담긴 그림 중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완성작이다. ㅠ
뽑기운으로 내게 온 <보태니컬 가든>의 데이지 보드만 상태가 안 좋은 건지, 아님 다른 분들이 구입한 책의 데이지 보드도 다 안 좋은 건지, 아님 데이지가 아닌 다른 꽃의 보드에 그런 문제가 나타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12장의 그림과 8장의 블랙보드 중 데이지 보드만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걸 보면 전체의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혹여나 출판과정에 어떤 문제가 없었는지는 한번 살펴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 책에는 이런 문제를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 벚꽃
▶ 라넌큘러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라는 버스커버스커의 노래와 함께 봄꽃 잔치를 벌이는 벚꽃은 스크래치북에서도 꽃잔치를 벌인다. 작은 꽃들이 가지마다 소복소복 모여 어마어마한 꽃 수를 자랑하는 벚꽃 보드는 쉽게 시작할 엄두를 못 내게 하지만 의외로 하다보면 무척 재미지다. 격하게 환호했던 봄날 벚꽃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즐거움은 덤이다. 물론 시간은 많이 걸린다.
이책의 제일 첨에 자리잡고 있는 라넌큘러스는 생소한 이름의 꽃이었다. 꽃그림을 봐도 쉽사리 짐작이 안 되어 검색을 해보았지만 어디선가 보았음직하다는 생각만 들 뿐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화면을 꽉 채운 꽃그림이 딱 봐도 힘들겠다 싶기도 했지만 좋아하는 꽃 아는 꽃을 먼저 피워내다 보니 유일하게 모르는 꽃인 라넌큘러스를 제일 마지막에 하게 됐다. 역시나 완성하기까지 예상보다 더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탐스러운 꽃송이들을 잘 긁어내는 게 보기보다 더 힘들었다. 꽃송이 몇 개와 잎 줄기를 스크래치 하는데 3시간, 남은 크고작은 꽃송이 10개를 피워내는데만 3시간 이상이 걸렸다. 그리하여 오늘 따끈따끈하게 끝낸 꽃그림이다. 힘은 들었지만 다 채워내고 나니 생각보다 더 예뻐서 흐뭇하다.
여름의 초입부터 스크래치북에 빠져서 어느새 4권의 스크래치북을 완성하게 됐다. 소녀감성의 밑그림이 너무 예뻐서 <마이 페어리 테일>을 첫책으로 골라 감탄하며 시작했고, 서울과 세계의 야경 시리즈인 <나이트 뷰 인 스크래치>는 펜이 지날 때마다 불이 켜지는 풍경에 빠져들었고, 이번 <보태니컬 가든>에서는 펜 끝에서 피어나는 꽃들에 매혹되었다. 웃기지만 매번 작업하는 그 책의 그림이 가장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몰입해서 스크래치북을 즐겼던 것 같다.
다른 스크래치북과 마찬가지로 이책 역시 몰입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선에 따라 펜으로 긁어내는 단순한 작업이지만 검은 바탕 아래에 숨어 있던 그림들이 하나씩 드러나는 걸 보면서 어떤 희열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얼마나 몰입했던지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건 예사였다. 더불어 그림이 하나둘 완성되면 나만의 기쁨이 샘솟았다. 그게 뭐라고 싶기도 하고 유치한 것도 같지만 스크래치북에 몰두하는 동안은 머릿속을 지배하는 잡생각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힐링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뭔가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길 때 스크래치북을 하면 감정이 정화되어 편안해져서 너무 좋았다.
사실 <보태니컬 가든>은 구입할 때만 해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꽃을 좋아하지만 책설명에 나온 꽃그림에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었는데, 막상 직접 해보니 너무너무 예쁘게 피어나는 꽃들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장 최근에 끝낸 책이라 여운이 남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4권 중 가장 좋았던 스크래치북이 이책이었다. 역시 아름다운 꽃과 시는 마음을 달래주는 힘이 있나 보다. <보태니컬 가든 인 스크래치북>은 예쁜 꽃이 가득한 식물원에 즐겁게 다녀온 듯한 스크래치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