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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산드라의 거울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1월
평점 :
- 카산드라의 거울 1,2 │ 베르나르 베르베르 │ 임호경 옮김, 홍작가 그림 │ 열린책들
얼마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새책 《카산드라의 거울》이 출간됐다. 그리고 정말 오랫만에 그의 책을 다시 만났다. 베르베르를 처음으로 알게 된 책이 언니의 추천으로 읽었던 그의 데뷔작 《개미》였으니 그와 재회하기까지 어느새 적잖은 시간이 흐른 셈이다. 베르베르의 책 중에서 읽은 게 《개미》 밖에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책이 전해준 신선한 충격 때문에 나는 베르베르를 생각할 때면 자연스레 《개미》를 같이 떠올리게 된다. 더불어 세밀한 관찰력과 치밀한 묘사, 놀라운 상상력으로 무장된 박학다식한 작가라는 베르베르의 이미지까지도.
다시 만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지식들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펼쳐내는 그의 이야기는 여전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초반의 지루함 역시 그대로였다. 《개미》에서 또다른 세계와의 연결이라는 열쇠를 보여주기 전의 조용한 되풀이처럼 《카산드라의 거울》에서는 카산드라의 정체와 대속 주민들의 면면을 파악하기까지 펼쳐지는 일련의 과정들이 조금 지난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느 순간 가속도가 붙으면서 앞으로 내달린다. 그리고 곧 베르베르가 선사하는 진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5초 후 사망 확률'을 알려주는 기묘한 시계를 지닌 의문의 청년이 210미터 높이의 몽파르나스 타워 옥상에서 뛰어내리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곧 이책의 주인공 카산드라 카첸버그에게 시선을 돌린다. 17세의 자폐증 소녀 카산드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고대 트로이의 카산드라가 받은 저주처럼 미래를 보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지만 아무도 그녀가 말하는 불안한 미래를 믿어주지 않는다. 어느날 꿈에서 본 테러 사건을 예언하다 이를 저지시키려는 기숙생과 난동을 부린 후 학교를 도망쳐 나온다. 자신을 찾는 경찰을 피해 [시쓰장(시립 쓰레기 매립장)] 울타리 안으로 숨어든 그녀는 곧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들개 무리에 둘러싸이지만, 짐작했듯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을 죽일 수는 없는 법, 대부분의 주인공들처럼 카산드라 역시 절체절명의 순간에 짠~하고 나타난 구원자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난다.
쫓기는 신세에 갈 곳마저 없는 카산드라는 자신을 구해준 오를랑도를 따라 시쓰장 깊숙한 곳에 은폐된 마을 [대속(代贖)]에 이르고, 그곳에서 마을의 또다른 주민이자 노숙자인 에스메랄다, 김, 페트나와 대면한다.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자신들의 구역에 갑작스레 나타나 불길한 예언까지 쏟아내는 이방인에게 대속의 주민들은 격하게 당황하고 만장일치로 그녀를 마을에서 내친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점차 그들은 카산드라를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그녀의 꿈이 말하는 예지를 쫓아 테러 진압을 위해 나선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테러를 막아낸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전재산에 육박하는 벌금과 악취를 풍기는 노숙자를 향한 세상의 차가운 시선 뿐이다. 네 명의 노숙자들은 다시 냉소적으로 변하지만 카산드라는 암울한 미래를 바꾸기 위한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카산드라의 거울》은 미래를 보는 자폐증 소녀 카산드라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세상의 똥구멍'이라 불리는 시립 쓰레기 매립장(시쓰장)에 쌓인 온갖 종류의 쓰레기산은 현대인의 이기주의가 낳은 환경 문제를 건드리고, 자신의 아이까지 실험 대상으로 삼는 카첸버그 부모를 통해 과도한 지성과 과학이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한다.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익명의 목숨을 담보로 삼는 테러가 끊이지 않거나 정의로운 일을 행하고도 겉모습으로 인해 찬사는커녕 오히려 비난을 받는 부당한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기도 한다. 대속의 노숙자들이 비공식 미래전망부를 세우고 가능성의 나무에 '그리고 만약'의 잎사귀를 달기 위해 토론하는 부분에서는 그들의 입을 통해 현대 사회의 온갖 부조리한 이슈들을 토해내며 일침을 가한다.
또한 베르베르는 카산드라와 함께 하는 대속의 노숙자들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규범과 관습에도 어퍼컷을 날린다. 온갖 쓰레기들이 내뿜는 악취로 인해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는 시쓰장의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노숙자들의 마을 대속은 그들만의 유토피아다. 학교나 직장을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교통 체증에 시달리며 지각이나 해고 걱정을 할 필요도 없으며, 실컷 늦잠을 자거나 한껏 게으름을 피워도 괜찮다. 가래침을 뱉고 욕지기를 하며 거리낌없이 트림과 방귀를 방출하며 본능에 충실해도 나무라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똥은 자기가 치운다'라는 마을의 표어 아래 그들은 각자의 임무를 자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시킨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서 버림받은 땅에서 그들은 오히려 가장 자유롭다.
전직 외인부대원인 오를랑도, 왕년에 에로 영화배우였던 에스메랄다, 아프리카에 온 흑인 주술사 페트나, 탈북자 출신의 컴퓨터 천재 김예빈, 그리고 비운의 미래 예언자 카산드라까지 대속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세상에 쫓기거나 버림받거나 소외된 이들이다. 같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미미해 제대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테러를 진압해 세상을 구하고 암울한 미래를 바꾸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 또한 그들이다. 그들을 보며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지만 어쩌면 세상을 움직여 가는 이들은 바로 이런 작은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카산드라의 거울》은 한국인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출간 전부터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비운의 예언자 카산드라와 함께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는 대속 마을의 노숙자 4인방 중 컴퓨터 천재이자 입만 열면 속담이나 격언을 꿰어내는 김예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섣부른 짐작은 금물. 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의 추측과 달리 김예빈은 앞머리 한 가닥을 파란색으로 물들인 건장한 17세의 소년이다. 책에서 베르베르는 카산드라를 비롯해 다니엘, 카첸버그, 필리프 등 온갖 이름의 어원을 파고들며 이야기를 진행시키지만 정작 김예빈이란 한국 이름의 늬앙스는 미처 고려하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는 예빈이란 이름을 중성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더불어 김예빈은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 즉 북한 출신의 탈북자다.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던 한국인이 아나키스트적 성향의 탈북자라는 점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소외되고 불만을 가진 이들이 모인 대속 마을의 노숙자 멤버로 김예빈은 꽤 적합한 내력의 인물이기도 하고, 데뷔작 《개미》 이후 지금까지 한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 베르베르의 한국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캐릭터이기도 하기에 점점 그에게 애정을 갖게 됐다. 후반부로 갈수록 김예빈의 매력이 더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최근 연평도 포격 같은 안타까운 사건이 있긴 했지만 북한 역시 우리 민족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모든 것을 확률로 계산해 내는 천재 수학자이자 미래를 아는 능력까지 지녔지만 다니엘은 자신의 노력이 암울한 미래를 결코 바꾸지 못한다는 비관적인 생각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세상을 등진다. 그러나 카산드라는 그러지 않는다. 자신의 오빠와 달리 그녀는 미래를 보는 특별한 능력 만큼 그에 대한 책임 또한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하는 것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열정을 잃지 않는 것이다'라는 처칠의 격언을 되새기며, 78%라는 지배적인 확률의 비관적인 미래에 포기하지 않고 비록 1.3%의 낮은 확률에도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카산드라와 그녀의 노숙자 친구들의 그런 믿음과 행동들은 유토피아를 향한 확률을 1.5%로 끌어올린다. 베르베르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카산드라를 통해 앎에 그치는 것이 아닌 행동하는 지성, 그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미미할지라도 옳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행동하는 용기를 강조한다. 카산드라와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의 작은 용기와 믿음이 유토피아를 향한 작은 발걸음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거울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게 해주는 도구'라는 카산드라의 깨달음처럼 《카산드라의 거울》은 미래 세대를 생각하지 않는 우리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다시금 되짚어보게 한다. 집시 점성술사 그라지엘라는 '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해내지. 예언이 실제로 실현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야. 그것이 바로 멋진 이야기의 힘이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 역시 카산드라의 예지몽을 통해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미래의 가능성을 향한 낙관적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이책을 통한 베르베르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물론 행동하는 지성이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
- 맞아. 밖에는 여러가지 위험도 있어. 하지만 삶이란 그 위험들을 감수하는 거야. 삶은 모험이고, 실패하고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야. 모험을 하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너희는 좀비로 머물게 돼.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너희는 영원히 노예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단 말이야! (2권 149쪽)
《카산드라의 거울》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개와 카산드라 내면의 독백이 교차되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인물의 내부와 외부를 함께 만날 수 있다. 이야기는 교장 필리프에게 잡히고 도망치고 그에게 얻은 단서로 잃어버린 과거와 몰랐던 오빠의 존재를 찾아가고 대속 마을 노숙자들과 갈등하다 화합하는 구조가 반복되면서 진행되는데 그 과정에 쏟아지는 온갖 언어학적 기원과 세상에 대한 비판과 수많은 정보들이 산만하고 다소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카산드라가 예지력을 갖게 되는 과정과 그녀의 가족사는 여전히 흥미롭다. 결말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카산드라의 거울》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베르베르의 마르지 않는 기발한 상상력과 그것을 통해 세상에 대해 던지는 작가의 메시지가 흥미로운 판타지 소설이었다. 다만 한국어판에만 삽입되었다는 삽화의 효용성은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의문이다.
→ 예약판매로 주문한 책의 앞부분에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인사말과 사인 인쇄본.
'미래에 대한 단 한 사람의 비전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그가 남들의 경청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기꺼이 책임지려고만 한다면' 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사인도 참 멋지다.
근데 재밌는 건 베르베르가 이글을 쓴 날짜가 바로 내 생일이었다는 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