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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쟁이 유씨
박지은 지음 / 풀그림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이제껏 염하는 장면을 실제로 본 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딱 한 번 뿐이다. 벌써 10년이나 흘렀는데도 멀리서 본 그 장면들이 어린 마음에 꽤 충격적이었는지 아직도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있다. 무척 엄한 분이라 할아버지와 각별한 정이 남아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큰소리로 호령하던 분이 저렇게 맥없이 누워 삼베에 싸여지는 모습을 보며 아무리 대단한 인생이라도 죽음 앞에선 참 아무것도 아니구나, 허망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얼마전 영화 <행복>에서 염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아무리 연기라지만 저렇게 무언가에 싸여 꽁꽁 묶이는 느낌이 참 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염이란 행위가 내겐 마치 삶의 끝과 비슷한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책의 주인공 염쟁이 유씨는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행위인 염을 업으로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오늘이 마지막 염을 하는 날이 될 거라며 그동안 한사코 거절하던 잡지사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다. 그리고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며칠전 자신을 배신한 애인에게 상처를 남기려고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을 선택했다 운좋게 살아난 주기자가 그의 집을 찾는다. 삶을 포기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던 주기자와 삶을 끝낸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염쟁이 유씨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다.
평생을 염쟁이로 살면서 수많은 시체를 염해왔던 유씨는 죽음뒤에 숨겨진, 또는 죽음이 남긴 수많은 사연들을 주기자에게 들려준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 가족의 사랑, 연인들의 사랑 등 유씨의 이야기는 큰 테두리에선 모두 사랑을 주제로 한다. 사실 인간사에서 사랑을 빼고 무엇이 남으랴. 여러가지 각양각색의 사랑을 담은 사연들이 많았는데, 그중 몇 해전 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남겼던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와 주인공 유씨의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사실 다른 어떤 에피소드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 알게 하기에 충분했다.
처음에 '염쟁이'라는 직업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이야기도 너무 칙칙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유쾌했고 이야기는 담담했다.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신파로 빠져 눈물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유씨의 경쾌한 말투는 죽음이란 무거운 소재를 좀 더 가볍고 일상적인 일로 변화시킨다. 유씨와 주기자의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유씨가 들려주는 사연들을 주기자가 정리하며 자신의 감상이 덧붙이는 패턴으로 이어진다. 에피소드 중간중간에 유씨의 가족사도 조금씩 언급되는데 그의 가슴 아픈 사연은 책의 말미에 밝혀지며 독자의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염쟁이 유씨>는 2007년 최장기 공연 기록을 세운 연극을 원작으로 좀 더 풍성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라고 한다. 연극공연의 문화혜택을 받기 어려운 지방민인지라 연극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연극 또한 웃음과 감동이 함께 어우러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염쟁이란 직업을 가진 유씨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책은 유씨가 들려주는 여러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든다. 극한의 상황인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것은 사연속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들과 같지 않을런지. 책을 덮으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 이제는 죽음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도, 너무 두렵게 느끼지도 않는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도 생각지도 않는다. (중략) 어제는 결코 기대하지 않아던 오늘이지만, 난 어느새 내일을 기대하고 있다. 난 이제 내일을 힘차게 살아갈 것이다.언제 찾아올지 모를 죽음, 그 순간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 죽음, 그 뒤에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204쪽)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연극의 에피소드 형식을 가져온 탓인지 유씨의 입을 통한 이야기들은 모두 너무 단순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몇 장 안에 끝나는 짧은 이야기들을 줄줄이 보이려다보니 등장인물이나 사건의 전개, 갈등 양상과 결말 등이 대부분 예측가능하다. 죽음을 맞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에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에 따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겠지만 그 중 몇몇 이야기는 좀 더 복합적으로 깊이있는 사연을 전해도 좋지 않았을까. 물론 주인공 유씨의 이야기가 그런 형식에 가깝긴 하나, 그마저도 유씨의 아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함구한 채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어 버려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었다. (물론 아들에게 일어난 일을 독자의 몫으로 넘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허전한 건 어쩔 수 없다;)
- 유씨가 주기자와 만난지 얼마 안되어 하는 대사. 무심히 읽었다가 참 많이 웃었다. ^^
"말 나온 김에 우리나라 어린이 사망 원인 1위가 뭔 줄 알어?"
"뭔가요?"
"운동장에 금 그어 놓고 놀이하다가 금 밟고 죽는겨. 제일 원통한 일이지. 누구나 한번씩은 경험해 봤을겨." (중략)
"그럼 어른들의 사망 원인 1위는 뭔지 알어?" (중략)
"광 팔고 죽는 거지! 그란디 난 당최 이해가 안 가. 왜 넘 죽은 상갓집 가서 제우 광 팔고 죽어? 그냥 곡이나 혀 주다 오면 되지. 허허 참~ "
"그러니 한삼해 죽겠는 거죠." (20~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