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방각본 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에 이은 김탁환의 백탑파 시리즈 그 세 번째 이야기 <열하광인>이 나왔다. 제목에서부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떠오르는 이 소설은 틀에 박힌 고문의 형식을 따르기보다 자유로운 문체와 내용으로 씌여진 연암의 『열하일기』를 주요쟁점으로 등장시킨다. 새로운 사상과 문체로 대표되는 신진세력인 백탑파와 그들의 도전을 무마시키려는 기존세력, 그리고 그 가운데 왕의 정치적 위치를 지키려는 정조대왕 사이에 피어나는 갈등은 소설 속에서 기존의 선비들이 숭상하던 틀에 박힌 고문의 형식이 아닌 자유롭고 창의적인 문체로 씌여진 『열하』(소설 속 『열하일기』)로 응축된다. 『열하』를 금서로 정한 왕과 기존세력, 그래도 『열하』가 보여주는 새로움을 버릴 수 없는 '열하광'들,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종친이자 '열하광'의 일원인 이명방은 은밀히 열리는 '열하광'의 모임에 참석하려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을 만난다. 의금부도사답게 그는 뛰어난 무예로 괴한들을 물리쳐 위기를 벗어났지만 다른 멤버들의 안위가 궁금해 두미포로 향했다가 열하광의 다른 일원인 역관 조명수가 자신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설상가상으로 정조로부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벗인 백탑파를 살피고 그중 『열하』를 읽는 자를 색출해 고하라는, 간자(間者) 즉 스파이 노릇을 하란 어명까지 받는다.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고 사모하는 스승과 벗들인 백탑파와 조선의 군왕인 정조의 어명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이명방에게 두미포에서 조명수의 시신이 떠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커다란 함정 속에 빠져든다.

<열하광인>은 한 편의 잘 짜여진 역사추리소설이다. 역사소설답게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들에 적응해 몰입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한 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가속도가 붙어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어진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계속 쏟아지고, 억울하게 연쇄살인범으로 몰린 채 필사적으로 진범을 찾아내려는 이명방을 좇아 독자인 나도 작가와의 머리 싸움을 시작한다. 진범을 향한 숨막히는 추적과 반전에 반전을 더해가던 이야기는 이명방의 단짝이자 '꽃미치광이(그의 호인 '화광(花狂)'을 풀어쓴 말)'인 김진이 등장으로 새로운 기로를 맞는다. 벗을 위해 해결사를 자처한 '천재 탐정' 김진의 활약으로 드디어 꼭꼭 숨어있던 범인의 모습이 드러나고, 그순간 그간 작가의 덫에 걸려 허우적댔던 이명방과 나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해진다. 속았다~싶으면서도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이 얼얼함, 이 맛에 추리소설을 읽는 것일 게다.

<열하광인>은 작년에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뿌리 깊은 나무>와 <영원한 제국>에 이어 꽤 오랫만에 푹 빠져들어 정신없이 읽은 한국형 팩션이다(올해 읽은 <바람의 화원>도 재미있었지만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에 부흥하지 못한 약간의 거부감이 내 발목을 잡았다;). <뿌리 깊은 나무>가 '한글창제'를, <영원한 제국>이 '정조독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면, <열하광인>은 새로운 사상과 문체의 대표작인 『열하일기』를 금서로 정하고 고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정조의 '문체반정'을 사건의 중심축에 놓는다. 최근 각종 소설과 티비 드라마에서 조선후기 개혁군주로서 정조대왕의 면모를 강조하는 것과 달리 <열하광인>은 정조대왕의 업적 중 어두운 부분인 '문체반정'과 그에 대응하는 백탑파의 갈등을 소설의 중심에 끌어놓는다. 물론 작가는 시대에 역행하는 '문체반정'이란 결단을 내리면서까지 '군왕'의 자리를 지켜야 했던 정조대왕의 고뇌도 놓치지 않고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금서로 정해졌음에도 많은 이들을 더욱더 빠져들게 했던 책 『열하』와 그런 『열하』에 대한 애정을 끊을 수 없었던 열하광인들에게 더욱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바로 <열하광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열하광인>은 김탁환의 백탑파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아쉽게도 백탑파 시리즈의 앞선 이야기인 <방각본 살인사건>과 <열녀문 이야기>를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채 세 번째 이야기인 <열하광인>을 먼저 읽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이기에 앞선 이야기들을 읽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해에 전혀 어려움은 없다. 그럼에도 순서대로 책을 읽어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이어온 등장 인물들 간의 인연들을 제대로 느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순서가 좀 바뀌긴 했지만, 이제 <열하광인>을 덮었으니 다시 백탑파 시리즈의 포문을 열었던 <방각본 살인사건>을 들춰볼까 한다.



참, 이책엔 잊혀졌거나 어느새 사라져버린 우리말과 옛말들이 참 많이 나온다. 각 바닥마다 주석이 몇 개씩 달릴 정도니 전체적으로 볼 때 꽤 많은 양일 것이다. 처음엔 매번 주석을 보려니 읽는 속도가 더뎌져 조금 성가셨는데 읽을수록 몰랐던 우리말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비록 책을 덮음과 거의 동시에 머리속에서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고운 우리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 더욱 즐거웠던 책이 아닐까 싶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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