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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청소년문학 16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집 근처 정류장 앞 제과점은 24시간 불을 밝히고 영업을 한다. 드나드는 손님에 비해 많은 양의 빵을 만드는가 싶더니 대량의 박스가 포장되어 택배차에 실려나간다. 낮 동안 가게를 지키는 어린 소녀와 빵을 고르며 재료를 묻는 손님에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갓난아이의 간을 말려 빻은 가루, 까마귀의 눈알 시럽, 라푼젤의 머리 비듬 등 황당무계한 소리를 늘어놓는 (소년의 판단에 따르면) '또라이 기질이 있는' 제빵사이자 주인이 구성원의 전부다. 바로 마법사의 빵집, 위저드 베이커리(wizard barkey)다.
엄마가 자살하고 아빠가 재혼을 하면서 소년은 새 엄마와 그녀의 어린 딸과 함께 살게 된다. 처음에는 제법 단란해 보이던 가정은 무심한 남편과 전처에 대한 새 엄마의 불만이 커지면서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새 엄마와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소년은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안전 지대를 찾아 숨어든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관계인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소년이 기댈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급기야 이복 동생의 성추행범이라는 누명을 쓴 채 집에서 도망친다.
자신을 지키려는 보호본능에 무작정 집을 나선 소년에게 유일하게 떠오른 안식처는 바로 '또라이' 제빵사가 있는 위저드 베이커리였다. 무턱대고 숨겨달라는 소년을 제빵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빵실의 오븐 안으로 인도하고, 그곳의 문을 연 순간 소년은 그곳에 숨겨져 있던 또다른 마법의 세계를 만난다. 그렇게 마법사 제빵사와 낮 동안 사람이 되는 파랑새 소녀, 그리고 가족을 피해 숨어든 소년의 동거가 시작되고, 평범하게만 보이던 '위저드 베이커리'의 숨겨진 비밀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미운 상대를 골탕 먹일 수 있는 '악마의 시나몬 쿠키', 100% 화해하게 해주는 '메이킹 피스 건포도 스콘', 학교나 회사에 땡땡이치고 싶은 날 도플 갱어를 불러주는 '도플갱어 피낭시에', 짝사랑 상대를 내것으로 만들어주는 '체인 월넛 프레첼' 등 이름만 들어도 구미가 당기는 이런 마법의 빵과 쿠키들은 마법사 제빵사가 운영하는 '위저드 베이커리 닷컴'에서 거래되는 품목들이다. 아, 상대에게 저주를 퍼붓는 '부두 인형'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타임 리와인드' 같은 강력한 제품도 홈페이지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과연 이런 걸 믿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마법의 힘을 빌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사람들의 주문은 끊이질 않는다. 위저드 베이커리 닷컴의 모든 품목에는 마법의 힘을 사용시 그 힘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지만, 마법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결과와 그에 따른 책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 결과 마법의 쿠키는 귀여운 장난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종종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감당하기 힘든 사건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접하며 소년은 인간의 숨겨진 욕망의 씁쓸함과 마주하게 된다.
- 지금껏 잘 견뎌왔다. 앞으로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타임 리와인더를 쓰지 못하게 한 불의의 사고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안다. 누군가 씹다 뱉어버린 껌 같은 삶이라도 나는 그걸 견디어 그 속에 얼마 남지 않은 단물까지 집요하게 뽑을 것이다.
마법을 쓴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고객의 딴지로 위저드 베이커리는 위험에 처하게 되면서 소년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진다. 그리고 소년은 다시 집으로 향한다. 한 손에는 새 엄마가 자신을 저주하기 위해 주문한 '부두인형'을, 다른 한 손에는 마법사가 던져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타임 리와인드'를 들고서. 그러나 집으로 들어간 소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고, 모든 사건의 전말이 명확하게 밝혀지지만 또다시 새로운 위험에 봉착한다. 타임 리와인드를 쥔 채 선택의 기로에 놓인 소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소설은 원하는 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타임 리와인드'를 든 소년의 선택이 낳을 수 있는, 한때 인기를 끌었던 티비 프로그램인 「인생극장」의 주인공처럼, 두 가지 버전의 결말을 함께 보여준다. 시간을 다시 과거로 되돌렸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도 있고, 현실의 난관을 견디고 이겨냄으로써 새로운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떤 선택이 옳았다고 함부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 따른 책임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 지금 주어진 삶은 이제껏 자신이 해온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판매되던 모든 마법의 빵에 새겨져 있던 경고이기도 하다.
- 추억이라니. 환상이라니. 그 모든 것은 내게 있어서는 줄곧 현재였으며 현실이었다. 마법이라는 것 또한 언제나 선택의 문제였을 뿐 꿈속의 망중한이 아니었다. (중략) 지금은 나의 과거와, 현재와, 어쩌면 올 수도 있는 미래를 향해 달린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마법의 빵집 '위저드 베이커리'를 중심으로 신비한 힘을 가진 마법의 빵을 만드는 마법사와 가장 친밀한 대상인 가족에게서 상처입고 방황하는 소년, 그리고 마법의 빵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통해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의 어두운 속내와 현대인들의 뒤틀린 욕망에 대해 폭로한다. 판타지와 미스터리, 호러의 요소가 적절히 뒤섞인 흡입력있는 이야기는 탄탄한 구성과 맞물려 한순간 독자들을 섬뜩하게 만든다.

구병모의 장편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는, 작년에 평단과 독자 양측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단숨에 주목받는 성장소설로 우뚝 섰던 김려령의 <완득이>에 이어 '제 2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의 행운을 거머쥔 수상작이다. 방황하는 십대의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는 전회 수상작인 <완득이>를, 판타지를 기본 바탕으로 뒀다는 점에서는 팀 보울러의 <리버보이>를 떠올리게 하지만, <위저드 베이커리>는 <완득이>보다는 무겁고 <리버보이>보다는 어둡다. 그러나 이 불편한 판타지는 우리 삶의 숨겨진 이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