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은행 통장
캐스린 포브즈 지음, 이혜영 옮김 / 반디출판사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 엄마의 은행 통장 │ 캐스린 포브즈 │ 이혜영(옮김) │ 반디출판사 │ 2009년 3월 


어처구니없게도 처음엔 《엄마의 은행 통장》이란 책제목만 보고는 이책이 재테크 서적인줄 알았다. 《4개의 통장》, 《은행의 사생활》처럼 요즘 인기있는 재테크 서적의 제목에서 흔히 만나는 단어가 '은행'이나 '통장'이라 이책 역시 제목만 보고 혼자 지레짐작을 해버린 것이다. 책소개를 읽어본 후에야 소설이라는 걸 알고는 엉뚱한 오해에 겸연쩍어 혼자 히죽 웃었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내 오해와는 상관없이 이책은 예전에 읽었던 《노란 코끼리》처럼 마음이 훈훈해지는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 따듯한 책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은행 통장이라고 하니 내손으로 만든 첫 통장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친구따라 간 우체국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통장 첫장에 박혀 있던 내 이름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과 심부름값 등 한푼두푼 모은 돈을 들고 열심히 우체국을 드나들었다. 점점 늘어나는 통장의 숫자들을 보는 재미와 뿌듯함에 가끔씩은 부모님 몰래 문제집값과 학교 우유 급식비까지 빼돌리며(?) 저축에 열을 올렸고, 덕분에 1년 후 내 통장에는 꽤 큰돈이 모였다. 그걸 보며 순전히 내 힘으로 모았던 돈이었기에 뿌듯했고, 또 괜시리 마음이 든든했던 기억이 난다. 은행 통장에는 그런 힘이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것을 버틸 수 있는 든든함 같은 힘. 《엄마의 은행 통장》의 카트린의 가족에게도 은행 통장은 그런 의미였다.

모두가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 카트린의 가족에게도 그들의 마음을 지켜주던 엄마의 은행 통장이 있었다. 평소에 조금씩 모아 두었다가 비상시에 사용하는 '작은 은행'과 시내에 있는 '큰 은행'이 그것이다. 웬만한 일들은 집에 있는 '작은 은행'으로 해결했고, 정말 어쩔 수 없는 비상 사태를 대비한 마지막 보루로 시내의 '큰 은행'을 남겨두었다. '큰 은행'은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힘이 되었고, 그러한 '예금 통장'이 있었기에 카트린 남매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에도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나 작가가 된 카트린이 첫 원고료로 받은 수표를 엄마에게 내밀며 은행에 예금하시라고 말씀드리자 엄마는 카트린에게 조용히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은행 통장 같은 건 없었다고,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말이다.

《엄마의 은행 통장》에는 모두 17개의 에피소드들이 담겨있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의 이야기는 이책의 첫 번째 에피소드이자 소설이 지향하는 바를 확연히 보여준다. 작은 소녀였던 카트린은 일상의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엄마가 있다. 온화하지만 확고한 신념이 있고 가족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긍정의 힘을 가진 엄마가 있다. 욕구를 자제하지 못해 사탕을 훔쳐먹은 아이를 야단치기에 급급하기보다는 그 부끄러운 기억으로 평생 창피해 하며 자신을 학대하지 않게 마음을 보듬어주는 엄마, 사이가 좋지 않아 티격태격하는 이모와 이모 할머니의 오해를 풀고 화해하게 만드는 엄마, 아픈 딸과 남편을 보며 발을 동동 굴리다 그들을 위해 힘껏 용기를 내는 엄마, 그리고 항상 가족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배려깊은 엄마가 말이다.

"하지만, 엄마. 전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아, 엄마, 전 너무 창피해요!"
"창피한 것은 좋은 거야. 네가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도록 만드는 것이 창피야. 하지만 카트린, 창피와 슬픔을 느낄 때, 그런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웃음이라는 걸 모르겠니? (중략) 이젠 너도 웃을 수 있지? 그리고, 네가 한 이 일이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니? 네 가슴 속에서 '도둑'이라고 항상 외치는 목소리 없이 살아 나갈 수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전, 맙소사..."
"바보 같았지. 그리고 무척 나쁜 짓을 했어. 그리고 네가 먹은 캔디 값은 치러야 한단다. 하지만 너는 불량한 것은 아니었어."
(187쪽, ‘창피와 슬픔을 이겨내는 법’ 中)


카트린 가족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며 끌어들이는 사건을 바탕으로 이어가는 짤막한 이야기들은 참 따듯하다. 너무 따듯해서 꼭 동화를 읽는 느낌이다. 그러나 제각각 이야기를 품는 옴니버스 형식이라 짧은 분량에 하나의 사건을 풀어내려다 보니 가끔 구성이 너무 단조롭거나 엉성할 때도 있고, 때론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가 너무 교훈적이라 조금 식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이책이 씌여진 시기가 경제대공황과 제 1차 세계대전을 겪던 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재앙과 같은 일들을 연이어 겪으며 심신이 피폐해져 있던 미국인들의 마음을 보듬어주기엔 이런 따듯한 이야기가 제격일 테니 말이다.  

이민 1세대의 가난한 가족이 엮어가는 소박한 이야기들을 통해 삶의 따듯함과 사람에 대한 믿음,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담아내는 《엄마의 은행 통장》은 소녀 카트린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성장소설이다. 동시에 언제나 사랑하는 가족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그녀의 엄마, 그리고 우리 모두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누구보다 용감해지는 카트린의 엄마를 보다 보면 자연스레 곁에 계신 나의 엄마가 겹쳐졌다. 엄마가 우리 가족을 위해 시도때도 없이 용기를 내셨던 수많은 순간들도 함께. 조금은 엉성하고 조금은 단조롭지만 그안에 마음을 데워주는 훈훈함이 있는 《엄마의 은행 통장》은 점점 메말라가는 어른들을 위한 작은 동화집이다. 가정의 달 오월을 맞아 그 따듯함을 한 번 느껴보아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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