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기엔 좀 애매한 사계절 만화가 열전 1
최규석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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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기엔 좀 애매한 │ 최규석 글,그림 │ 사계절



최규석 작가의 신작만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주문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택배상자에서 책을 꺼내면서 조금 당황했다. 대략 A4 판형의 예상치 못한 크기였다. 책을 뭐 크기보고 사는 건 아니지만, 큼직한 크기 덕분에 눈이 시원해서 책읽기엔 좋지만, 무조건적인 규격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다행히 책장 높이를 넘어서진 않아 다른 책칸으로의 이사까지 감행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현격히 차이나는 높이로 인해 최규석의 신작 《울기엔 좀 애매한》(사계절,2010)은 '그의 전작과 같이 꽂아두기엔 책높이가 좀 애매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6ㆍ10 민주항쟁을 생생하게 풀어낸 만화 《100℃》를 통해 최규석 작가를 처음 만났다. 그전부터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대한민국 원주민》 등으로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좋아하는 몇몇 작가의 작품을 제외한 다른 만화책은 잘 보지 않았던 터라 그의 작품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접한 작품이 《100℃》였고, 첫만남의 강렬함이 오래 기억에 남아 그의 다른 작품을 하나둘 찾아보기 시작했다. 가난한 대학생들의 자취방을 무대로 한 《습지생태보고서》와 그의 이름을 주목하게 만든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차례로 만나면서 어느새 작가 최규석의 팬이 되었다. 

아직 남은 《대한민국 원주민》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신작을 먼저 만났다. 제목만으로는 그 내용을 쉬이 짐작하기 힘든 특이한 제목을 지닌 전작들처럼 《울기엔 좀 애매한》 역시 마찬가지다. 순박한 표정의 소년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웃고 있는 책표지가 더해져 대체 울기에도 애매한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에 마음이 움직였다. 평소 청소년 문학을 좋아하는지라 더욱 궁금해졌고, 책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다 읽어버렸다.



꽃미남 배우 원빈과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외모를 지닌 고3 강원빈은 그림에 재능은 있지만 부모님의 이혼 후 넉넉찮은 가정형편 때문에 선뜻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못한다. 없는 집 자식들이 선뜻 공부를 시작하기엔 미술은 너무 돈이 많이 드는 분야니까. 그런 아들을 위해 엄마는 고민 끝에 아들이 가고 싶어하는 미술학원 등록을 허락하고, 원빈은 엄마의 짐을 덜어드리고자 틈틈히 학원비 충당을 위한 알바를 뛰면서도 하고 싶었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겁다. 재능에 열정, 그리고 테크닉까지 더해지면서 원빈의 그림 실력은 나날이 좋아지지만, 세상은 매몰차고 가난은 결정적인 순간 그의 발목을 잡는다.

자신을 호구, 그것도 모태 호구 또는 내추럴 본 호구, 그리고 입 가볍고 귀 얇고 속 좁은 최강 찐따(은수의 성격이 드러나는 핵심 대사인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칭하면서도 사람 좋은 웃음을 실실 흘리는 은수는 '어떻게든'의 실례로 불리는 미술학원의 재수생이다. 실력은 있지만 입학금을 낼 돈이 없어 대학에 합격하고도 재수를 하는 은수의 모습은 원빈의 서글픈 미래상이기도 하다. 모태 빈곤인 가정 형편 때문에 꿈(학원비)과 생계(생활비)를 위해 음식점 알바도 겸하고 있지만 삶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점점 더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현실 때문에 꿈을 버리고 싶진 않지만 팍팍한 삶은 은수의 어깨를 점점 더 짓누른다.



이책에는 입시 미술학원을 배경으로 만화가의 꿈을 키우는 다양한 아이들이 등장한다. 늘 붙어다니는 여고생 3총사가 있고, 실력은 있지만 돈이 없는 은수와 원빈이 있고, 그들과 반대로 실력은 그냥그렇지만 재력만큼은 빵빵한 지현이 있다. 그리고 시종일관 직설적인 대사와 촌철살인의 유머로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내에는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학원강사 태식이 있다. 여담이지만, 유머감각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키크고 깡마른 체격의 장발머리 태식의 비주얼은 이책의 작가 최규석과 꽤나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작가님이 훨씬 쾌남이지만. :)

원빈에게서 시작한 이야기는 은수를 거쳐 학원 아이들에게로, 그리고 다시 원빈에게 돌아온다. 대학 입시라는 모두의 공통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의 정당한 실력 외에 다른 어떤 외부의 개입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 있다는 부조리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분노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 현실에서 그들이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가지지 못한 자로서의 좌절을 안겨주면서 동시에 앞으로 겪게 될 현실의 녹록찮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가난하고 힘들지만 그렇다고 울기에도 좀 애매하다며 억지로라도 웃으려던 그들에게 현실은 기필코 눈물샘을 툭 하고 건드린다. 무심한 듯 덤덤하게 넘기는 듯 보이던 원빈의 눈에서 기여코 또르르 하고 눈물이 떨어지는 순간 내 코끝도 같이 시큰해졌다.



《울기엔 좀 애매한》은 입시만화반 아이들이 겪는 상황들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생생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풀어낸다. 대학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물어보려 하지 않거나, 그런 대학마저도 실력이 아닌 돈의 힘으로 들어가거나, 힘겹게 대학을 나와도 정작 일자리가 없어 비정규직을 연연하며 빈곤의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다. 찌질하고 남루한 삶이 힘겹지만 그렇다고 울기엔 좀 애매하지 않냐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작가는 태식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울거나 웃는 것 외에 화를 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그러나 정작 누구에게 화를 내야할까. 그게 문제다.

작가는 헌책방 주인, 학원 원장과 강사 같은 인물들을 통해 위선적이고 자기 잇속만 챙기느라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부조리한 어른과 사회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동시에 그럼에도 힘든 현실을 살아내는 아이들에게 따듯한 위로와 작은 희망을 전한다. 결국 울어버린 원빈도, 울지도 웃지도 못한 은수와 태식도,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그 시간이 지나면 제각각 자신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울기에도 웃기에도 좀 애매한 무수한 상황들을 겪으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때 그들이 그저 웃어넘길 뿐만 아니라 때때로는 실컷 울거나 속시원히 화를 내보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는 다시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만화를 그린 작가도 책을 읽은 독자도 모두 우리 아이들이 그러해주길 응원할 것이다.


만화는 끝났지만 아이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뒷면에는 최규석 작가의 작업노트가 덤으로 담겨 있다. 이 작품을 기획하게 된 동기부터 작업과정,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과정 등을 재미나게 들려준다. 특히 비교적 짧은 분량이라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수채화 만화를 해볼까 싶어 비싼 종이와 무려 32색의 비싼 물감까지 샀는데 채색 작업 해본지가 오래되어 채색 연습 결과가 개판이라는, 그러나 그 비싼 32색 물감을 버릴 수는 없어 계속 연습을 했다는 부분에서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나를 당황시킨 이책의 큼직한 판형은 이런 눈물나는 사연을 머금고 태어난 수채화 만화이기 때문이라고. 작가의 처절한 고생 덕분에 독자의 눈은 한층 더 즐겁다. 그러기에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그전에 유일하게 아직 만나지 못한 그의 작품 《대한민국 원주민》을 얼른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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