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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만화책 - 캐릭터로 읽는 20세기 한국만화사, 한국만화 100년 특별기획
황민호 지음 / 가람기획 / 2009년 10월
평점 :

- 내 인생의 만화책 - 캐릭터로 읽는 20세기 한국만화사 | 황민호 | 가람기획 | 2009-10-15
어느날 저녁, 기분이 너무 우울해져 읽던 책을 덮고는 옆에 놓여있던 책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머릿 속에서 수십수만가지로 가지치기를 하는 우울함을 말끔하게 몰아낼 만큼 강력한 이야기 꺼리를 찾던 중 흥미진진한 여러 소설들을 제치고 빛의 속도로 내 눈에 꽂힌 책이 있었으니, 바로 만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황민호의 『내 인생의 만화책』이었다. 제목부터 만화와 함께 한 옛추억의 즐거움을 떠올리게 해줄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전해졌다고나 할까. 슬그머니 책을 꺼내들고는 이불 속으로 몸을 묻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얼마전 '한국만화 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열렸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한국 만화가 벌써 100살을 맞았구나,라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요즘은 자주 읽진 못하는 편이지만 평소 만화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또 제목으로만 전해들었던 전설의(?) 만화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세히 듣고 싶기도 해서 서울 나들이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지만 워낙 먼길이라 틈이 나질 않았다. 그 사이 전시회는 막을 내렸고. 올초 서울에서 돌아온 후에 파주에서 한국 만화 작품들을 전시중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만큼 짙은 아쉬움이 남았다.
한국 만화 전시회는 나와는 인연이 닿질 않는 모양이라며 체념할 때쯤 한국 만화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만화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책을 만났다. 내심 반가웠다. 전시회에서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이책을 통해 글로써 우리 만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렌다. 책표지에 앙증맞게 놓여있는 둘리와 독고탁, 까치, 고인돌, 주먹대장 등의 캐릭터들이 반갑고, 그와 함께 그들이 활약하던 만화를 보며 깔깔대던 내 어린날의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내 인생의 만화책』은 '캐릭터로 말하는 20세기 한국 만화사'라는 부제처럼 한국 만화의 전성기였던 1940년대부터 90년대를 풍미했던 대표 만화 캐릭터들을 통해 작가와 작품, 그 시대의 상황 등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엮어낸다. 1940-50년대를 다룬 1장에서는 제목만으로 전해들었던 '코주부'와 어렸을 때 얼핏 본 듯한 기억이 나는 '고바우'와 '주먹대장', 그리고 얼마전 파주에서 있었던 북쇼를 소개하는 티비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라이파이'가 등장한다. 전설적인 작품으로 들어는 봤지만, 그 시대보다 한참 후에야 태어난 내게는 많이 낯선 캐릭터였다.
그러나 2장 1960-70년대에는 여전히 먼 시대인 것 같은데 의외로 친숙한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지금까지 모 아이스크림 광고의 장수모델로 활약중인 '고인돌'을 비롯해 야구 천재 '독고탁'과 지금은 명실상부 최고의 스타캐릭터가 된 '둘리', 어린이 학습 신문에 늘 등장하던 '꺼벙이' 등이 그들이다. 저자가 말하는 작품은 잘 모르겠지만, 그림체를 보니 신문수나 윤승운, 김삼의 만화 또한 어렸을 때 신문에 연재된 걸 가끔씩 본 기억이 떠올랐다. '다모'나 '일지매'는 티비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그 존재를 알게 된 작품들이다. 반면 '땡이'나 '불나비' '독대' 등은 이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허영만의 이강토 역시 마찬가지.
1980년대를 다루는 3장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웬걸! 당시 어린이였던 내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캐릭터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둘리'와 '까치 오혜성' 정도가 전부였다. 이럴수가! 반쯤 감긴 눈의 '구영탄'마저 나의 기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고, '최강타'와 '고도리'는 저자를 통해 그 매력과 의미를 되짚었다. 기존의 만화들보다 성에 대해 보다 자유로운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 한희작의 작품들은 스포츠 신문에 연재되는 '야한' 만화라고 생각했었던 그것들이었다. 작가는 몰라도 그림체로 기억을 떠올리는 것 또한 만화의 재미가 아닐까 싶다.
4장에서는 한국 만화 전성기의 끝물에 해당하는 90년대 만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머리가 좀 더 굵었을 때임에도 아는 건 순정만화를 그리던 김동화가 성인 만화로 옮겼던 '이화' 뿐이었다. '영심이'로만 기억하는 배금택의 대표 캐릭터로 등장한 '변금련'은 물론이고, 김진태의 '황대장'이나 이명진의 '남궁건', 백성민의 '토끼' 역시 이책을 통해 처음으로 접했다. 어째 시대가 흐를수록 예전보다 아는 캐릭터가 더 줄어드는 건지. 순간 좋아하고, 나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한국 만화의 범주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2장의 6,70년대는 소개하는 캐릭터의 분량에서부터 다른 꼭지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4,5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해 기반을 다진 한국 만화들이 질적으로는 물론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던 시기란다. 점점 다양한 개성을 가진 캐릭터를 내세운 만화들이 등장했고 기존의 명랑만화에서 벗어나 시대물이나 본격적으로 성인들을 겨냥한 성인만화 등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시도하는 만화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후 거듭되는 불운으로 한국 만화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고 슬슬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국 만화는 나름의 길을 모색했고, 요즘 다시 살아나고 있다. 한국 만화를 사랑하는 팬으로도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다만 한국 만화 역사의 전체적 맥락에서 비중이 높고 중요한 만화와 캐릭터 들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야말로 내 인생에 기억되는 만화들과 겹치는 부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진주의 '하니'나 배금택의 '영심이'는, 초특급 스타인 '둘리'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티비 만화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화였음에도 이책에는 끼지 못했다. 물론 사람마다의 기준을 일일이 맞출 수가 없고, 또 그렇게 빠진 만화가 한둘이겠냐만은 그래도 섭섭한 걸 어쩌란 말인가. 하핫,
더불어 소위 '순정만화'로 분류되는 만화들에 대한 언급 또한 전혀 없는 것도 약간 서운했다. 한국 만화 계에서 순정만화라는 분야를 개척한 '순정만화 계의 대모'인 황미나 정도라면 이책에 한 꼭지 정도에 자리잡을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다. 다른 작가들처럼 매번 검은색의 긴 생머리 남자라는 중심 캐릭터도 있고, 현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적지 않다. 설마 그렇진 않았겠지만, 혹시라도 순정 만화라는 장르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내 인생의 순정만화' 같은, 순정만화의 캐릭터와 작품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후속편을 내는 어떨까. 당장 읽어줄 의향이 있는데 말이다. :)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이는 악역 고길동이 초기에는 저렇게 두루뭉술한 외모였다뉘! :)
이책을 읽는 동안 '내 인생의 만화책'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책을 보던 내 감성까지. 어린 나를 만화 세계로의 입문시킨 어린이 만화잡지 『보물섬』과 조금 머리가 굵어서는 또다른 세계로 인도한 순정만화 잡지 『르네상스』은 내 만화 인생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잡지들이다. 정말 재미있게 봤었던 김수정의 『아기 공룡 둘리』를 비롯해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황미나의 『안녕, 미스터 블랙』 과 『레드문』, 강경옥의 『별빛속에』, 김혜린의 『불의 검』과 『북해의 별』,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등이 연이어 반짝반짜기 빛을 냈다. 아아, 적다보니 후반부엔 죄다 순정만화구나. 아, 이원복 교수의 학습만화인 『먼나라 이웃나라』도 빼놓을 수 없다. 하핫,
황민호의 『내 인생의 만화』 는 한국 만화의 100년 중 전성기였던 50년 동안의 시간들을 통해 다양한 캐릭터들을 보여주고, 그속에서 우리 만화의 풍성한 이야기 꺼리들을 끄집어내 들려주는 푸짐한 만화 이야기 보따리다. 익숙한 만화라면 그것들을 보던 어린날의 추억들을 새록새록 떠올리는 재미가 있고, 기억이 날듯 말듯하다면 흐릿한 기억을 좀 더 또렷하게 새길 수도 있다. 처음 만난 낯선 캐릭터라면 그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이야기를 통해 경험하는 새로운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다. 즉,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캐릭터와 만화가 등장하든 크게 개의치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가 들려주는 만화 이야기들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그것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그의 글솜씨 또한 매력적이다. 그래서 한 번 잡으면 글의 재미와 추억의 맛에 푹 빠져 쉬이 내려놓지 않게 된다. 그러니 아예 화장실 다녀온 후 책을 펼치길. :)

이 책을 읽고는 예전에 열심히 모았던 '만화시리즈' 우표를 꺼내봤다.
어이쿠! 거기에 전설의 코주부, 고바우, 라이파이 등이 모두 있는 게 아닌가!
'만화시리즈 우표' 1회는 그 상징성을 생각해 최고의 수퍼스타 캐릭터인 '둘리'와
이책에도 처음에 등장하는 '고바우'가 그 모델로 나섰다.
아, 그리고 이책엔 안 나온 '하니'는 우표에서도 나왔다고! 그것도 3회 때!

위쪽 사진 아래쪽의 울긋불긋한 우표에 있는 것이 바로 산호의 '라이파이'다.
우표를 살 땐 저게 뭔지도 몰랐는데, 이제서야 오호!! 하고 감탄사를 내뿜는다.
독고탁과 고인돌, 일지매, 영심이, 꺼벙이 등등도 눈에 띄고.
무엇보다 황미나와 김혜린의 작품도 만화시리즈에 등장했다는 점!!
이젠 순정만화도 단순 로맨스가 아니라 작품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본다. :)

→ 가끔 인용된 만화가 잘못 실려 같은 장면이 중복되어 나오기도 한다.
다음쇄에서는 수정되어야 할 듯. (초판 1쇄)
+ 270쪽 1번째줄 외 여러곳 : 어리숙해 → 어수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