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가위는 앞뒤로 걸리는 징검다리 연휴가 된 까닭에 더욱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기막힌 연휴를 이용해 여행을 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많지만 아직 그런 여유는 안 되고, 그냥 조용히 주변을 배회하며 보냈다. 그저 책을 읽고 집근처 영화관에서 개봉영화를 훑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드라마 DVD를 봤다. 다른 때처럼 하루종일 인터넷에 들어가 살지 않은 점은 기특하지만 어쨌거나 이번에도 영락없이 폐인 모드였다는 건 마찬가지;; 이번 연휴를 포함 전후로 본 책과 영화, 드라마를 그냥 한번 정리해봤다. ㅎㅎ
연휴가 시작되기 좀전부터 읽기 시작해 연휴 마지막까지 읽은 책들이 대략 7권. 이석원 산문집 《보통의 존재》는 아직 다 못 읽었으니 6.5권 정도 되려나. 《보통의 존재》와 《심야식당 1》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설이다. 그것도 한국소설. 특별히 한국소설을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요즘 내 취향이 나도 모르게 반영된 모양이다. 여튼 마음이 심란할 때는 그저 푹~ 빠져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최고다. 잘 안 읽는 추리소설로 시작해 좀비, 암살자, 속물 등 그 등장 면면도 다양했다.
모두 제각각의 재미를 주는 즐거운 책들이었는데, 그중 가장 좋았던 책은 김중혁의 신작소설 《좀비들》과 이석원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 두 권을 꼽으련다. 하지만 평소 좋아하는 작가인 김언수의 《설계자들》과 오현종의 《거룩한 속물들》 또한 재미있었고, 처음 듣는 작가였지만 도진기의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의 《어둠의 변호사 - 붉은집 살인사건》과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도 흥미진진했다. 우연히 듣게 된 평이 좋아 구입한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은 나쁘진 않았지만 조금 단조로운 느낌이었다.
김중혁의 《좀비들》은 두 권의 단편집을 펴낸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전작 《악기들의 도서관》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펭귄뉴스》는 덜 읽은 책을 다른이에게 줘버리는 바람에 아직 완독을 못했다; - .-;;) 또 얼마전에 김연수와 함께 쓴 영화 에세이 《대책 없이 해피엔딩》도 너무 즐겁게 읽었던 터라 신작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주문해서 도착하자마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제목은 내 취향이 아닌 《좀비들》이지만, 띠지의 카피처럼 이책은 좀비가 아닌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김중혁 작가 특유의 엉뚱한 상상력과 사람에 대한 따듯한 시선이 잘 녹아있는 소설이다. 마지막 장면은 아, 정말..!
이석원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는 이번 연휴에 읽은 유일한 산문집이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종종 들었던 라디오를 통해 밴드 '언니네 이발관'은 알고 있었지만 리더 이석원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처음 이책이 나왔을 때는 연예인들이 내는 책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건 정말 편견이었다. 쉽게 꺼내놓기 힘든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농밀한 내면의 이야기를 건네기에 이책은 더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지만 사실은 내 안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조용히 가라앉아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읽기 좋은 산문이다. '사랑스런 산문집'이라는 이기호 님의 표현이 딱 맞는 책.
김언수의 《설계자들》은 이번 연휴에 읽은 책들 중에 유일하게 도서관에서 빌린 책. 질러놓고 읽지 못한 책들이 너무 많아 미처 지르지 못하고 찜만 해둔 채 바구니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우연히 마실 간 도서관 신작코너에 꽂혀있는 이책을 발견하고는 충동적으로 대출해와 바로 읽어버렸다. 사놓은 내 책은 안 읽고 빌려온 책을 먼저 읽는 이 심보는 무엇인고..;; - .-; 여튼 이책은 내게는 조금 특별한 책인, 《캐비닛》으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김언수님의 신작 소설이다. 암살자들의 세계를 다루며 그안에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담아낸 《설계자들》은 유쾌한 상상력의 《캐비닛》과는 또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거룩한 속물들》은 단편집 《사과의 맛》으로 내게 그 이름을 각인시킨 오현종의 소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 엮어가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그들이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껴지면서도 그들 위에 겹쳐지는 우리의 모습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명품백에 비싼 브런치, 백화점 쇼핑 등 여느 칙릿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진짜 속물이 되고자 발버둥치던 여러 인물들은 각자의 시련을 통해 조금씩 성숙해지는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술술 잘 읽히는 이책의 아이러니한 제목은 김수영 시인의 산문 《이 거룩한 속물들》에서 가져온 거란다.
피 보는 걸 별로 안 좋아해 영화도 호러나 스릴러 장르는 잘 안 보는 나는 비슷한 이유로 추리소설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추리소설이라는 것이 또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것!!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두 권의 추리소설을 이번에 만났으니 바로 도진기 작가의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1,2권이다. 현직 판사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도진기 작가는 수수께끼 풀이와 트릭 위주의 미스터리 소설을 지향한다고.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는 전직 판사 출신의 변호사 고진이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추리소설을 많이 읽진 않았지만,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이 아닐까 싶다. 현재 1권 《어둠의 변호사 - 붉은집 살인사건》과 2권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이 나와 있다.
나는 일본 만화책은 잘 안 보는 편이다. 더구나 이제껏 한번도 사본 적도 없다. 그런데 우연히 기사로 접한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에 대한 평이 너무 좋아 구미가 확~ 당겼다. 밤에만 문을 여는 식당에 눈에 칼자국이 있는 주인이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으러 모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작가는 밤에 식당으로 모여드는 손님들을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펼쳐낸다. 재미와 적절한 감동이 있다. 그러나 기대를 너무 컸는지,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생각보다 단조롭고 간략해서 기사평의 벅찬 감동까지는 느낄 수가 없었다. 1권만 먼저 주문해서 읽어보길 다행인 듯. 괜찮았으나 강추해줄 정도는 아니라는 게 개인적인 단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