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 노서아 가비 (Russian Coffee) | 김탁환 | 살림 | 2009.07  



김탁환 작가의 책을 몇 권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은 매번 읽는 속도가 더뎠다. 역사소설이라 지금과 다른 낯선 시대적 배경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문체 또한 가볍지 않아 천천히 곱씹으면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달라졌다. 구한말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를 소재로 한 유쾌한 사기극인 『노서아 가비(2009,살림)』에서 김탁환은 한결 가볍고 경쾌해진 문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내달린다. 책을 펼치자마자 순식간에 마지막 장에 이른다. 정말 김탁환 작가의 책이 맞는지 다시 살펴볼 정도였다.

평소 TV 오락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을 즐겨 보는데, 얼마전에 방영된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패러디한 '궁 밀리어네어 편'이 무척 재미있었다. 우리나라 고궁에 대한 다양한 지식들을 영화에서처럼 연상 퀴즈쇼 형식으로 재구성했었는데, 그걸 보다가 구한말 고종 황제께서 평소 즐겨 마시셨던 차가 다름아닌 커피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고종 황제와 커피라니! 프로그램 출연자들과 함께 정말? 진짜?라고 외칠 만큼 정말 뜻밖이었다. 하지만 안경을 쓰거나 양복을 입은 사진 속 고종 황제의 모습을 떠올려볼 때 커피를 즐기는 게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전히 아침마다 커피잔을 손에 들고 있는 고종 황제의 모습이 선뜻 그려지진 않지만 말이다.


대대로 역관 출신의 집에서 태어난 따냐는 외국의 여러 곳을 다니는 역관의 업을 가진 집안 내력 덕분에 어려서부터 다양한 외국어와 외국 문학과 신기한 여러 문물들을 접하며 자랐다. 풍요롭고 행복했던 시절은, 그러나 길지 않았다. 사신단을 수행하기 위해 청나라로 연행을 떠난 아버지가 천자의 하사품을 빼돌려 러시아로 달아나다가 즉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집안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된다. 하나 뿐인 딸을 평생 죄인의 딸로 비참하게 살게 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급히 따냐의 등을 떠밀었고, 그녀는 압록강을 건너 아버지가 즐겨 마시던 노서아 가비를 떠올리며 러시아행을 택한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렇게 시작된다. 

국경선에서 전전하다 뻬쩨르부르그까지 흘러간 따냐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전각기술을 인정받아 러시아 숲 전문 사기단인 얼음여우 일행에게 강제 스카웃을 당한다. 유럽 귀족들에게 러시아의 숲을 주인 몰래 팔아치우며 사기를 치던 중 우연히 조선인 사기꾼 이반을 만나게 되고, 조직에서 도망쳐 그와 새로운 사기단을 결성해 승률 100%의 막힘없는 사기 행각을 벌인다. 때마침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 일정에 맞춰 조선에서 사신단이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은 황제의 하사품을 노리고 사신단에 접근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일을 계기로 이반과 따냐는 다시 조선땅을 밟는다. 

뜻하지 않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해 있던 고종 황제의 커피 시중을 맡게 된 따냐는 노서아 가비, 즉 러시안 커피를 통해 고종과 인간적으로 대면하면서 차츰 그의 외로움에 연민을 느낀다. 그와 함께 의문에 싸여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밀들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따냐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고, 고종 황제와 자신과 노서아 가비를 둘러싼 새로운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 과연 따냐는 무사할 수 있을까.


이책은 세상 전체를 철저하게 속인 천재 사기꾼과 그런 사기꾼을 끝내 잡아내는 또다른 사기꾼의 이야기를 다룬 유쾌한 역사 사기극이다. 속고 속이는 사기 행각의 중심에 있는 따냐와 이반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가까운 동지이자 동시에 적이다. 누군가를 믿더라도 1%의 마음은 비워두는 따냐와 손 안에서 갖고 놀 듯 상대를 철저하게 속이는 이반이라는 매력적인 사기꾼 캐릭터와 그들이 벌이는 대범하고도 경쾌한 사기 행각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다. 

『노서아 가비』는 또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러시아 국경선을 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따냐의 이야기이며, 생명의 위협을 피해 일국의 왕이 다른 나라의 공사관에 몸을 의탁해야 했던 망국의 서글픈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냐의 개인적 비극은 고종 황제의 아관 파천으로 대표되는 민족적 비극으로 이어진다. 쓴 맛이 자신의 마음을 닮아 노서아 가비를 좋아한다는 고종의 말은 그래서 더 진하게 다가온다. 동시에 이 소설은 삶의 모든 이야기들을 커피의 쌉싸름한 맛으로 표현해 내는 커피 예찬서이기도 하다.

표지와 속지의 그림들이 어째 낯이 익다 했더니만, 먼지(munge)라는 닉네임으로 활동중인 일러스트레이터 박상희 씨의 그림이었다. 『커피홀릭's 노트』라는 커피 관련책을 출간하기도 했던 그녀는 커피 마니아답게 『노서아 가비』의 각 단락마다 나오는 일러스트에 다양한 커피 도구들을 선보이며 작은 재미를 선사한다. 처음 책을 봤을 때는 표지나 속지 그림이 너무 가벼운 것이 아닌가 조금 염려스웠는데, 책을 다 읽고 보니 이야기의 무게와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탁환 작가는 아관파천 시절 러시아 역관으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졌으나 몰락했던, 그러나 그 몰락을 받아들이지 못해 고종의 음독 살인을 시도했던 역관 김홍륙의 일화가 실린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을 보고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한말이라는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크고 작은 사기 행각과 아관파천, 음독 살해 시도 등을 다루지만 『노서아 가비』는 무겁지 않다. 오히려 시종일관 가볍고 경쾌하다. 그러나 작가는 그 안에 다양한 의미들을 깔아두는 걸 잊지 않았다. 재미삼아 가볍게 읽어도 좋고, 가벼움 속에 숨어있는 작가의 뜻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순식간에 다 읽은 후 마지막 책장을 덮자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로 만들기에 그만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 읽은 후 띠지를 보니 이미 출간과 동시에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와, 역시 빠르다. 러시아를 횡단하며 사기를 치는 사기단의 모습들이 영화 『놈,놈,놈』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눈이 찢어진 매력적인 사기꾼 이반이 어떤 배우를 통해 스크린에 부활하게 될지 궁금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영화로 만나볼 『노서아 가비』는 또 어떤 매력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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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yuk 2009-07-16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따냐는 무사한가요^^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무시했던 책인데...어울린다는 말씀을 들으니... 비로소 책을 읽고 싶어 지네요~
책이 나오자 마자 영화화하기로 결정했다는... 홍보문구를 봤는데, 정말 그런가 봅니다.
영화 나오기 전에 책을 읽어봐야 더 재미가 있겠네요^^

simple 2009-07-20 01:18   좋아요 0 | URL
앗, bunyuk 님 눈치가 백단이신데요? ㅎㅎ
저도 표지가 너무 가벼운 느낌이라 처음에 헉, 했는데 내용 또한 가벼워 나름 어울리더라구요.
책은 정말, 다 읽고나면 영화 한 편 본 듯한 그런 느낌이에요.
정말 딱! 이거 영화감이다!라는 말이 나오더라구요.
후다닥 순식간에 읽을 수 있고 또 나름 재미도 있으니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만나보시어요.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