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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을 닮은 방 1 - 세미콜론 그림소설 ㅣ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김한민 지음 / 세미콜론 / 2008년 1월
평점 :

예전에 개봉한 일본영화 중에 <사토라레>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의 마음 속 생각이 주변 사람들에게 그대로 생중계된다는 기발한 설정이 빛나는 영화였는데, 이책에서 혼잣말을 하는 무이와 그런 무이의 혼잣말을 녹음하는 누나를 보면서 문득 그 영화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물론 책에서의 혼잣말은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해지지만 나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혼잣말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면?이란 설정속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든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공통점을 가진다. 나의 혼잣말을 엿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녹음되어 한 권의 책으로 저장이 된다면? 그런 상상들이 담긴 책이 바로 <혜성을 닮은 방>이다.
꿈인 것을 자각하는 꿈 속, 공항 대기실에서 얼떨결에 혼잣말 면접을 본 '누나'는 그토록 바라던 취직에 성공한다. 언어에 대한 소질을 높이 평가받아 면접에 합격했지만, 이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 겨를도 없이 인턴 교육이 시작되고 앞으로 그녀가 배워야 할 쉽고도 어려운, 익숙하면서도 너무나 생소한 낯선 언어 학습에 들어간다. 이름하야 바로 혼.자.어! 우울한 표정으로 점철된, 그러나 꽤나 상냥한 그림자 조교를 따라 다른 사람의 혼자어를 엿듣고 녹음하는 법을 배운 '누나'는 아직 그것이 익숙하기도 전에 현장에 전격 투입된다. 바로 우리의 주인공 '무이'가 등장했기 때문. 자신에게 상담을 청해온 사람들의 고민을 찾기위해 무이는 에코도서관을 찾고, 그런 무이의 혼자어 녹음을 위해 누나가 뒤따르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림소설'을 표방하는 <혜성을 닮은 방>은 무이가 '혜성'을 통해 꿈과 현실을 자유로이 오가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듯 기존의 만화들처럼 지면을 칸으로 나누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형식을 취한다. 인기 만화가 강풀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될 듯. (물론 필요에 따라 칸나눔도 등장한다, 무이의 과거나 엔케의 회상 장면 등)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가늘고 섬세한 펜화가 시선을 사로잡고, 개성있는 그림체와 곳곳에 등장하는 기발한 소품들도 재미있다. 누나, 조교, 무이, 찬찬, 엔케, 소우주 같은 독특한 캐릭터와 혜성, 에코박물관, 아즈하, 원형터미널 등의 꿈의 공간을 통해 보여지는 작가의 톡톡튀는 상상력도 이 책의 매력.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의 전반에 깔려있는 깊이있는 철학적 사유들이다. 만남을 통해 삶의 목적을 전한다는 '무지개뱀 이론', 세상을 보는 무이만의 관점이 한껏 담긴 '오렌지숲 이론'과 '우주선 이론' 등의 독특한 이론들은 이책을 특별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것들은 무이가 만들어낸 낯선 용어인 'M.C-미디어 커리큘럼' 만큼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날것처럼 생생한 상상력을 만나는 즐거움을 전해준다. 그와 함께 작가는 현실의 문제들을 에코도서관 관리인 찬찬이나 원형터미널의 노숙자 엔케를 통해 자본 분배의 불균형과 그것이 가져오는 문제점들에 비유해 세상을 향한 생각을 피력하기도 한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인상적인 것은 다른이와의 소통의 부재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상담을 해주지만 정작 자신은 타인과 소통하는 법에 서툴러 혼자어 구사의 달인이 된 우리의 주인공 무이가 변화를 맞이한다는 것. 자신의 생각들을 이해해주는 사람들 - 삼보를 통해 만난 철학과 교수와 그의 친구 - 을 만난 무이가 그들과 새로운 관계 형성을 시도하고 조금씩 소통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현대인들의 소통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혜성을 닮은 방>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독특하다'. 4차원적 독특함이랄까. 등장하는 캐릭터에서부터 그들이 머무는 공간, 내뱉는 대화, 책의 전체 공기를 이루는 생각의 꼬리들까지 모두 톡톡 튄다. 작가의 기발한 상상은 신선한 표현을 통해 피어나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풀어내는 무이의 낯선 철학이론들은 자신만의 매력으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한 무이의 독특한 이론들과 함께 이야기의 또다른 축을 이루는 꿈의 세계의 음모자 GB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며 독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다만 이런 넘쳐나는 독특함은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단점으로 작용할 여지도 적지 않다. 무이의 정신세계와 4차원적 스토리에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면 이야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표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책에는 배꼽 잡는 웃음도, 긴장을 늦추지 못할 흥미진진함도 없다. 조용하고 잔잔한 가운데 예민한 감수성과 상큼한 상상력, 이야기 곳곳에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깊이있는 사고의 산물들이 반짝인다. 꿈과 현실, 기억, 마음, 관계 등 쉽지 않은 주제들을 만화라는 친근한 매체를 통해 풀어내되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 않게 무게중심을 잡고 있다. 무이의 본격적인 모험이 펼쳐진다는 2권에서는 어떤 상상력과 이론들이 등장할지 사뭇 궁금해진다.

- 우주선 이론. (117쪽)
이론 하나, 우주선이 이륙하고 나면 이륙을 위해 사용된 로켓들은 떨어져나가 바다에 버려진다.
이것은 책의 여정을 닮았다.
한 권의 책을 이루는 수많은 문장들을 중에 결국 한 줄의 메시지만이 독자의 내면에 도달하고,
나머지는 망각의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문장이 최종적으로 독자의 마음에 안착할까?
그 문장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책을 쓰지 않고 그 문장을 쓸 것이다.
오히려 모르기에 쓸 수 잇는 것이다.
이론 둘, 책의 여정은 어디서 끝날까.
미완의 책 한 권이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쳐 마침내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다.
진가를 알아보는 두 눈 앞에 책이 펼쳐지는 순간 비로소 책은 완성되고 저자는 사라진다.
'미지의 한 사람을 향한 책 쓰기'.
우주선 이론이다.

→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의 차례가 담긴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