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요시다 슈이치의 단편집 <도시여행자>를 읽었다. 담백한 이야기들이 좋았다.
그래서 내가 여행한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들을 간략히 정리해 봤다. :)
워터 / 북스토리 / 2005
요시다 슈이치를 처음으로 만났던 건 그러니깐 그의 중편집 《워터》를 통해서였다. 하릴없이 도서관 책장을 기웃거리다 신간코너의 꽂혀있는 파란색 제본의 작은 양장본을 집어들었다. 한창 일본소설이 붐을 일으키던 때라서 작가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저 일본소설 한번 읽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대출했는데, 그책이 바로 《워터》였다. 그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한동안 뜸했던 도서관을 다시 드나들면서 《상실의 시대》, 《키친》, 《공중그네》 등의 일본소설을 만나기 시작했던 2006년 쯤이 아니었나 싶다. (방금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대출 내역을 찾아보니 정확히 05년 말에서 06년 초였다. ;)
워터, 최후의 아들 / 북스토리 / 2007
2005년에 내가 읽었던 《워터》는 두 편의 중편 「워터」와 「최후의 아들」로 함께 있던 중편집이었는데, 지금 다시 찾아보니 그책은 절판되었다. 대신 2007년에 《워터》와 《최후의 아들》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각각 재출간되었는데, 《최후의 아들》에는 단편 「파편」이 같이 수록되어 있단다. 그리고 이번에 알았는데, 《최후의 아들》은 제84회 문학계 신인상을 수상한 요시다 슈이치의 데뷔작이라고.
사실 한 권에 묶기에는 두 편의 중편의 성격이나 분위기가 너무 다르긴 했다. 《워터》는 수영을 소재로 최고기록에 도전하는 4명의 고딩 소년들이 엮어가는 발랄하고 유쾌한 성장스토리로 그 제목처럼 여름날 시원한 물이 주는 청량감을 주는 소설이었다. 반면 《최후의 아들》은 주위로부터 소외받고 외면받는 성적소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소 어둡고 진지한 이야기라 읽을 때도 읽은 뒤에도 마음 한 켠에 답답한 짓누름이 남았던 이야기였다.
어쨌거나 <워터>는 내가 가장 먼저 만났던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이었다. 그러나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기 전에도, 그리고 읽은 후에도 이책의 작가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중편집 <워터>가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이라는 것은 한참이 지난 후에 우연히 그의 작품 목록을 살피다가 발견했다. <워터>의 상큼함이 되살아나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여튼 우연히 읽은 <워터>의 그 이름모를 일본 소설가가 요시다 슈이치였다는 사실은 잠깐이나마 즐거운 사건이었다.
나가사키 / 밝은세상 / 2006.12
<워터>의 존재를 뒤늦게 알았기에 <나가사키>는 요시다 슈이치라는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읽은 첫번째 작품이었다. 이책 또한 200쪽이 조금 넘기는 꽤 얇은 소설이었는데, 책두께와 달리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요시다 슈이치의 고향이기도 한 나가사키를 제목으로 삼은 이책은, 나가사키의 과거와 현재를 한 야쿠자 집안의 흥망성쇄를 통해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워터>의 청량감이나 <최후의 아들>의 무거움과는 달리 <나가사키>에서 그의 문체는 건조하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풍랑을 잘 이용해 번창했던 야쿠자 가문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그라드는 모습을,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차분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풀어나간다. 너무 잔잔해 솔직히 초반에는 조금 지루하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짠한 감동을 전해주며 옛날 영화 같은 아련함을 남기는 책이었다.
악인 / 은행나무 / 2008.01
요시다 슈이치 하면 생각나는 대표작품으로 많은 이들이 일본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던 <동경만경>이나 그의 첫 장편소설이자 제127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그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퍼레이드>를 많이 꼽는 걸 봤다. 하지만 아직 그 작품들을 만나보지 못한 터라 함께 공감할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이책과 함께 그의 대표작에 또다른 책이 추가되었다. 바로 2008년 초에 출간된 <악인>이다. 그리고 나 역시 <악인>을 읽은 후 점점 줄여가고 있던 일본작가 목록에 요시다 슈이치를 올려놓게 되었다. 그만큼 강렬하고 인상적인 책이었다.
<악인>은 하나의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인물들과 상황을 통해 인간 내면에 숨어있는 악의를 담담하고 건조한 문체로 풀어낸 소설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몇 읽지 않았지만 <악인>은 전보다 한결 자극적인 소재와 진지한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단순히 악인으로 점찍혔던 범인의 숨겨졌던 속사정이 드러나고 선량한 보통 시민인 그들의 숨겨졌던 악의를 발견하게 되면서 독자들은 누가 진정한 악인인지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된다. <악인>은 '일본 신문ㆍ잡지 서평담당자가 뽑은 2007 최고의 책' 1위에 올랐으며,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적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도시여행자 / 노블마인 / 2010.03
올해 출간된 요시다 슈이치의 신작 단편집, <도시여행자>. 이책에는 작가가 등단 이후 10년 동안 틈틈이 쓰고 발표했던, 각기 다른 10개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10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열 편의 이야기는 제각각 다른 맛을 내보이는데, 그속에 녹있는 10년이란 세월을 생각할 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열 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도쿄, 오사카, 상하이, 서울 등 다양한 도시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공간도 인물도 주제도 분위기도 모두 다르지만, 무심코 지나가는 일상의 미세한 순간 또는 감정들을 잡아내어 담담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내는 그의 문체가 주는 맛은 여전하다. 옮긴이는 그런 일관된 기조를 '요시다다움'이라고 표현하는데, 이책을 읽다보면 그말에 동조하게 된다.
이책의 원제는 마지막 열 번째 단편인 「캔슬된 거리의 안내(キヤンセルされた街の案內)」와 같다고 한다. 그러니 <도시여행자>라는 제목은 우리나라에서 지은 제목일 게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원제보다 우리말 번역판 제목이 이책과 더욱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하드커버에 지도를 그려넣은 표지 디자인 또한 책과 잘 맞아떨어진 듯하다. 재미있는 건 커버의 지도를 자세히 보면 각 단편에 등장했던 장소들이 여기저기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각 단편마다 그 장소를 찾는 즐거움이 덤으로 주어진다. :)
이제껏 내가 읽었던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이 전부 5종 4권에 불과하다는 점은, 작가의 인기나 지명도에 비해서는 조금 놀라운 수치였다. 하긴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엄청난 수의 작품을 쏟아낸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도 아직 한 권 밖에 만나지 못했으니 그리 부진한 성적이 아닐런지도 모르겠다.
남자 작가지만 여자 작가들 못지 않게 소소한 이야기를 섬세하게 풀어내는 요시다 슈이치의 책은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그만의 매력을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한데 모아둔 그의 작품들을 보니 궁금해지는 책이 점점 늘어난다.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동경만경>, <퍼레이드>은 물론 전부터 궁금했던 <일요일들>, <사요나라 사요나라>, <요노스케 이야기> 등도 언젠가 인연이 닿는 날이 있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
그나저나 이글을 읽는 당신~
그동안 요시다 슈이치의 어떤 책들을 만나보셨는지, 어떤 책을 추천하고 싶은지
제게 살짝 알려주시지 않으실런지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