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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생 텍쥐페리 지음, 강주헌 옮김 / 예담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생텍쥐페리의 대표작이자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어린 왕자>가 새롭게 출간됐다. 이전에도 워낙 많은 판본의 <어린 왕자>가 있었지만, 이책은 정식으로 생텍쥐페리의 원본 삽화의 라이센스를 사들여 출판한 책이란다. <어린 왕자>의 삽화가 책과는 별도의 저작권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기존의 수많은 <어린 왕자>가 그의 삽화를 무단으로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이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전자는 ’어린 왕자’의 삽화를 이용한 다양한 팬시상품들이 꾸준히 출시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충분히 수긍이 되지만, 후자는 조금 충격이었다.
어쨌든 정식으로 계약한 책이 출시되었고, 이책은 그점을 강조하고자 책표지 상단에 ’오리지널 삽화가 들어간 정식 한국어판’이란 글귀를 금박으로 큼지막하게 박아놓았다. 원본 삽화의 정식판인 만큼 최대한 삽화를 잘 살리기 위해 책의 판본을 크게 하고 속지는 고급재질을 사용하는 등 신경 쓴 점이 눈에 띈다. 고급스런 양장본 앞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린 왕자의 단독샷을 표지로 내걸었고, 거기다 출간기념 한정사은품으로 어린왕자 스탬프까지 덤으로 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한 권 정도는 소장하고 있을 만큼 포화상태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책이기에, <어린 왕자>의 팬이라면 이런 정성에 살며시 눈길이 돌아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어린 왕자>가 내 손에 들려졌다.
- 수백만 개의 별들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그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요.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행복할 수 있어요.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내 꽃이 저기 어딘가에 있겠지······’라고 생각할 거라고요. 하지만 양이 그 꽃을 먹어버린다면, 그 사람한테는 갑자기 모든 별이 빛을 잃은 기분일 거라고요! (41쪽)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때가 초등학교 때였나, 중학교 때였나. 언니의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을 뒤적이다 군데군데 그림이 그려진 이책을 발견하곤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제목도 익숙했지만, 책도 얇고 글자도 큼지막했지만, 그림도 넉넉하게 실려있었지만, 그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땐 이책의 내용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단순한 동화같은 이야기의 행간 속에 숨겨져 있는 뜻들을 헤아리기엔 그땐 너무 어렸던 듯 하다.
그러다 섬세한 심리묘사가 일품인 만화가 강경옥 님의 작품에 한창 심취해 있을 때쯤 학원물인 <17세의 나레이션>을 통해 ’어린 왕자와 여우’를 다시 만났다. 사춘기는 이미 지났을 때였지만, 한창 사춘기를 겪는 여주인공을 통해 <어린 왕자>를, 여우가 말한 길들여짐을 다시금 떠올렸다. 내친김에 이번엔 나만의 <어린 왕자>를 한 권 장만했다. 여전히 쉽지 않았지만,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잠겼던 것 같다. 그중 노래가사로도 쓰인 어린왕자와 그의 장미, 만화에서도 만났던 어린왕자와 그에게 길들여진 여우 이야기의 잔상이 가장 진하게 남았었다.
- 그런데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 요즘엔 많이 잊혀진 거야.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 관계를 맺는다고?
- 그래. 내게 너는 아직 수많은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조그만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필요하지 않아. 물론 너한테도 내가 필요하지 않고. 너에게 나도 수많은 다른 여우와 비슷한 여우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거야. 나한테 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너한테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될 테니까······. (중략) 저길 봐! 밀밭이 보이지?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내게 아무 쓸모가 없어. 밀밭은 내게 아무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 슬픈 일이지! 하지만 너는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녔어. 따라서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밀밭이 아주 근사하게 보일 거야! 밀밭이 황금빛으로 물들 때 너를 기억나게 해줄 테니까. 그럼 나는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까지 사랑하게 될 거야······. (105-7 쪽)
몇년 전엔 우연히 인터넷에서 어린왕자의 그림과 함께 떠도는 글귀를 만났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가장 어렵다는 글, 출처가 <어린 왕자>로 되어있다. 가슴을 치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생소했다. <어린 왕자>에 정녕 저런 글귀가 있었던가. 우습게도 그글의 출처를 확인하고자 다시 <어린 왕자>를 읽기 시작했고, 책에는 그런 글귀가 없었다. 조금 황당했지만 그 덕분에 다시 <어린 왕자>를 읽었고, 이번엔 장미도 여우도 아닌, ’사람들 틈에 끼여있어도 외롭긴 마찬가지지..’라고 읖조리는 사막의 뱀을 발견했다. 어쩌면 그때 그 노란 뱀처럼 많이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외롭긴 마찬가지야. (90쪽)
그리고 이번에 다시 <어린 왕자>를 만났다. 4 번째 만남인가. 그동안 어린 소녀였던 나는 이미 이렇게 늙어버렸는데, 책 속의 어린 왕자는 여전히 어린 모습 그대로다. 어리다고 하기엔 너무 철학적이고, 생각이 많은, 사실 겉만 어리지 속은 애늙은인 우리의 어린 왕자. 여전히 가녀린 몸과 밀밭을 닮은 금발머리를 빛내며 소리도 없이 불시착한 비행사에게 다가가 양을 그려달라고 한다. 묻는 말엔 대답을 않고 선문답 하는 것도 여전하다. 그래도 그와 머무는 동안 조금씩 자신의 작은별과 하나뿐인 장미, 지구에 오기까지 거친 수많은 별들과 거기서 만난 이상한 어른들, 지구에 도착해 처음 만난 뱀과 길들임에 대해 알려준 여우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 참 재밌기도 할 거예요! 아저씬 5억 개의 작은 방울들을 갖고 , 난 5억 개의 우물을 가지면 말이에요······. (141 쪽)
지구에서의 모든 여행을 끝내고 마침내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로 돌아가던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텅빈 사막을 보는 알 수 없는 기분이란. 그러나 그가 자신의 별로 무사히 돌아갔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자신이 길들인 하나뿐인 장미를 위해 물을 주고 유리덮개를 씌우는 등의 책임을 다 할 테고, 비행사가 그려준 양이 바오밥나무를 먹어치우는 걸 보며 기뻐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여행중에 수없이 만난 어리석은 어른들을 닮은 삶을 살진 않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읽은 건 똑같은 <어린 왕자>인데, 이책은 신기하게도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른 캐릭터를, 다른 글귀를, 그리고 다른 깨달음의 맛을 건넨다. 처음엔 장미의 특별함이, 다음엔 여우의 길들여짐이, 그리고 뱀의 외로움을 거쳐 이번엔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이 내 마음에 콕 박힌다. 다시 읽을 때마다 예전에 무심코 지나갔던 단어들이 하나둘 되살아나 새로운 깨달음을 던져주는 건 참 즐거운 경험이다. 이제서야 조금씩 <어린 왕자>의 참맛을 알아가는 걸까. 매번 다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 작은 우화에 이렇게 깊고 다양한 의미들이 담겨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이책이 오랜 세월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오늘, 황금빛 밀밭의 머리색을 가진 이 생각 많은 작은 꼬마의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 잘 가. 비밀을 가르쳐줄게.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봐야만 잘 보인다는 거야. 정말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중략) 네가 네 장미꽃을 위해 바친 시간 때문에네 장미꽃이 그처럼 중요하게 된거야. (중략)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잊어벼렸어. 하지만 너는 이 진리를 잊어버리면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게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 하니까. 네 장미꽃을 책임져야 한다고······.(112-3 쪽)

☞ 삽화 정식 계약판임을 알리는 표지의 문구.

☞ 덤으로 주는 DIY 스탬프의 그림 살펴보기.

☞ 책 속 삽화. 이 책의 표지 외에도 <어린 왕자>의 표지로 많이 쓰이는 또다른 삽화이기도 하다.

☞ 다른 어린왕자 삽화와의 비교. 라이센스의 문제일뿐 삽화는 똑같다.
어린왕자가 지구의 여행을 끝내고 자기별로 돌아가는 모습의 삽화. 이걸 보는데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