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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순원 지음 / 뿔(웅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몇년 전 친구와 여행을 갔다가 1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를 본 적이 있다. 둘레가 몇 아름은 족히 넘을,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는 고목은 그 마을 가운데 자랑스레 뿌리를 내리고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이 파란 가을하늘 아래 노란 은행잎을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해서 살며시 다가가 악수하듯 손을 대어보았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결같이 저 자리를 지키며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왔구나, 저 은행나무에 비하면 나는 아직 풋내기에 불과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나무 앞에서 겸손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순원의 소설 <나무>는 제목 그대로 나무에 대한 이야기다. 예전에 내가 보았던 은행나무처럼 100년 가까이 한곳에 뿌리내린 할아버지 밤나무와 그 옆에 떨어진 한 톨의 밤에서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운 어린 손자 밤나무가 등장한다. 이제 막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준비를 하는 손자나무가 좀 더 훌륭한 밤나무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할아버지나무는 애정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한 해를 시작하는 첫 계절인 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장마와 태풍 등의 시련이 닥쳐오는 여름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자신의 결실을 맺는 가을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일년을 마무리하는 겨울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체득한 지혜를 손자나무에게 하나하나 가르쳐준다.
그러나 많은 열매를 맺고 싶은 욕심에 가득찬 손자나무는 무리하게 꽃을 피우느라 기력이 쇠하고 태풍 속에서도 열매를 놓치지 않으려 움켜쥐느라 바람에 몸이 꺾일 뻔한 위험을 겪는다. 당장 눈 앞의 열매를 위해 앞으로 더 많은 열매를 내어줄 밑거름인 몸을 내던지는 어리석음을 범하면서도 손자나무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눈 앞의 결실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런 손자나무도 열매를 익혀 세상에 내놓을 가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이제까지 납득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충고들을 이해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손자나무는 한층 성숙해진 밤나무로 자라난다.
<나무>에서 할아버지나무가 손자나무에게 가르쳐주는 것들은 한 해를 보내는 나무로서의 삶에 대한 마음가짐과 태도다. 그리고 작가는 할아버지나무의 입을 빌려 우리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좀 더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바로 눈 앞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손자나무의 어리석은 모습은 나 자신이나 우리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밤송이는 다가올 고난에 대비해 미리 서너 배의 꽃을 피우는 나무의 준비성과 중간중간 욕심을 버리는 겸손함과 지금의 일에 조급해하지 않는 여유로움이 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실수를 통해 한층 성숙해진 손자나무처럼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하지 않을런지.
따뜻함이 듬뿍 담겨있는 이순원의 <나무>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더불어 온가족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온기 가득한 소설이다.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다가 이책을 이루는 이야기가 작가님의 할아버지와 그집에 있는 나무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 감동이 더욱 커졌다. 나무를 내세운 이야기가 너무나 동화적이고 그 내용이 지극히 교훈적이긴 하지만, 요즘처럼 삭막한 세상에 이책처럼 따뜻한 책 한 권 만나는 것도 좋은 휴식이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