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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행유전자 - 여행유전자따라 지구 한 바퀴
이진주 지음 / 가치창조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 내 안의 여행 유전자 | 이진주 | 가치창조 | 2009.08
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즐겁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밌다. 내가 가지 못한 낯선 장소에서 내가 보지 못한 낯선 사람들과 함께 했던, 몸으로 부딪치고 마음으로 깨달았던 그들을 통해 나 또한 삶의 또다른 이야기를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여행 에세이는, 최소한 내게는, 쉽게 피해가기 힘든 종류의 책이다.
여행에 대한 사람들의 설렘이 표출하는 여름이면 서점가에는 덩달아 여행에세이들이 쏟아진다. 덕분에 정작 여행을 떠나지 못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다양한 여정을 만날 수 있어 덩달아 즐거워진다. 그렇게 또 한 권의 여행 에세이를 만났다. 『내 안의 여행유전자』라니, 근사한 제목에 내몸 어딘가에도 잠자고 있던 여행유전자가 팔딱팔딱 뛰쳐나올 것 같다.
글쓴이 이진주는 책제목으로도 쓰인 여행유전자 - 'travelDNA'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블로거이기 전에 「기아체험 24시」라는 휴먼 다큐멘터리로 한국 방송 대상과 휴스턴 국제 필름 페스티벌 플래티넘 대상을 받았던 방송작가란다. 많은 여행에세이 중에 이책을 선택하는데 그녀의 독특한 이력이 솔직히 한몫했다. 휴먼 다큐의 작가라면 무엇보다 따듯한 온기를 품은 글을 쓸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고나 할까.
'여행유전자 따라 지구 한 바퀴'라는 부제처럼 『내 안의 여행유전자』에는 그녀의 발길이 닿았던 여러 나라의 다양한 장소가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여섯 개의 큰 꼭지를 두긴 했지만 이책에서 분류는 별로 의미가 없다. 그래서 다른 여행에세이처럼 나라별 또는 시간별 흐름을 기대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지구촌을 다녔던 그녀의 추억의 질량에 따라 분류된 여행의 기록들이 이책을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내 안의 여행유전자』는 저자의 일기장 같은 느낌을 준다. 여행에세이라는 것이 원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긴 하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여기저기를 자유분방하게 옮겨다니는 이책의 이야기들은 온전히 글쓴이의 추억과 감정에 충실하게 기대고 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처음엔 그런 흐름이 좀 낯설고 정신이 없었지만 차차 글 속의 감정 흐름에 마음을 맡기게 되자 이내 그녀와의 지구촌 추억 나들이가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책에는 짧은 글과 긴 글, 여행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과 겪었던 에피소드들이 적절히 섞여 있다. 역시나 방송작가답게 그녀의 글은 유려하다. 별달리 걸리는 것 없이 술술 읽힌다. 그녀의 화려한 언어 구사가 슬슬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따금 지나친 욕심에 수사가 길어지는 문장을 만나게 되면 잠시 한눈을 팔게 된다. 멋드러진 글도 좋지만 조금만 더 담백한 문장을 구사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말이다.
또한 글 사이사이에는 다양한 풍광들이 담긴 크고 작은 사진들이 실려 있다. 그중에는 멋진 사진들도 많다. 모두 저자가 찍은 것들이란다. 대부분의 사진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알 정도의 장소만 적혀 있다. 걔중에는 간혹 친절하게 설명이 달린 것도 있고 , 반대로 무심하게 휙 던져둔 것도 있다. 많은 이야기를 대신하는 한 장의 사진을 보며 그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직접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렇게 펼쳐지는 지구촌의 다채로운 모습들은, 근사하다.
온전하게 지구 한 바퀴라고 하기에는 유럽의 비중이 크긴 하지만, 그래도 각양각색의 사람들 속에서 겪은 에피소드들은 재미있었다. 아무 대가없이 끈 떨어진 가방을 꿰매어 준 인디아 할아버지처럼 낯선 이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훈훈해졌고, 베니스의 가짜 경찰이나 바로셀로나의 시민운동가의 사기 행각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며, 인도의 택시 나 베트남의 무인도 체험 보트의 당황스러운 일화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라 함께 킥킥댈 수 있었다. 그리고 콜롬비아 재난 지역의 사진들은 마음 한 켠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여행 당시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험난한 사건사고들도 시간이 지나면 용감무쌍한 무용담으로 바뀌고, 온갖 황당한 실수담은 웃음의 재료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들은 아련한 그리움을 내뿜는 즐거운 추억이 된다. 그런 추억들과 함께 길을 나섰던 우리들도 조금씩 성장해간다. 다리가 부러져 목발을 짚고서도 길을 나서는 그녀는 진정 여행유전자를 보유한 유랑인이다. 그리고 그녀의 자유분방한 글과 사진은 잠들어 있던 독자들의 여행유전자까지 슬며시 깨우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