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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맛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평점 :

오현종, 최근 한국소설을 자주 접하고는 있지만 내겐 아직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아홉 가지 이야기가 담긴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단숨에 그녀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첫 장을 넘기고 첫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면서 첫눈에 반해버렸고, 아홉 가지의 색다른 이야기를 맛보면서 사랑에 빠져버렸다. 마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독이 든 사과를 먹은 백설공주처럼 나 또한 그녀가 건넨 <사과의 맛>을 연신 입맛을 다시며 맛있게 읽어내렸다. 물론 나는 백설공주처럼 쓰러지지도 오래 잠들지도 멋진 왕자를 만나지도 못 했지만, 그대신 빛나는 작가 오현종을 만나는 행운을 잡았다. 책을 펼칠 때의 놀라움이 책을 덮을 때까지 이어지는 즐거움이란! 간만에 만난 톡톡튀는 단편집이었다.
독특한 시선, 신선한 감각으로 그러나 차분하고 내밀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의 글은 참 재미있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최소한 그 단편은 끝을 내야 책을 덮을 수 있게 만든다. 읽는 재미 뿐만 아니라 그속에서 생각하고 고민할 것들을 하나둘 던져준다. 작가는 동화를 모티브로 하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속에 현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그래서 독자들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상황이나 상상으로 채워진 주인공들에게조차 거부감보다는 동시대의 풍경을 발견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속에 펼쳐지는 현실의 고단함은 어느새 내 이야기이자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오현종의 새로운 단편집 <사과의 맛>에는 제각각 다른 맛을 내는 아홉 가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책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단편 「상추, 라푼젤」, 「헨젤과 그레텔의 집」, 「수족관에는 인어가」, 「연못 속에는 인어가」 등은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너무나 유명한 동화 『라푼젤』, 『헨젤과 그레텔』, 『인어공주』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그러나 동화를 모티브로 한다고 해서 결말까지 동화와 같진 않다. 「상추, 라푼젤」은 동화를 유쾌하게 배반하고, 「헨젤과 그레텔의 집」은 버려진 아이들 대신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대는 가족을 보여주며, 「수족관에는 인어가」와 「연못 속에는 인어가」에는 슬픈 사랑 대신 비참한 삶에 허덕이는 ’인어’가 등장한다.
숱하게 들어왔던 익숙한 동화들은 작가 오현종의 손을 거치면서 멋지게 변주되어 현실의 옷을 입는다. 손자를 보느라 늙어서까지 꼼짝 못하는 이 시대의 부모님들, 숨쉬기조차 벅찬 현실에 밀려 버려진 노인들, 가족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장애우, 외국으로 시집와 외로움에 눈물 흘리는 외국인 신부 등 고단하고 남루한 일상이 담긴 현실의 풍경들이 이야기속에 흩어진다. 출발점은 동화지만 도착점은 현실인, 동화 비틀기와 미묘한 어울림을 맛보게 한 이책의 단편들은 신선한 충격이자 즐거운 만남이었다.
위의 단편들 외에 옛 연인을 잊지 못하는 「연금술의 밤」, 유산에 눈이 멀어 패륜을 저지르는 「열역학 제2법칙」, 우주시대에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로봇이 등장하는 「창백한 푸른 점」, 줄타기와 첫사랑을 놓지 못하는 「곡예사의 첫사랑」,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닭과 달걀」 등도 모두 맛깔스럽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낯익은 소재들을 작가는 예의 그 차분함을 유지하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첫 문장을 읽기 시작한 이상 독자들은 그 유혹을 뿌리칠 재간이 없다. 또한 한 편 한 편 자신만의 개성을 톡톡 터트리는 아홉 편의 이야기들와 그속에서 발견하는 우리들의 초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과의 맛>은 간만에 맛본 아주 짜릿한 맛의 단편집이었다.
보통 단편집들의 제목은 책에 수록된 단편 제목 중 하나를 내거는 게 일반적이기에 <사과의 맛> 또한 동일 제목의 단편이 책에 담겨있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 이야기는 아마도 동화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뻔한 추측까지. 그러나 섣부른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책속엔 「사과의 맛」이란 단편도 없고, 더구나 그 유래는 『백설공주』와는 아무 상관도 없음이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책 제목의 탄생을 밝히는 작가의 말이 참 근사해서 옮겨본다.
- '사과의 맛은 사과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고, 먹는 사람 입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맛은 사과와 먹는 사람 간의 접촉을 필요로 한다'라고 보르헤스가 인용했던 버클리 주교의 말을 종종 생각합니다. 기적이란 건 이 아홉 편의 이야기에 존재하는 것도, 나와 당신에게 각각 존재하는 것도 아니겠지요. 책갈피를 뒤적여 기적을 만들어준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작가의 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