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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 | 임영태 | 뿔(웅진) | 2010.02
처음에는 솔직히 큰 기대를 안 했다.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제목이 궁금증과 동시에 약간의 염려를 낳기도 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도처에 깔린 쓸쓸함의 이면에는 그것을 어루만져 주는 따듯함이 있고 담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는 때때로 의외의 긴장감을 서릴 때도 있다.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가 살아온 삶을 복원하고, 그 속에서 담긴 그리움과 사랑, 절망과 희망은 마음 한 켠을 짠하게 만든다. 1억원의 고료가 걸려있는 ‘제 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에 빛나는 임영태의 장편소설 『아홉 번 째 집 두 번째 대문』이 바로 그 소설이다.
그 남자의 직업은 대필 작가다. 다른 이의 삶의 경험들이 그를 통해 글로 새겨진다. 자서전에서부터 전국 도보 여행기까지 다양한 인생들이 그의 손을 통해 글로 꾸려지고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온다. 물론 책에는 그의 이름 대신 의뢰인의 이름이 찍혀있다. 그는 얼굴없는 그림자 작가다. ‘제 3의 작가’라는 이름이 걸린 그의 반지하 사무실은 작업과 숙식을 함께 해결하는 공간이다. 걸려오는 의뢰 전화를 받고 대필 원고를 쓰고 담배 한 대 피우며 창 밖을 바라보다가 동네의 익숙한 골목길을 산책하기도 한다. 끼니는 라면이나 달걀 프라이로 대충 때우거나 근처 식당에서 해결하며 가끔은 골목 술집에서 막걸리를 한 잔 걸치기도 한다. 반지하 사무실 만큼이나 그의 삶도 퍽퍽하다.
비슷비슷하게 반복되던 그의 무미건조한 일상은 어느날 아침 한 노신사의 방문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소설로 쓰되 노신사가 아닌 그 남자의 이름으로 출판하길 원하는 그의 독특한 계약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쯤에서 나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주인공이 노신사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며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평이한 기대를 가뿐하게 배반한다. 대신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카드를 내민다. 도시를 떠도는 죽은 자들의 영혼과 아내가 죽은 후 그들을 보게 된 그 남자를, 그것을 매개로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이 엮어내는 과거의 묻어뒀던 이야기들을.
대필 의뢰를 받고 원고를 쓰고 마트를 다녀오고 라면을 끓여먹는 그의 단조로운 일상의 시간들은 시골에서 아내와 태인이와 함께 보냈던 또다른 시간들과 함께 진행되면서 그 남자의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보여준다.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에 내려간 그들 부부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진돗개 태인이는 그들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태인이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은 그들의 삶을 뒤흔들며 아내의 죽음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그렇게 과거의 시간들은 그가 되돌아가고 픈 가장 행복한 순간이자 동시에 그것들이 깨진 상처의 시간이다. 독자들은 쓸쓸한 남자의 일상에는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내면에 깔려 있었음을 눈치채게 된다.
소설을 이루는 주된 정서는 쓸쓸함이었다. 반복되는 그의 일상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진 듯 허전함이 감돌았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그의 모습은 세상에 홀로 남은 외로움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대필 작가라는 직업도 일 자체의 기쁨보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가까울 뿐이다. 담담한 문체가 주인공의 쓸쓸함을 더욱 진하게 전해준다. 외롭고 쓸쓸한 그 남자의 모습은 죽은 후에도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죽은 자들의 영혼과 겹쳐지고, 삭막한 도시에서 관계를 단절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세상 속에 혼자 남은 그의 쓸쓸함에 이토록 마음이 짠한 건 그에게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
그러나 『아홉 번 째 집 두 번째 대문』은 그런 쓸쓸함의 정서에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랑하는 아내와의 극적인 해후를 통해 그의 상처를 보듬고 따듯하게 어루만져 주는가 하면, 궁금증을 유발한 채 사라졌던 노신사와 동행을 통해 메마른 삶에 작은 희망을 제시한다. [빛은/조금이었어// 아주/조금이었지// 그래도 그게/빛이었거든]이라고 노래했던, 그와 아내의 인연을 만들어준 아내의 짧은 시와 마지막에 그를 다시 찾아온 또다른 태인이는 이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더욱 진하게 각인시켜준다.
『아홉 번 째 집 두 번째 대문』에는 이야기의 흐름을 바꿀 특별한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한 남자의 일상의 이야기들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담담하게 전개된다. 그런데도 의외로 가독성은 높다. 책장이 금방금방 넘어간다. 현재에서는 대필 작가로의 일상들이 반복되긴 하지만 지루하기 보다는 대필가라는 생소한 직업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산 자의 세상에 죽은 자의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이야기는 또다른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플래시백 처리로 등장하는 과거의 이야기에서는 태인이가 겪는 사고들이 독자를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 죽은 자들을 보는 주인공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어느새 모호해지면서 소설은 몽환적인 판타지 분위기를 띤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소설의 끝자락에 다다르게 된다.
이 소설을 읽는 또다른 재미는 앞서 말했듯 주인공의 직업으로 설정된 대필 작가에 대한 부분이다. 출판계에서는 암암리에 알고 있지만 독자들은 좀처럼 알 수 없는 베일에 싸인 존재인 대필 작가. 소설에는 그들에 대한 세세한 부분들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를 찾아온 다양한 의뢰인들과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은 채 글의 수정을 요구하는 의로인의 모습은 물론 같은 내용의 글을 쓰더라도 대필 작가는 독자가 아닌 의뢰인의 마음에 드는 글을 써야 한다던 글쓰기의 규칙이 대필 작가의 애환을 단적으로 전해주는 듯했다. 이런 리얼리티들은 실제로 대필가 시절을 보낸 작가 자신의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필 작가로 남의 이야기를 옮겨주던 주인공은 소설을 써보라고 권하던 노신사를 만난 이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쓰기에 대해 조금씩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책의 제목이자 죽은 아내의 유품에서 발견한 문패에 새겨진 글자인 『아홉 번 째 집 두 번째 대문』의 의미는 책을 다 읽은 뒤에도 확실하게 와닿지는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을 통해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봤으나 제목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작가의 대답은 궁금증만 남겼을 뿐이다. 그러다 책을 덮은 다음날 아침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홉 번째 집’이 아내의 예언대로 다시 그에게 나타난 개를 말한다면 ‘두 번째 대문’은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삶, 즉 남의 이야기를 옮기는 대필 작가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진짜 작가로 거듭나는 인생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남편이 그러해주길 바라는 아내의 바람이 문패로 새겨진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홉 번 째 집 두 번째 대문』은 상처입은 주인공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는 과정을 잔잔하고 섬세하게 담아낸 따듯한 가족 소설이다. 인물들을 향한 작가의 온기어린 시선은 이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 준다. 또한 작가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채 죽은 자와 다름없는 방황하는 이들을 통해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남긴다. 쉽게 읽히나 그 속에 많은 생각거리들을 담고 있어 책을 덮은 후 더욱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드는 깊이있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책이 전하는 감동이 다음에 있을 ‘제 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 오탈자 (초판 1쇄)
- 14쪽 밑에서 4번째 줄 : 김밥 집 밖엔 → 김밥집 밖엔 (’집’이 ’영업을 하는 가게’를 뜻할 경우엔 붙여쓰는 게 원칙)
- 195쪽 맨 밑줄 : 당구장 → 탁구장 (글의 전후를 살펴볼 때 당구장은 탁구장의 오탈자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