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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 자신을 비워 세상을 담는다
타니 아키라, 신한균 지음 / 아우라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작년에 〈신의 그릇〉이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의 측면에서 보고 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사기장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었는데, 그전까지는 가볍게 생각했던 왜란과 도자기의 관계를 자세히 그려내 꽤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소설에서 만나보지 못했던 사기장(도공)들의 이야기라는 점도 새로웠지만, 무엇보다 소설의 저자가 현직 사기장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직업 소설가가 아닌 터라 문체나 짜임새는 다소 투박한 면도 있었지만, 도자기 전문가인 만큼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릇이나 그것을 만드는 과정 등에 대한 묘사가 무척이나 생생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던 책이었다.
그 소설로 처음 만났던 사기장 신한균 님이 이번에 조선의 전통 사발에 대한 책을 펴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일본인 전문가 타니 아키라와 함께 공저한 〈사발, 자신을 비워 세상을 담다〉가 바로 그것이다. 소설 속에서 수없이 등장하며 온갖 찬사를 받던 조선의 사발들을 소개한 책이라니 호기심이 생겼다. 또한 일본에서는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조선의 사발들이 정작 그 본고장인 우리나라에서는 왜 제대로 된 분류명이나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무시받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들을 이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풀 수 있을 것도 같아 책을 잡았다.
한일 양국의 전문가가 함께 한 〈사발, 자신을 비워 세상을 담다〉는 조선에서 만들어졌지만 일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까지 이른 여러 조선의 명품 사발들에 대해 한국과 일본의 시선으로 바라 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두 저자가 함께 한 1장 한일의 차문화와 사발로 시작된 책은 이어 2장 한국의 명품 사발, 4장 한국 사기장이 바라본 조선사발은 우리나라의 사기장 신한균이, 3장 일본인이 애호하는 명품 조선사발 5장 명품 조선사발의 현재와 미래, 6장 일본의 조선사발 수용사는 일본인 저자 타니 아키라가 저술한 꼭지들이 서로 교차 구성되어 있다.
2장의 '한국의 명품 사발'에서는 현재 우리나라나 대영박물관에 보관중인 조선사발들을 그 사진과 함께 설명해 놓았고, 3장 '일본인이 애호하는 명품 조선사발'에서는 일본에 남아있는 조선사발들이 일본인들의 분류와 명칭으로 소개해 놓았다. 그런데 소개된 그릇수가 일본의 조선사발이 우리의 그것보다 3배를 훌쩍 넘긴다. 수량 뿐만 아니라 그 종류나 색깔, 모양 등도 훨씬 다양하다. 조선사발이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점차 사라지며 쇠락의 길을 걸은 반면 왜란을 통해 조선에서 사기장을 잡아간 일본에서는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기분이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4장에서는 한국 사기장인 신한균이 바라본 조선사발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저자는 조선사발을 크게 8개로 분류해 각각의 특징과 재료, 모양 등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해 준다. 중기 이후 차문화 점차 사라진 우리나라와 달리 현재까지 차문화를 계승해오고 있는 일본에서는 차사발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높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애지중지하는 조선사발들은 대개 그들의 기호에 맞았던 차사발들이고 그들의 방법에 따라 분류해 놓았다.
그래서인지 책에 소개되는 사발은 대부분 일본식 이름과 분류로 되어 있다. 공저자인 사기장 신한균이 우리의 분류와 이름을 적어두고 있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조선사발에 대한 이름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분류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이란다. 일본에서 인정받는 우리의 사발들이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에 사기장 신한균은 조선사발에 대해 설명하면서 기존의 잘못된 분류나 이름이 아닌, 제대로 된 새로운 분류와 명칭들을 제안한다.

책을 읽다보면 신한균의 소설 〈신의 그릇〉에 나왔던, 조선에서 건너온 차사발의 최고작으로 칭송되던 '이도 다완'이 등장한다. 일본인들이 지금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국보로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이도 다완은, 저자에 따르면,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단다. 이에 신한균은 노란색을 띠는 이 그릇을 '황도사발'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에 의해 비로소 이도 다완이 우리 이름을 가지게 된 셈이다.
여튼 소위 '신의 그릇'으로 불리는 그 '이도 다완'을 이책을 통해 처음으로 접했는데, 소설에 등장했던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쳐진 걸로 보아 '츠츠이츠츠 다완'이 아닐까 싶다. 작은 차사발 하나로 자신의 성을 지켰다니 가히 '신의 그릇'이라 칭할만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한 차사발에 대한 일본인들의 엄청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고. 글로만 묘사되던 조선사발들을 직접 사진으로 보며 그 특징과 차이점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이책을 보는 또다른 재미였다.
이책에는 여러가지 다양한 조선사발들이 등장한다. 하나같이 '명품 조선사발'이라고 하는데,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그저 투박한 질그릇 같은 사발들로 보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신의 그릇으로 불리는 황도사발(이도 다완)까지도 평범한 밥그릇으로 보일 정도니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도 그럴 것이 책에 등장하는 조선사발들은 '명품'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처럼 화려하지도 곱상하지도 않다. 부드럽기는커녕 흙의 질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투박하고 소박하다. 시골집의 부엌에서 흔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평범한 그릇들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 소박한 그릇 속에 담긴 자연의 깊은 맛을 높게 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명품 조선사발 사진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웃기게도, 얘들은 차를 무슨 밥그릇 만한 그릇에 마시나 하는 거였다. 일본인들이 차사발로 애용했다던 조선사발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밥그릇으로 써도 무방할 정도로 꽤 큼직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물론 사진이라 그 정확한 크기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일본인들이 최고로 치는 황도사발(이도 다완)만 하더라도 원래는 제사상에 올리는 밥그릇(제기)이었을 거라 추정하는 것만 봐도 적지 않은 크기임을 알 수 있다. 일본에 건너간 조선사발들은 대개 밥이나 반찬을 담는 제기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밥이나 반찬을 담았지만 일본인들의 차 취향과 맞아떨어진 셈이다. 그리고 차후 다도에 맞게 점차 변형되어 갔다. 일본의 주문에 만들어진 어본 다완들이 그 예이다.

조선사발은 원산지인 한국과 수출된 일본에서 전혀 다른 운명을 맞는다. 생활그릇으로 사용된 조선에서는 사발의 맥이 점차 쇠락하여 점차 사라진 반면 일본에서는 원래의 용도와 전혀 다른 용도인 차사발로 일본인들의 기호와 맞아떨어지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것이다. 그결과 일본에서는 조선사발을 최고의 명품으로 치며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그 명맥을 이어온 반면 한국에서는 안타깝게도 제대로 보관중인 조선사발이 턱없이 부족함은 물론 분류나 명칭 등 조선사발에 대한 체계조차 제대로 잡혀 있지 않다. 그런 가운데 그 존재조차 사라질 위기에 처한 조선사발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연구하는 사기장 신한균의 노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책에 등장하는 명품 조선사발들은 일본인의 차문화와 맞아떨어져 지금까지 높은 가치를 인정받으며 전해오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즉 우리의 시선이 아니라 일본인의 눈높이에서 명품으로 등극된 것들이다. 그 자체로 훌륭하기도 했겠지만, 그것들이 지금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일본인들의 차문화가 선호하는 특징들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보존하지 못한 조선의 훌륭한 사발들을 일본인들이 잘 간직한 것이 고맙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들의 다도 취향에 맞춰 평가된 그것들이 절대적 명품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명품 조선사발은 다도를 위해 생산된 것이기에 다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미학을 잘 알지 못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도는 일본 차문화의 한 형태일 뿐이다. 한국에는 한국의 차문화가 있고, 중국에는 중국의 차문화가 있다. 타국의 차문화에 대해 존중과 이해를 보이지 않는다면 차문화의 국제교류란 요원한 일일 것이다. 한국의 차문화에 입각한 명품 조선사발의 이해가 마땅히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일본의 다도 취향에 맞춰온 명품사발이 아닌, 다양한 차문화에 맞춘 새로운 명품사발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게 된다. (173쪽, 타니 아키라)
16세기 말까지 중국과 겨루어도 손색없는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진 도자기 종주국이었던 조선은 이후 도자기 기술이 점차 쇠락해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일본에마저 밀린다. 왜란을 통해 조선에서 도자기 기술자인 사기장들을 끌어오고 국가적 지원을 통해 전략적으로 도자기 산업을 육성해 지금까지 도자기 강국으로 군림하는 일본에 비해 기술을 빼앗기고 원래 갖고 있던 것마저 제대로 계승하지 못해 쇠퇴의 길을 걸어온 우리나라의 도자기 현실을 생각하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나 타국인 일본에서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고 있는 조선사발의 존재 또한 이땅의 후손으로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사발을 계승ㆍ재현하기 위해 대를 이어 노력하는 신정희ㆍ 신한균 부자 같은 이들이 있기에 그 앞날이 막막하지 만은 않을 듯하다. 그와 함께 우리 사발에 대한 대중의 관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우리 것을 바로 알아야 그것을 지켜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책이 우리 사발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 작은 밑거름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