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래치북이 사랑하는 테마로 야경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야경을 주제로 한 많은 스크래치북이 나와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고전 동화 속 세계인 <마이 페어리 테일>에서 놀다가 잠깐 바람도 쐴 겸 <나이트뷰 인 스크래치북 : 랜드마크 오브 서울>로 살짝 건너왔는데, 오우, 이건 또다른 신세계다. 검은 바탕에 노란 불빛, 도로의 중앙선처럼 명도차가 가장 극렬한 두 색이 함깨 어우러지면서 야경시리즈는 강렬한 시각적 자극을 준다. 펜끝으로 내가 마치 불을 켜는 듯한 기분은 덤이다. 그 재미에 빠져 이번엔 나이트뷰 스크래치북 시리즈의 세계판인 <나이트 뷰 인 스크래치북 : 야경이 아름다운 세계의 도시 12>를 구입했다. 책상 위에 앉아 펜끝으로 세계 투어를 나서볼 참이다.
책 뒷면에는 이책에 실린 세계 야경 명소 12곳의 목록이 실려 있다. 100여년이 넘도록 아직도 건축중인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을 시작으로 베네치아, 앙코르 와트, 지우펀, 상하이, 타지마할, 부다페스트, 몽마르트르 언덕, 프라하, 라스베이거스, 성 바실리 대성당, 시드니가 그곳이다. 지역도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체코 헝갈리 러시아가 있는 유럽, 중국 타이완 캄보디아 인도 호주가 있는 아시아, 그리고 미국이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도 한 곳 정도 넣어주면 좋았을텐데 빠져서 조금 아쉽긴 하다. 그래도 친근한 아시아 지역이 많은 건 반가웠다.
12곳의 야경 명소 중에서 유일하게, 그것도 2번이나 가본 곳이 '타이완의 지우펀'이었다. 반갑기도 하고 화면을 꽉 채우는 불빛의 강렬함이 매력적이기도 해서 첫번째 도전작으로 선택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한 그림 속 장면은 항상 사람들로 꽉꽉 차있는데, 스크래치를 하면서 여행 갔을 때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나 더 즐거웠다. 좁은 골목에 길게 매달린 홍등의 불빛을 제법 잘 살리지 않았나 싶다. 등에 달린 한자가 정확하게 잘 보이지 않아 대충 완성한 게 못내 아쉽긴 하지만 지우펀 여행의 추억들을 되살려준 시간이었다.
두 번째로 스크래치 해 본 곳은 스페인의 그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으로, 이책의 표지 그림이기도 하다.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빛의 색이 변해서 더 재미가 있었다. 세밀한 표현이 많아서 조심조심 작업해야 했지만 완성해놓고 보니 정말 예뻐서 뿌듯했던 그림이다. 책의 표지와 함께 함께 나란히 두어도 절대 꿀리지 않는 나름 완성도 있는 작품이 탄생했다. ㅎㅎ
물의 도시인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꼭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인데, 푸른 빛이 섞인 야경 덕분에 전체적으로 더욱 운치있는 분위기를 완성했다. 섬세한 표현이 많은 편이라 시간이 꽤 많이 걸렸는데, 그만큼의 보람이 있는 그림이었다. 특히 강물 가운데 있는 뱃사공이 노를 젓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몇 개의 선으로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내서 그 솜씨에 혼자 감탄하기도 했다.
올초 친구가 다녀온 인도의 타지마할과 또다른 친구가 다녀온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한 체코의 프라하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꼭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다. 특히 앙코르 와트는 영화 <화양연화>로, 체코는 <프라하의 봄>으로 더 강렬한 인상이 남아있는 곳인데 영화 속 주인공이 있던 그 자리에 직접 서 보고 싶다. 타지마할은 친구가 전해준 이야기로 만족해야 할 것 같지만, 앙코르 와트와 프라하는 언젠가 가볼 수 있기를 바라보고픈 마음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그림이 너무 예뻤다. 자잘한 선들이 많아 스크래치 하기엔 세밀하고 조심스러워 쉽지 않았지만 이름으로만 들어봤던 부다페스트의 풍경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만약 부다페스트를 정말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그림 속 장소를 찾아가게 되지 않을까.
프랑스의 그 유명한 몽마르트르 언덕은 의외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예술가들이 가득한 거리를 생각했는데 웅장한 성당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뒷면의 설명을 보니 사크레쾨르 대성당이라고. 야경을 표현하기에는 예술의 거리보다는 대성당이 더 적합했었나 보다. 그래도 몽마르트 언덕 하면 떠오르는 그 풍경이 아니어서 혼자 조금 아쉬워했다. ㅎ
러시아의 성 바실리 대성당을 딱 보는 순간 '테트리스?' 했는데 찾아보니 역시나, 테트리스 게임의 배경이 되는 바로 그 성이었다. 스크래치 그림에 입혀진 야경의 색깔이 테트리스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듯해 재밌었다. 처음에 만만하게 보고 시작했는데 의외로 손가는 부분이 많아서 시간이 정말 많이 걸린 그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완성작을 보면 테트리스성의 그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서 무척 흐뭇한 그림이기도.
그리고 최첨단 도시로 변신을 느끼게 해주는 중국 상하이, 엄청난 선들의 공포에 가장 마지막에 도전했지만 그 공포를 현실로 만들어 엄청난 시간이 걸렸던 미국 라스베이거스, 그리고 건물만 봐도 어딘지 바로 알 수 있는 호주 시드니까지 <야경이 아름다운 세계의 도시>를 채우고 있다. 참, 호주 시드니 보드의 경우 처음 책을 펼쳤을 때부터 저렇게 스크래치가 나 있어서 좌절모드;; ㅜㅜ 저것 때문에 교환을 하기도 그래서 그냥 했는데, 하필 물결이랑 반대방향으로 스크래치가 나서 완성하고도 계속 옥의 티처럼 눈에 거슬린다. 부디 저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길 빌 뿐이다.
서울의 야경을 너무 신나게 끝내고 주문한 책이라 조금 자신감을 가졌었는데, 생각보다 섬세한 선의 표현을 요구하는 디테일 한 부분들이 많아서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들었다. 그렇지만 업글된 매력을 품은 새로운 야경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함께 온 스크래치 전용펜은 손에 익기 전까지는 예상치 못한 선들을 만들어내면서 나를 당황시키기도 했지만, 작은 것에 너무 연연하지 않아도 되고 실수해도 적절히 해결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스크래치북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찌꺼기들로 주변만 더럽히지 않는다면 항상 갖고 다니면서 틈틈히 하고 싶을 정도인데, 긁혀나온 검정 잔해들의 습격 때문에 그러기는 힘들 것 같아 아쉽다.
참고로 스크래치북을 할 때는 신문지를 밑에 깔고 하면 주변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다. 펜으로 긁어낼 때 발생하는 검정 잔해들은 바로바로 털어내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그림에 눌러붙어 기껏 정성들여 긁어낸 것들을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전용펜으로 긁어낼 때 기대와 달리 선 주변이 깔끔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 반대방향으로 한번 더 긁어주면 제법 깨끗해진다. 그렇지만 그냥 둬도 조금 찝찝할 뿐 그림의 대세에는 별 지장이 없다. (그렇지만 꼼꼼함이 병인 나는 열심히 다듬는다. 쿨럭) 가끔 넓은 부분을 긁어내야 할 때는 면적이 넓은 대용칼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날카로운 펜으로만 긁으면 덜 긁힌 부분들이 생겨 지저분하게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힘도 많이 든다.
<나이트뷰 인 스크래치북 : 야경이 아름다운 세계의 도시 12>는 <랜드마크 오브 서울> 만큼이나 깜깜한 종이 위를 환하고 아름답게 밝히는 재미가 가득한 스크래치북이었다. '죽기 전에 꼭 경험해 봐야 할 세계의 야경'이라는 책의 카피에 완벽하게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가급적 직접 보고 싶어진 건 사실이다. 정말 죽기 전에 언젠가 그곳들에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그림 속 야경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강한 인상을 새겨주었다.
<야경이 아름다운 세계의 도시 12>는 12곳의 아름다운 세계의 야경 명소들을 만날 수 있어 즐거운 책이었다. 세계라는 거대한 스케일에서 건져올린 야경 명소라는 것이 서울의 야경을 주제로 한 <랜드마크 오브 서울>과는 확연히 다른 이책만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또한 노란 불빛만으로 채웠던 <랜드마크 오브 서울>과 달리 이책의 야경에는 다양한 색감의 불빛들을 적절히 더해졌다. 서울 야경보다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점으로, 아름다운 색의 불빛들 덕분에 스크래치를 하는 재미가 더 커졌다. 밑그림과의 꼼꼼한 싱크로율을 요구하지도 않아 부담이 없는 것도 장점이다. 서울의 야경만으로는 심심했다거나, 보다 넓은 세계의 화려한 야경을 내 손끝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면 이 스크래치북이 흡족한 즐거움을 전해줄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