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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람들마다 제각각 자신만의 사연이 담긴 책 한 권쯤은 있을 것이다.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각별히 아끼는 책 한 권쯤은 있지 않을런지. 책과의 추억을 더듬다보니 내게도 몇몇 책들이 떠오른다. 처음으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할 정도로 푹 빠져들어 읽었던 이은상 님의 <소설 동의보감>, 고딩 야ㆍ자시간에 로맨스 소설을 읽는 친구들 틈에서 꿋꿋하게 읽었던 <테스>ㆍ<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고전들, 뒤늦게 읽기 시작해 마지막엔 감동을 주체하지 못했던 조정래 님의 <태백산맥>, 대학 도서관에서 우연히 알게된 뒤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남아있는 쌍뻬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 등등. 기억을 따라가다보니 굴비마냥 책들이 줄줄 엮여져 나온다. 그리고 추억과 함께 그때의 감흥이 슬며시 전해진다.
또한 책내용이 아닌 '책'이란 사물 자체에 관련된 추억들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친구의 책장에서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웠던 기억, 같은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서먹했던 사람과 친해진 경험, 고심끝에 선물한 책을 상대가 흡족해할 때의 뿌듯함, 헤어진 누군가가 남긴 책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씁쓸함, 힘들 때 한 권의 책으로 힘을 얻었던 일들, 반면 누군가 때문에 그책까지 싫어하게 된 일들까지.. 하나하나 떠올리다보면 의외로 책과 얽힌 소소한 추억들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된다.
가쿠타 미쓰요의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에는 이렇게 책과 얽힌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이책의 주인공들은 낯선 곳에서 우연히 익숙한 책을 만나기도 하고, 외로울 때 한 권의 책을 좋은 친구 삼기도 한다. 우연히 펼친 책 사이에 타인의 편지를 발견해 읽기도 하고, 책을 통해 아픈 이별을 실감하거나 새로운 사랑을 만나거나 옛사랑을 추억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책에 얽힌 웃지못할 나만의 특별한 사연이 있기도 하고, 책을 통해 어린날의 따뜻했던 추억이나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추억하게 되기도 한다.
그중 『여행하는 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제일 먼저 읽은 단편이기도 하지만, 대학시절 헌책방에 판 책을 네팔과 아일랜드의 헌책방에서 다시 만난다는 내용이 꽤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만약 내가 그의 입장이 된다면 난 그때 어떤 기분일까, 세계를 누벼 다시 나를 찾은 책이 놀랍고 반갑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론 팔아버린 그책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기다보니 어느새 이야기는 끝나버린다. 몇 장 분량의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그때서야 이책이 단편집인줄 알았다. 그 신기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며 무궁무진하게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거라 상상하며 흥분했는데.. 이런 허무함이; orz
그렇지만 곧이어 펼쳐지는 또다른 색깔의 책이야기들도 그에 못지 않게 흥미로웠다. 어렸을 때 서점에서 훔친 책을 들고 그 서점을 다시 찾은 작가의 이야기인 『미쓰자와 서점』, 발렌타인날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릿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선물하며 조바심을 내는 『첫 발렌타인데이』, 같은 책장에서 서로의 책을 나누며 헤어짐을 실감하는 『그와 나의 책장』, 웃지못할 저주(?)가 담긴 책이야기를 전하는 『불행의 씨앗』 등이 기억에 남는다. 그외 다른 단편들도 살면서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듯한 일상의 소재에 책을 엮어 풀어낸 이야기들이라 모두 좋았다.
가쿠타 미쓰요는 <이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통해 처음 만났는데, 알고보니 <대안의 그녀>로 꽤 많은 독자를 거느린 작가라고 한다. 조용하고 차분한, 담담하면서도 약간은 건조한 듯한 글들이 바나나와 가오리를 연상하게 한다. 바나나를 통해 처음 일본소설을 접했고, 가오리의 책으로 흥미를 느꼈으며, 오쿠다 히데오와 이사카 고타로를 읽으며 지금의 일본소설을 헤엄쳤다. 그러다 그 코믹함도 슬슬 지겨워질 무렵 다시 조용히 일상을 이야기하는 가쿠타 미쓰요를 만났다. 이책에 실린 단편들은 '책'을 매개로 한다는 것 외엔 무척이나 소소하고 일상적인 소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작가는 특유의 섬세함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내고 짧은 이야기 속에 여운을 뿌린다.
<이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제목부터 내용까지 '책'을 담고 있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눈길이 머물 책이 아닐까 싶다. 잠깐 머무르며 쉬어가도 괜찮을 듯도 하다. 이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또한 책속에 담고 있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