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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의 마음 한가운데 서서
틱낫한 지음, 류가미 옮김 / 북북서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새해가 밝았지만 마음 한 켠이 여전히 어수선하다. 들썩이는 고민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이 어느새 새해 첫 달의 절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허무한 마음에 멍하니 책장을 들여다보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쌓여있는 책들과 그 사이사이 쌓여있는 먼지가 꼭 욕심을 껴안고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고 내 안의 먼지를 닦아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책을 책장에서 찾아 꺼내들었다. 바로 <틱낫한 스님의 마음 한가운데 서서>다.
고백하건데 난 틱낫한 스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별다른 관심도 없어서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 스님을 헛갈려하기도 했고, 한때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읽혔던 <화>가 스님의 저서라는 것도 얼마전에야 알았다(무식하다;). 불교 신자도 아니고 명상 관련 책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그동안 스님의 저서를 읽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저작년에 <두 친구>라는 그림책을 통해 처음으로 틱낫한 스님의 책을 접했다. 스님의 그림책이라기에 순전히 호기심에 읽었는데, 쥐와 고양이라는 단순한 구조를 통해 평화,라는 확고한 메시지를 전하던 내용이 참 인상적이었다. 우연히 접했던 그림책의 여운이 이번 책과의 만남을 이어준 셈이다.
마음 한가운데 서서,라는 제목도 좋았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이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건 책 표지에 적힌 글귀 때문이었다. '파도치는 세상에서 잔잔한 바다를 만나다'라는 문장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고통은 찻잔 속의 폭풍과도 같다. 찻잔 안을 들여다볼 때는 그 고통에 숨이 막힐 것 같지만, 눈을 들어 찻잔을 보면 고통은 찻잔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동에 지나지 않는다. 찻잔 그 자체는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평화로울 뿐이다.’
일부러 나 들으라고 적어놓은 듯한 문장들. 그렇다. 지금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고민은 현재라는 찻잔 안에서는 거대한 폭풍처럼 느껴지지만 인생이라는 찻잔 전체에서 보면 그저 작은 미풍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작은 소란에 세상 모든 고민을 짊어진 것처럼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였다. 가라앉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 같다. 좋은 문장의 힘이란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다.
<틱낫한의 마음 한가운데 서서>는 열 편의 우화로 채워져있다. 솔직히 처음엔 너무 진지하지 않을까,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내용들로 가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 기우였다. 우화,라는 말이 주는 느낌처럼 쉽고 편안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은 마치 옛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것처럼 재미있다. 그래서 금세 열 편의 이야기들을 뚝딱 다 읽게 된다.
그러나 이책의 우화들은 단지 가벼운 재미만을 추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짧막한 이야기 속에 그보다 더 긴 여운과 삶의 깨달음이 담겨있어 독자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래서 무작정 빨리 읽기 보다는 음미하듯 천천히 읽을 것을 권한다. 조금씩 곱씹다보면 미처 몰랐던 의미들을 하나씩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열 편의 이야기 모두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지금의 내 상황을 되돌아보게 하는 「들꽃 한 묶음」의 깨달음이 가장 큰 울림을 줬다. 논 아래에 묻어놓았다는 보물을 찾을 수 있는 힌트가 담겨있는 시(詩)를 연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현실의 일들에 얽매여 그럴 여유를 갖지 못하고, 시에만 몰두하기 위해 세상의 일에서 벗어났으나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보물'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눈 앞의 진짜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화 속 오빠에게 내 모습이 그대로 겹쳐졌다. 그래서인지 동생이 들려주는 깨달음의 말이 더욱 가슴을 쳤다.
- 논의 모든 곳이 보물이 숨겨질 수 있는 곳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아주 천천히 쟁기질을 하게 되었어요. 내가 갈고 있는 땅의 모든 곳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말이죠. 땅을 갈기 시작한 지 여드레째 되는 날이었을 거예요. 오후에 탑 근처에 있는 마지막 이랑을 갈고 있을 때, 문득 깨달았어요. 내가 갈고 있는 이 모든 곳들이 바로 보물이라는 것을 말이죠. (중략) 나는 생각했어요. 쟁기가 귀한 것은 바로 쟁기이기 때문이고, 물소가 귀한 것은 바로 물소이기 때문이라고… 흰 구름이 귀한 것도 그것이 흰 구름이기 때문이고, 뽕나무가 귀한 것도 그것이 뽕나무이기 때문이에요. 지금까지 우리가 찾던 보물은 특별한 형체를 가진 물건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찾는 것은 이 우주 안의 모든 존재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가치였어요. 우리도 역시 그러한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요. (65쪽)
그외에도 숲을 태우는 불길과 그것에 맞서는 작은 새를 통해 평화를 이야기하는 「옛날 옛적 숲 속에서」는 첫 번째 이야기인 만큼 그 여운도 강렬했고, 비슷한 주제의 「소년은 산에서 내려왔다」와 함께 베트남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키 큰 소나무들」과 「소나무 문」에서는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엿볼 수 있었고, 「외로운 분홍빛 물고기」에서는 보트 피플에 대한 참상 속에서도 그들을 돕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화들의 끝머리에는 거기에 얽힌 작은 이야기들을 간략히 밝혀놓았는데,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틱낫한 스님이 거쳐왔던 사건들, 베트남의 굴곡진 역사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마지막 책의 뒷부분에 실려있는 옮긴이의 글을 읽어보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일찍이 선불교에 몸을 담은 틱낫한 스님은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으나 곧 남북으로 갈려 전쟁을 치러야했던 조국의 슬픈 현실을 목격하며 종교인에서 사회운동가로, 다시 평화운동가로 변신한다. 그러나 그의 반전평화운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베트남 정부는 그의 입국을 금지하고, 사랑하는 조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타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틱낫한 스님은 보트 피플을 위한 수용소를 세우고 명상공동체 플럼 빌리지를 설립하는 등 계속해서 반전평화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책의 우화들은 대부분 이렇게 굴곡진 베트남의 아픈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책의 이야기들에 특히 공감하게 되는 건 베트남이 지나온 시간들이 우리들의 슬픈 역사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이 걸어온 길 못지 않게 험난한 삶의 여정을 걸어온 틱낫한 스님은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과 반전평화운동가들의 노력, 보트 피플의 참상과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 돌아가지 못하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 등이 담긴 이책을 통해 여전히 평화를, 사랑을, 용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그가 말하는 것이기에 평화와 사랑과 용서가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틱낫한의 마음 한가운데 서서>는 매순간 고통으로 가득한 인간의 삶을 초월하는 방법보다는 우리 곁에 잔존하는 고통을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그 가운데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노력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님은 단순하고 짧은 우화를 통해 이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공통되는 삶의 깨달음을 건져올리는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 그래서 우화 속의 이야기들은 베트남의 아픈 역사이기도 하고, 틱낫한 스님의 질곡많은 개인사의 기록이기도 하며, 동시에 지금 내 삶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이책의 이야기들은 더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