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신사들
마이클 셰이본 지음, 이은정 옮김, 게리 지아니 그림 / 올(사피엔스21)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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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의 신사들 | 마이클 셰이본 글, 게리 지아니 그림 | 이은정 옮김 | 사피엔스21 | 2010.02 


쉬지 않고 여행자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구관조가 있는 한 여인숙의 시끄러운 식당에서 구리빛 피부의 거대한 아프리카인과 잘 차려입은 깡마른 백인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다. 곧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늙은 흑인 암람과 가느다란 랜싯을 움켜쥔 젊은 백인 의사 젤리크만은 결투를 벌이고, 그들의 싸움에 판돈을 건 구경꾼들은 제각각 싸움의 결과를 예측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나 한 눈에 이들이 판돈을 노리고 거짓 결투를 하는 사기꾼임을 간파한 늙은 코끼리 조련사 마하우트는 은밀히 그들을 찾아가 새로운 돈벌이를 제안한다. 바로 자신이 데리고 있는 소년 필라크를 그의 외할아버지에게 무사히 데려다주는 조건으로 짭짤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것이다.

노인이 데려온 소년 필라크는 사실 유대왕국 하자르 왕의 아들이나 불잔의 쿠데타에 의해 부모를 잃고 형제들과도 헤어져 추적자들을 피해다니는 도망자 신세에 다름 아니었다. 어리고 연약한 소년은 복수를 위해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노인은 그를 안전한 외가로 데려다 줄 것을 암람과 젤리크만에게 부탁하고, 그들이 일을 맡을 건지 결정도 하기 전에 노인은 정체불명의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둔다. 얼결에 소년을 떠맡게 된 사기꾼 콤비는 길을 나서지만 복수를 행하려는 비운의 왕자와 그들을 뒤쫓는 불잔의 군대, 그리고 라디니크와 카간 등 여러 사람이 관계되면서 그들의 모험은 점점 복잡해지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길 위의 신사들』은 중세 아랍의 유대왕국 하자르를 배경으로 두 사기꾼 콤비의 여정을 그린 모험소설이다. 거대한 몸집과 엄청난 힘을 자랑하는 전직 군인인 늙은 흑인 암람과 보기에 바짝 마른 몸에 우울한 낯빛을 가졌지만 다친 사람만 보면 치료를 겁내지 않는 전직 외과의사이자 젊은 유대인인 젤리크만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듯 기묘하게 어울리는 두 사기꾼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모인 여인숙에서 가짜 결투쇼를 벌여 판돈을 챙기거나 도둑의 물건을 다시 도둑질하며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평범한 노상강도였으나 얼떨결에 비운의 왕자 필라크에게 엮이면서 그들의 운명도 함께 피곤해진다. 쿠데타를 일으킨 불잔과 그에게 복수하려는 필라크, 세속과 정신을 각각 지배하는 베크와 카칸의 이중체계, 그리고 필라크의 비밀 등이 하나둘 풀리면서 이야기는 점점 복잡해진다.

사기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의 제목이 왜 뜬금없이 『길 위의 신사들』인가 의아했다. 아마 이책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이런 의문은 곧 그들의 대화를 통해 풀린다. 젤리크만을 가르켜 도둑치고는 유식하다고 하자 하누카는 '도둑이 아니라 길 위의 신사'라며 필라크의 표현을 정정한다. 그리고 여기에 달린 주석에는 '길 위의 신사'란 노상강도를 뜻한다고 적혀있다. 우리가 도둑을 가리켜 우스개소리로 도선생, 밤손님 또는 양상군자(梁上君子)라고 부르는 것처럼 작가 또한 노상강도인 두 사기꾼을 빗대어 '길 위의 신사들'라고 표현한 것이다. 일종의 언어유희인 셈. 비록 누군가를 속이고 물건을 훔치는 사기꾼들이지만, 필라크를 구하기 위해 적진에서 몸을 던지는 암람이나 아무 상관없는 부상병들을 치료해주는 젤리크만의 또다른 행동들은 그들을 '길 위의 신사들'이라고 부르는 데 동조하게 한다.


외국의 역사소설을 읽다보면 처음 얼마간은 몰입이 쉽지 않은데 대부분 그들의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의 부족 때문인 경우가 많다. 중세 유대왕국 하자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프랑크인, 유대인, 노르드인(루스족) 등 여러 인종의 출현은 헛갈렸고, 이야기의 주무대인 하자르 왕국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런 독자들을 위해 책의 앞뒷면에 하자르 왕국이 존재했던 시대의 지도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하자르 왕국은 내겐 여전히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하자르 왕국은 한때 아랍의 한가운데 위치해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받아들여 번성했으나 멸망 후 그들에 대해 남겨진 것이 없어 후대에는 잊혀진 왕국이 되었단다. 자신도 유대인인 작가는 이 잊혀진 유대왕국을 배경으로 칼잡이 사기꾼 유대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모험 소설을 그려낸다.

모험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길 위의 신사들』에는 긴장감 넘치는 액션장면보다는 상황이나 인물의 심리 등에 살피는 정적인 느낌을 주는 장면들을 더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스릴 넘치는 전개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그들의 이야기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또한 문장에서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미려한 수사어구나 장황한 묘사들을 자주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이 작가의 특징이란다. 그래서 옮긴이는 작가가 쓴 예스러운 표현과 화려한 묘사를 위해 특별히 리듬에 신경을 쓰며 번역을 했단다. 수사가 긴 문장보다는 간결하고 담백한 글을 즐기는 나는 안타깝게도 그 세심한 리듬감을 거의 즐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장황한 묘사 속에 숨어있는 작가의 언어유희를 알아본다면 이야기가 조금 더 즐거워질지도.


책의 말미에 있는 「작가 후기」나 「옮긴이의 글」을 읽다보니 이 소설에 있어 '검을 든' 유대인 주인공의 출현은 이책의 큰 감상 포인트인 듯하다. 정작 나는 그점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책을 읽었기에 5장에 달하는 분량의 대부분을 유대인 이미지의 전복에 대해 열변하는 작가후기를 읽고는 다소 당황했다. 서양에 비해 유대인과 유대문화를 직접적으로 접할 일이 없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성과 나의 예리하지 못한 분석력 때문이라 생각한다. 여튼 작가가 원래 이책의 제목을 '검을 든 유대인'이라고 정하려 했으나, '검'과 '유대인'의 조합이 아이러니하다는 주위의 만류로 결국 바꾸었다고 하니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편견을 대충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와 책 속 유대인 주인공 이미지를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가 될 듯하다. 

이책이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보니 문장 중간에 주석 표시가 많이 달려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석을 그 문장이나 단어가 있는 페이지의 아래가 아닌 책의 맨 뒷부분에 같이 모아두었다. 편집자가 어떤 의도로 이렇게 편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낯선 단어들이 등장할 때마다 주석을 보기 위해 책의 뒷부분을 펼쳐 따로 찾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이야기의 흐름이 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궁금증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다른 대부분의 책들이 그러하듯, 주석을 본문에 배치해 주면 어떨까. 작은 배려가 아쉬운 대목이다.   


한 소년을 외가에 데려다 주는 것에서 시작한 그들의 모험은 필라크의 주동에 휘말려 여러 싸움과 전투를 거치고 그로 인해 위험에 빠지기도 하나 하자르의 최고 권력자인 베크와 카칸과 만나고 그들과 맞서 싸움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크게 일조하며 끝이 난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조금씩 성장한다. 여린 소년이었던 필라크는 그들과의 모험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베크와 카칸의 이중 지배체계와 성별의 벽까지 뛰어 넘어 하자르의 새로운 지도자 된다. 그리고 자신의 딸처럼 연인처럼 필라크를 보살피며 함께 하던 암람과 젤리크만 콤비는 그 시간들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다시 길 위의 신사들이 되어 새로운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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