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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
마이클 티어노 지음, 김윤철 옮김 / 아우라 / 2008년 11월
평점 :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 때면 으레 우리 앞의 불투명한 미래와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건지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진정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푸념하면 가끔 주변의 지인들이 글쓰기를 제대로(?) 해보는 건 어떠냐며 근거없는 위로용 멘트를 날려 나를 당황시킨다. 글이라곤 전혀 쓰지 않는 그들에 비해 앞뒤 안 맞을지언정 뭐라도 끄적대는 나의 글솜씨가 조금은 더 나아보일지 모르겠지만 어디 그런 글쓰기로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으려고. 상대방의 접대용 멘트에 글은 아무나 쓰냐며 쓴웃음으로 답할 수 밖에.
가끔은 이런 글은 나도 쓰겠네,라는 거만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허섭한 책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든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감탄하게 만드는 책들이 훨씬 많다.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거나 기존의 이야기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변주해내는 작가들을 보면 부럽고 존경스럽다. 그들은 대체 어떻게 글을 쓰길래 그런 멋진 이야기를 뽑아내는 걸까. 책을 펼치고 이야기속으로 빠져들 때마다 궁금증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밥벌이할 글솜씨는 안되지만 그래도 소소한 글이나마 잘 써보고 싶은 욕심이 있기에 가끔 글쓰기 관련책들에도 눈길을 돌려 끌리는 책이 있으면 찾아읽곤 한다. 최근 진도가 안나가는 글쓰기에 낙심해 있던 쯔음 이책 제목에 바로 꽂혔다. 『스토리텔링의 비밀』, 마치 이책만 읽고 나면 이야기꾼의 비밀을 모두 얻을 것 같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매력적인 제목이다. 게다가 불멸의 고전인 아리스토텔레서의 『시학』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법 강의란다.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정작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기만 했던 『시학』을 이 기회에 접할 수 있다니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인 셈, 어찌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책장을 넘기는 순간 조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책은 보편적인 글쓰기가 아닌 『시학』을 바탕으로 한 영화적 글쓰기, 즉 시나리오 작법에 대한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이란 매력적인 제목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라는 부제에서 그만 '영화'를 놓쳐버렸던 것이다. 조금 아쉽고 당황스러웠지만 시나리오 또한 크게 보면 글쓰기의 하나이니 이왕 시작한 책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이책은 첫머리에서 '42페이지로 구성된 시나리오 쓰기에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최고의 책', '시나리오를 쓰기 위한 바이블'로 『시학』을 소개한다. 더불어 『시학』을 연구하는 학술논문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잘 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학』 입문서라고 독자를 안심시키기도 한다. 작가의 말처럼 이책은 2000년이 넘는 세월을 이기고 여전히 최고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살펴보되 그속에 포함된 수많은 개념을 분석하고 오늘날의 이야기 구조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그의 테크닉을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시나리오를 쓰는데 필요한 테크닉을 다룬 총 33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꼭지마다 핵심이 되는 『시학』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고 기본적인 해설을 곁들여 놓았다. 그리고 『시학』의 다소 추상적인 내용을 독자들에게 쉽게 납득시키기 위해 이미 널리 알려진 실제 영화를 예로 들어 시나리오 작접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나간다.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시학』의 테크닉들을 눈에 보이는 영화의 예를 통해 바로 적용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그럼에도 내게는 책의 내용이 그리 쉽진 않았고 때때로 멍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영화나 시나리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나름 영화를 꽤 봤다고 자부함에도 이책에 등장하는 영화의 절반 가까이 아직 못 본 영화여서 흥미와 이해도가 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저자가 제시한 영화는 『죠스』나 『대부』, 『글레디에이터』, 『타이타닉』처럼 대부분 아주 유명한 영화였지만 『시민 케인』처럼 아주 오래된 고전이나 『점원들』처럼 저예산 영화, 『블레어 워치』나 『펄프 픽션』, 『엔젤 하트』처럼 제목만 들어본 영화와 『악마의 씨』나 『로드 트립』, 『브렉퍼스트 클럽』처럼 제목조차 처음 들어보는 영화도 섞여있었다. 물론 『터미네이터』나 『록키』처럼 너무나 유명하지만 아직 못 본 영화도 있었지만. 책속에 등장한 영화들은 책의 뒷면에 따로 수록되어 있는데 책에 대한 감상과 별개로 나중에 따로 챙겨보고 싶어졌다. 물론 기피하는 장르인 호러는 제외하고.
또한 멋진 시나리오를 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그다지 참신하지는 않다. 『시학』이라는 고전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인지 저자가 말하는 것들은 다분히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내용들이었다. 미처 몰라서 못한다기 보다는 누구나 알지만 쉽게 실행하지 못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물론 영화의 시나리오를 쓸 때 비중을 두어야 하는 점과 주의해야 하는 점 등을 깨우칠 수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쉽게도 기존의 책보다 남다르게 신선한 점을 찾지는 못했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시학』을 바탕으로 소개되는 시나리오 작법 테크닉을 담은 책인 만큼 일반적인 글쓰기 방법이 궁금한 독자보다는 영화와 시나리오 작법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더욱 유용한 책이다. 책제목 앞에 '시나리오를 위한'이란 말을 넣어준다면 독자들이 이책이 품고 있는 내용을 좀 더 정확하게 눈치챌 수 있는 것은 물론 '시나리오 작법'이라는 확실한 관심사를 보유한 독자층의 관심을 더 쉽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