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괜찮아, 미안해 - 가슴에 가시가 박힌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따뜻한 목소리
김희재 지음 / 시공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

- 그래 괜찮아 미안해 | 김희재 | 시공사 | 2010.09 


며칠 전에 안 마시던 술을 한 잔 했다. 기분이 조금 우울하기도 했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했다. 늦은 밤 기꺼이(실은 반색하며!) 나와준 친한 언니와 후라이드 치킨 반 마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생맥주를 홀짝이며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나눴다. 목구멍을 톡톡 쏘는 생맥주의 알싸함과 늦은 밤에 먹는 후라이드 치킨의 고소함이 잡담과 웃음에 뒤섞일 때쯤 무심코 나온 말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눈물이 났다. 조금씩 쌓이던 스트레스가 마음 속에서 부풀어져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았던 상태였다. 그때 언니가 말했다. 괜찮아, 사는 거 별거 아냐, 힘내!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작은 위로의 말 한마디가 그날 내내 흔들렸던 내 마음을 따듯하게 안아줬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우울의 조각이 인생의 어느 순간을 휩쓸 때. 괜히 사소한 일에 날을 세우고 작은 일에 상처받고 힘들어 할 때. 어쩌면 지금의 내가 그런 시기를 겪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몇 년 간 미친듯이 읽어대던 책도 거의 못 읽고 줄기차게 써대던 리뷰도 멈추고 중독처럼 매일 뭐라도 올려야 할 것 같던 블로그도 내버려둔 채 모든 것을 놓고 한참을 밑바닥으로 침잠했다. 지금은 조금이나마 나아지고 있지만 고민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마음이 이렇듯 어지러운 까닭에 요즘은 이런 스산함을 감싸줄 수 있는 따듯한 책을 찾아 읽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 김희재의 에세이 《그래, 괜찮아, 미안해》를 만난 것도 그런 인연이었다.



《그래, 괜찮아, 미안해》에는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딛고 자수성가로 성공한 그녀, 가세가 기울어 어린 나이부터 가장의 책임을 떠안아야 했던 그, 거절하지 못해 온갖 일과 책임을 떠맡는 그녀, 앞날이 전도유망한 젊은이에서 사회의 주변인으로 변한 그, 언제나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친절한 그녀, 아무 때나 버럭버럭 화를 내는 그, 무거운 것도 번쩍번쩍 드는 천하장사 그녀, 유난히 밥을 빨리 먹거나 외모에 신경을 안 쓰거나 이기적이거나 지독한 개인주의자이거나 막장 드라마를 좋아하거나 이젠 음치가 되어 노래를 못 부르는 그와 그녀 들의 등장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그들이 거쳐온 삶의 사연과 겹겹이 숨겨진 속내를 끄집어낸다. 어렸을 때 죽은 형을 대신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앞만 보고 달려온 사업가, 아픈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대신하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아내, 도박에 빠진 아버지 때문에 돈을 버느라 자신의 꿈을 뒤로 미룬 딸, 평생을 바친 자신의 분야를 제대로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배우, 시대의 아픔 때문에 자신의 꿈을 빼앗기고 적응하지 못한 화가, 사랑받지 못하고 살았기에 사랑하기를 겁내는 여자, 부모에게 버림받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느라 남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남자 등 제각기의 삶에서 닥친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느라 생겼던 마음의 상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통해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상처입은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던 저자는 독자에게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작은 제안을 한다. 그런데 그 제안이라는 것이 얼핏보기엔 참 뜬금없어 보인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저당잡힌 걸 생색내는 그녀에게는 쓸데없는 책을 선물하라거나, 시시때때로 툴툴대는 아버지와 아들을 위해 사과주스를 만들어 주라거나, 지독한 개인주의자인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라거나, 막장 드라마를 좋아하는 그에게 이벤트를 해주라거나, 언제나 웃는 그녀에게 존경한다고 말해주라거나 까칠 대마왕에게 박수를 쳐주라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외로운 그녀를 꼭 안아주라거나 밥을 생계수단으로 여기는 그에게 먹는 즐거움을 알려주라거나 가꿀 겨를이 없는 그녀에게 옷을 선물하라는 상식선 안의 제안도 많다.

그런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보면 황당하게 보이던 그 제안들이 조금씩 이해가 된다. 쓸데없는 두툼한 책은 그녀에게 다른 꿈을 꿀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르고, 강판으로 정성스레 갈아만든 사과주스는 어머니의 부재로 불안했던 그들의 마음을 약간이나마 위로해줄 것이며, 소소한 이벤트는 막장 드라마가 아닌 자신의 평범한 삶을 사랑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전화나 문자가 아닌 몇 번이고 다시 되새겨 읽을 수 있는 편지로 그녀의 닫힌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고, 먹을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이기적인 그에게 배려의 마음을 알게 해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조금 벗어난 저자의 작은 일탈 같은 제안은 삶에 찌들고 짓눌렸던 그네들에게 생각지 못한 기쁨을 안겨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힘들 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역시 곁을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너를 이해한다는 따듯한 눈빛과 혼자가 아니라는 진심이 담긴 한 마디는 그 어떤 화려한 말보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얼마전 한 예능 토크쇼에는 인생의 굴곡을 겪은 개그맨 선후배들이 게스트로 함께 했다. 제각각 크고작은 삶의 상처를 안고 사는 그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평소 김제동 어록이 있을만큼 뛰어난 입담을 자랑하는 김제동은 그날 자신에게 힘이 된 위로의 말로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에서 심리상담을 맡은 숀 맥과이어 교수가 세상에 벽을 쌓고 마음의 문을 꽁꽁 닫은 윌 헌팅에게 계속해서 힘주어 반복해서 하던 그 말, "it's not your fault"를 꼽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라는 그 단순한, 그러나 진심이 담긴 이 한 마디는 결국 영화 속 철옹성 같던 윌 헌팅의 마음을 완전히 무장해제시켰고,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막연한 죄책감을 느끼던 어린 김제동에게도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삶을 힘들어하는 이에게 진심을 꼭꼭 담아 이 한 마디를 해준다고 한다. it's not your fault,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이책 《그래, 괜찮아, 미안해》 역시 마음의 상처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그렇게 말을 건넨다. 괜찮아요,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라고.



시나리오 작가 김희재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영화 《실미도》가 소송에 휘말려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시나리오 집필이 아니라 각색으로 참여해 소송에서 한 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인터뷰 내용의 기사였는데, 남성 영화의 특성상 당연히 남자일 거라 추측했던 작가가 여자라는 사실은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했고. 강우석 감독과 《실미도》, 《공공의 적2》, 《한반도》를 함께 작업한 그녀이지만, 그녀의 필모그래피에는 그녀와 같은 이름의 주인공이 나오는,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배우 장진영이 연기했던 감성적인 영화 《국화꽃 향기》도 올라있다.

영화 화면을 통해 만나던 그녀의 이야기를 텍스트를 매개로 하는 책으로 접하는 건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오랜 경력의 시나리오 작가답게 각 에피소드들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영상화됐고, 짧은 이야기지만 그속에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게 했다. 제각각 펼쳐내는 이야기들이 가끔은 너무 영화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각색이든 창작이든 이야기의 본질은 우리 삶과 겹쳐있다는 점에서 소소한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더불어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상처를 조금 더 생각하게 되었다. 시나리오 작가에서 저자로 변신했던 그녀의 다음 도전은 《더 뮤지컬》이란 뮤지컬 드라마란다. 다재다능한 배우로 자리매김한 구혜선과 떠오르는 기대주 최다니엘이 주연을 맡아 뮤지컬 배우들의 꿈과 사랑을 그린다고 하니 벌써부터 살며시 기대가 된다.



- 마음의 마사지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신경쇠약이나 정신분열이나 인격 장애… 이렇게 적극적인 치료를 필요로 하는 병은 아니지만 어떤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위한 '어루만짐' 말입니다. 몸의 뭉친 곳을 알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여기저기 눌러보듯, 마음의 역사 어딘가에서 시작된 상처를 더듬어갈 때까지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생각하고 그리고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중략) 여린 살이 더 잘 뭉치고 더 깊이 상처가 나듯, 착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착하고 싶은 마음이 강할수록 인내해야 할 고통도 큰 것 같았습니다. (중략) 그들의 등 한복판에 볼록 솟은 굳은 살이 풀릴 때까지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꾸준히 어루만져 주어야 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우리'고 '우리' 속에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中)

《그래, 괜찮아, 미안해》에 나오는 이들과 그들을 옥죄던 삶의 굴곡들은 특별한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보편적으로 느껴진다. 그건 드라마틱하게만 보이는 그들의 사연에서 평범한 우리들의 삶의 조각이 하나둘 겹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겉보기엔 아무 문제없이 지내는 듯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크고 작은 내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저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방치하지 않고 조금씩 어루만지고 보듬어 그것들을 치유하기를 권한다. 몸의 근육이 뭉치면 마사지로 풀어주듯이 마음의 근육 또한 위로라는 작은 어루만짐으로 풀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괜찮아, 힘내, 라는 짧은 말 한 마디가 흔들리는 내 마음을 붙잡아 주었듯이 끊임없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책은 상처로 뭉쳤던 마음의 근육들을 조금씩 풀어준다. 《그래, 괜찮아, 미안해》는 삶에 지쳐 힘든 이들에게 따끈한 위로를 건네는 에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