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세계 - The Show Must Go 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배우 송강호와 감독 한재림이 만났다. 영화 <우아한 세계>는 그들이 함께 작업한 영화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을 자아낸다. <연애의 목적>으로 독특한 연애담을 선보이며 단숨에 주목받는 감독으로 떠오른 한재림 감독은 <우아한 세계>에서도 자신의 재능을 한껏 선보이며 장르 비틀기의 재미를 보여주고,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송강호는 역시나~ 관객의 기대치를 가뿐히 뛰어넘는 놀라운 연기를 선보인다. 그들의 찰떡궁합에 <우아한 세계>는 한층 우아한 영화로 거듭난다.

직업만 조폭일 뿐인 여타 다른 아버지들과 다를 바 없는 강인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조폭의 옷을 입은 '가족영화'다. 정해진 러닝 타임 안에서 극적인 상황 연출과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해 선택된 직업이 조폭일 뿐, 이 영화는 확실히 그의 직업인 '조폭'보다 '생활인 아버지'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생활인 아버지'를 잡아내는 감독의 연출력은 가히 놀랍다.

그러나 주인공의 직업이 조폭이고 조폭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한 축을 차지하니 이 영화는 또한 '조폭영화'다. '40대 가장'의 피곤과 고단함에 중심을 둔 전반부를 지나면 조폭들의 칼부림이 스크린을 핏빛으로 적신다. 요즘 유행하는 개그처럼 '이건 조폭영화도 아니고 가족영화도 아니여'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조폭영화이면서 가족영화가 아닐까 싶다.


 

피곤에 찌든 40대 가장 강인구. 천톤도 넘어보이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리며 멍한 눈으로 졸음운전을 하는 그의 모습이 화면 가득 채우는 영화의 오프닝은 앞으로 <우아한 세계>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은근슬쩍 보여준다. 그리고 피곤하고 피곤하고 피곤한,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이 시대의 아버지의 모습이 운전대를 잡고 졸고 있는 강인구에게 겹친다.

들개파 중간 보스인 강인구는 물도 잘 안 나오는 낡은 아파트에 살면서 정원이 딸리고 채광이 좋은 멋진 전원주택을 꿈꾼다. 이번에 잡은 건설업에서 크게 한 몫을 챙기면 그런 집으로 이사해 우아한 생활을 즐기리라 마음먹고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다.

지금 당장 캐나다에 유학중인 아들의 학비에도 허리가 휘고, 직장(?)에서는 무능한 넘버 2인 노상무의 견제로 피곤하며, 거기다 강제 계약으로 접수한 아파트 건설건 마저 기존 이권자들로 버티기와 상대 조직들의 견제로 순탄치 않다. 거기다 조폭인 아버지를 소 닭 보듯 하는 딸과 조폭생활을 청산하지 않는 남편을 원망어린 눈으로 보는 아내로 인해 그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진다. 이런 조폭 강인구의 모습은 직장 상사에게 치이고, 동료들과 서로 견제하며, 행여 후배들에게 밀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평범한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 마음이 아팠던 장면은 우연히 펼쳐본 딸의 일기장에서 자신을 경멸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글을 발견하던 부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딸에게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딸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는 아버지의 마음이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아버지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혀지지가 않았다.

또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의 엔딩씬이었다. 늘어진 런닝셔츠에 사각팬츠를 입은 강인구가 라면이 담긴 그릇을 들고 멍한 눈으로, 화면속의 행복해 죽을 것 같은 가족들을 보던 그 장면. 그들의 행복에서 혼자 소외된 자신의 초라함이 분노로 변해 잠시 폭발하지만 이내 그것마저 직접 치워야 하는 서글픔. 요즘 유행처럼 번진 소위 '기러기 아빠'의 모습이 그에게 덧씌워지면서 가족에게서 소외된 아버지의 분노와 서글픔과 처량함이 온 몸으로 느껴졌던 장면이었다. 이 영화의 가장 명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자녀들의 조기교육을 위해 가족들을 모두 해외로 보내고 혼자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기러기 아빠의 모습은 처음엔 처량하고 불쌍해 보이지만 이내 조금 한심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기유학 보낼 형편이 안되는 자의 질투인 지는 모르겠으나, 가족이란 가장 중요한 울타리를 깨고 돈 대주는 기계같은 초라함과 외로움까지 느껴야 할 만큼 유학이 중요한 것일까, 저들의 저런 희생이 과연 값진 것일까.. 뭐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작품성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우아한 세계>는 아주 재미있다. 눈물도 웃음도 그리고 한숨도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꽤나 리얼하다. 공사판에서 패싸움을 벌이는 조폭들의 모습이나 피곤에 찌들고 처량한 자신의 처지에 눈물을 삼키는 40대 가장의 팍팍한 삶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 리얼한 현실감은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와 캐릭터에 동화되어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또한 이 영화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내용을 중간중간 웃음을 유도하는 상황과 장치를 설정함으로써 가볍게 만들어 주는데, 예상치 못한 웃음코드는 이 영화를 더욱 즐겁게 볼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무거운 싸움씬에 쿵짝쿵짝~ 신나는 음악을 넣는 등 꽤나 유쾌했던 칸노 유코의 음악 또한 상당히 좋았다.


<연애의 목적>으로 충무로의 시선을 빼앗었던 한재림 감독은 그의 두 번째 작품 <우아한 세계>에서 자신의 재량을 한껏 뽐낸다. 이 작품으로 인해 그는 이제 충무로에서 가장 기대되는 감독 중 한 명으로 확실한 찜을 당했고, 관객들의 뇌리에 한.재.림.이란 이름 석자를 또렷이 새기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감독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놓았다. 

<우아한 세계>에서 보인 감독의 연출력을 볼 때 그런 대접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생활 누아르'라는 이색 장르를 내세우며 '누아르'라는 장르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일상 생활의 면면을 완벽하게 덧입히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우아한 세계>에서 송강호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송강호는 관객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음은 물론 그 이상을 보여주는 호연을 펼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카피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 시대 최고의 배우가 아닐런지. 

극한 감정을 한순간에 폭발해내는 연기의 달인이 설경구와 최민식이라면, 마치 우리의 주변을 보는 것 같은 '생활 연기'의 달인은 단연 송강호일 것이다. 스크린 속에서 마치 옆집 아저씨를 보는 것 같은 그 한없는 자연스러움이란!! 매번 그의 연기를 볼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친구인 현수에게 노회장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쏟는 장면이나 딸의 일기장을 보고 난 뒤에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모습, 티비속 단란한 가족을 보며 라면그릇을 들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하며 눈물 짓다가 이내 분노하던 장면 등은 강인구라는 인물을 한심해 하다가도 그를 동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그건 바로 배우 송강호의 힘일 것이다.

조폭과 평범한 아버지라는 극과 극의 캐릭터를 자연스레 넘나들며 한 몸으로 녹여내는 그의 연기는 이 영화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관객들조차도 하나같이 손가락을 치켜들게 만든다. 우리 시대에 이런 배우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다.


그 외 오달수, 박지영, 윤제문 등의 조연들도 호연을 선보인다. 톡톡 튀는 감초연기의 달인인 오달수는 역시나 막강한 포스를 뿜어내고 한동안 그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박지영은 조폭 남편을 둔 피곤한 주부 역을 멋지게 소화해 낸다. 무엇보다 <로망스>에서 비열한 형사를 징글징글하게 연기했던 윤제문은 몇 개 안되는 장면에서 내내 맞거나 찔리는 연기가 대부분이라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물론 극중에선 충분히 맞을 짓을 하는 캐릭터지만. 그리고 첫장면에 백사장 역으로 우정출연한 이대연의 그 리얼한 연기에 박수를 보낸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조폭을 그만두지 못하고 가족들과 점점 멀어지는 강인구.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의 책임감에 허덕이는 그를 보며 가슴이 뜨뜻해지다가도 여전히 자신이 무얼 잘못하고 있는 지 알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한심하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지면 '나는 강인구처럼 살지 말아야지'라는 생각보다 '아이고~ 우리 아부지~ 저렇게 외롭고 힘드셨구나! 오늘 집에 가서 힘껏 안아드리기라도 해야지. 앞으로 아부지한테 좀 더 잘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이 영화를 보는 2시간 동안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부양 가족과 생활에 갖혀 꼼짝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남의 이야기가 같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서글프게 웃고 있는 포스터 속의 송강호의 얼굴 옆에 얹혀있는 '웃어라, 아버지니까'라는 카피가 좀 더 가슴을 꽂혔다. 

후반부 피비린내가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혼신을 다한 연기와 훌륭한 연출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우아한 세계>는 후회하지 않을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 개봉 당시 평단의 반응에 비해, 그리고 나의 예상치보다 적은 흥행을 기록한 점은 내내 아쉬운 대목이다. 한재림 감독과 송강호가 만들어낸 <우아한 세계>는 우아한 세계를 꿈꾸지만 비루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네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다. 기회가 된다면 챙겨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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