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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아카데미 ㅣ 해를 담은 책그릇 1
섀넌 헤일 지음, 공경희 옮김, 이혜진 삽화 / 책그릇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어린이 소설을 자주 읽진 않지만 선물용 책을 찾으면서 이것저것 읽곤 하는데 오랫만에 맘에 쏙 드는 책을 만났다. 섀넌 헤일의 <프린세스 아카데미>가 바로 그것. 솔직히 읽기 전엔 어린이 동화책의 왕자 공주가 연상되는 제목이라 썩 내키진 않았었다. 그러나 책띠지에 빼곡히 적힌 수상경력이 증명하듯 책을 덮을 땐 흐뭇한 웃음을 흘릴 수 있는 책이었다. <샬롯의 거미줄> 이후 오랫만에 맘에 꼭 드는 책을 만났다고나 할까.
미리는 댄랜드 왕국 보호령인 에스켈 산의 대리석 채석장 마을에서 살고 있는 열네 살 된 소녀다. 나이보다 작고 가냘픈 미리는 마을의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채석장에 나가 아빠를 돕고 싶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자신이 보잘 것 없기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채석장에 나가는 대신 집안일과 염소를 돌보며 외로움을 달래지만 미리의 마음은 허전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날 왕의 사절이 나타나 에스켈 산의 소녀들 중에서 왕자비를 뽑을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그에 따라 왕자비 기준에 적합한 스무 명의 소녀들은 왕자비가 될 교육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나 '프린세스 아카데미'로 향한다. 소녀들의 교육을 맡은 올라나 선생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산소녀들을 무시하고 때때로 모욕적인 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교육방침에 절대복종할 것을 강요하며 그 규칙을 조금만 어겨도 벽장에 가두거나 집으로의 휴가를 없애는 등 혹독한 채벌을 가해 소녀들을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
올라나 선생의 매서운 교육 속에서 소녀들은 글자를 읽고 쓰는 법부터 시작해 왕자비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인 역사, 정치, 외교, 경제 등의 학문들을 배우고, 사교댄스나 궁중예절이나 대화법을 익혀나간다. 가난한 산속에서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소녀들은 글을 배우면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고, 경제나 역사 분야 등의 책을 읽으면서 지식들을 흡수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향해 눈을 뜨게 된다. 프린세스 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 소녀들에게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경제에 관한 책을 읽으며 미리는 에스켈 산의 대리석 가치를 알게 되고, 그 지식을 이용해 겨울이면 마을에 식량을 싣고 올라와 헐값에 대리석과 바꾸어 가던 상인들에게 공정한 거래를 요구해 전보다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수업시간에 배운 외교의 법칙을 이용해 그동안 소녀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던 올라나 선생에게 새로운 협상안을 제시해 자신들을 의견을 관철시키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한다. 미리를 비롯한 스무 명의 소녀들은 프린세스 아카데미를 통해 각자 변화되고 성장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또한 그러하다.
<프린세스 아카데미>는 제목 그대로 '왕자비 교육 학교'가 주요무대다. 집안일과 채석장일을 도우며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소녀들은 프린세스 아카데미의 교육을 통해 또다른 세상을 만나고 자신들의 비전을 고민하게 된다. 소녀들은 올라나 선생의 부당한 처사에 맞설 수 있는 용기와 도둑이라는 뜻밖의 난관을 침착하게 헤쳐낼 지혜를 얻게 되고, 무엇보다 왕자비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경쟁하지만 비난과 야유를 넘어 서로를 향해 용서와 포용,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한 소녀 미리는 프린세스 아카데미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사건들을 겪으면서 잘못된 일에 대항해 자기 생각을 또렷하게 말하고, 또래의 친구들을 통솔하는 리더쉽을 발휘하는 등 그동안 자신조차 몰랐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또한 채석장행을 허락치 않았던 이유를 통해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깨달았고, 산 아래 소녀라는 이유로 따돌렸던 브리타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면서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으며, 좋아하던 페더와의 사랑도 확인하게 된다. 미리 뿐만 아니라 브리타와 에사, 카르다 등도 프린세스 아카데미를 마치고 그전보다 한뼘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돌아온다.
<프린세스 아카데미>는 '왕자비 간택'이라는 목표로 시작되는 이야기지만 흔한 신데렐라류의 전개로 흐르지 않는 똑똑함을 보여준다. 소녀들의 선망의 대상인 왕자와 왕자비는 산소녀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계기로 작용할 뿐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왕자가 등장하나 그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비현실적 존재인 왕자는 오히려 소녀들에게 현실적인 꿈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작가 섀넌 헤일은 프린세스 아카데미를 거치면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해나가는 소녀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이 책은 미리를 비롯한 스무명의 소녀들이 가족의 소중함과 배움의 기쁨, 자신의 꿈을 깨달아가는 과정과 모험을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는 짜임새는 흠잡을 데 없고, 극의 재미나 긴장감 또한 훌륭하다. 에스켈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채석장의 말'이라는 판타지적 요소는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더불어 왕자를 통해 신분상승하려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배움과 노력을 통해 자기 삶을 만들어가려는 소녀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스스로 개척하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전달한다.
이 책은 300여 쪽에 달하는 두께와 이야기의 진행 등으로 보아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의 어린이들에게 적당할 듯 하다. 소년이 읽어도 상관은 없지만 주인공 미리의 생각에 공감하며 재미를 느끼기엔 소년보다는 소녀들이 더 제격이 아닐까 싶다. 십대 소녀들이 엮어가는 우정, 사랑, 용기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책, <프린세스 아카데미>. 십대 초반의 자녀를 둔 부모님들께 추천하고픈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