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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오랜만에 소설을 들었다. 마음이 편치 않으니 책이 손에 잘 잡히질 않았고 소설책은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이책을 다 읽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예전 같았으면 이야기의 힘에 이끌려 하룻밤 안에 다 끝내버렸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긴 시간에 걸쳐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설이 가진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그것을 펼쳐낸 이야기꾼 황석영 작가의 힘 때문일 게다. 큰 감동과 울림을 주었던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통해 소설책이 역사책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았다면, 황석영 작가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신작 《여울물소리》는 풍성한 역사적 서사로 그 믿음을 확인시켜준 책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더할 나위없이 즐거웠다.
여담이지만 몇년 전 우연한 기회에 황석영 작가님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나 '조선의 3대 구라'라 불리는 별명에 걸맞은 입담을 자랑하시는 아주 유쾌한 분이셨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소설 속에서 전기수 이신통이 맛깔스레 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황석영 작가가 이 책을 읽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어쩌면 이제껏 읽은 황석영 작가의 소설 중 《여울물소리》가 가장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여울물소리》는 구한말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천지도인인 이신통과 그를 향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평생 이신통의 행적을 좇으며 그를 기다리는 박연옥의 이야기를 큰 줄기로 하고 있다. 연옥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시골양반과 기생 첩 사이에서 서녀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와 평생 마음을 주는 정인 이신통과의 첫만남, 돈에 팔리듯 하는 결혼과 소박을 자처한 이혼 등 고단한 연옥의 삶을 풀어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연옥의 삶을 뒤흔드는 이신통의 재등장으로 앞으로 실타래처럼 얽힐 그들의 안타까운 운명과 당시를 살아가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간다.
갑오년 부패한 정권에 반기를 들었던 천지도인의 집회가 무력진압으로 실패한 후 이신통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연옥의 곁을 떠나지만 소식이 없다. 기약없는 기다림에 지친 연옥은 직접 그의 행적을 찾아나서고, 그 과정에서 이신통의 가족을 비롯해 그가 인연을 맺었던 여러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파란만장한 신통의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간다. 그 편린들이 맞춰지면서 이신통이 왜 그런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 당시의 시대가 얼마나 어지러웠으며 그런 시대에 대항했던 천지도(동학, 이후 천도교로 이어진 사상을 소설에서는 천지도로 표현한다)를 에 왜 민중들이 빠져들 수 밖에 없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완성된다.
서자의 얼자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자신의 능력을 검증해 보고자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갔던 이신은 객주에서 우연히 만나 친해진 서일수를 통해 돈으로 관직이 매매되는 부패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출세의 마음을 접는다. 대신 이신통이라는 가명으로 한양에서 전기수(소설 읽어주는 사람)로 명성을 얻게 되고, 한편으로는 서일수를 도우면서 천지도인과 천지도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 와중에 그들과 친하게 지내던 별장 김만복이 갑오년에 일었던 임오군란 관련자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힘없는 조선은 점점 외세에 의해 망국의 길에 가까워진다.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던 신통은 한양 시내에서 전기수로 이름을 날리다 놀이패에 스카웃되어 광대물주, 연희 대본가 등으로 곳곳을 돌며 그의 재주를 꽃피운다. 하지만 잘못된 세상에 대한 그의 사회인식은 그를 세상에 안주하지 못하게 했고, '사람이 하늘'이라는 천지도 사상은 이신통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신통의 천지도 입문과 함께 이야기는 자연스레 천지도란 무엇인지, 왜 천지도인들이 썩어가는 나라에 대항해 난을 일으켜야 했는지로 흘러간다.
황석영 소설 《여울물소리》는 떠난 정인을 좇는 여인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큰 테두리로 하고 있지만, 그들이 풀어내는 삶의 이야기에는 구한말 당시의 어지러운 현실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분과 관직을 돈으로 사고팔 만큼 부패한 정권, 신식군대와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 잠깐이지만 그 사이 정권을 탈환한 흥선대원군, 임오군란을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들여 남의 땅에서 세력다툼을 벌이는 청과 일본, '사람이 하늘'임을 내세우며 일어났던 동학과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동학농민운동 등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실들이 자연스레 녹아들면서 소설은 한 개인을 통해 그 시대의 거대한 서사를 축약해낸다.
황석영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여울물소리》는 그의 등단 50주년이란 타이틀에 걸맞는 멋진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일단 소설 자체가 몰입도가 높아 재미있었고, 몰랐던 옛 이야기들을 많이 알게 됐고, 무엇보다 그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렸다. 좋은 역사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역사책의 한두 줄의 기록 속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스며있다는 있었다는 사실에 거듭 놀라고 감탄하게 된다. 이책 《여울물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반 천지도 사상에 접어들면서 다소 쳐지는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방대한 역사적 사실 속에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맛깔나게 표현해내어 재미있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책 제목인 《여울물소리》에 대한 의문은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비로소 풀린다. 그리고 기나긴 이야기에 걸맞는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의 마지막에 늙은 뱃사공이 부르는 노랫말과 주변을 흐르고 또 흐르는 여울물 소리는 고단했던 격동의 구한말을 거쳐 온 우리네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모였다가 흩어지고 급히 떨어지는가 하면 평탄하고 험난하다가도 평온한 여울물길은 우리 인생과도 닮았다. 우리 삶도 여울물처럼 그렇게 계속 흐르고 또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