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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정조대왕 - 조선의 이노베이터
이상각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왕조 오백년 중 가장 훌륭한 임금을 꼽으라면 아마 많은 이들이 세종대왕을 꼽을 것이다. 신생국이었던 조선의 기틀을 잡았고 민생의 안정을 꾀했으며 과학기술과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고 우리 민족 최고의 유산인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군주다. 그러나 세종대왕에 비견할 위대한 왕이 또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정조대왕이다.
두 임금 모두 학문이 깊고 백성을 위했으며 부국강병을 위해 힘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선왕인 태종의 비호 아래 준비된 조건에서 시작해 조선을 무르익게 한 왕이라면, 정조대왕은 막강한 권력으로 사도세자를 죽이고 정조 자신의 목숨까지 노리는 신하들과 위태롭게 대치한 상황 속에서 조선을 일으킨 군주다. 또한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 잡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잘못 굳어져 온 조선 후기의 부패정치를 깨고 새로운 개혁정치를 펼친 정조대왕의 업적이 개국 조선의 기반을 다진 세종대왕 못지 않게 위대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여러 번의 사화를 거쳐 붕당이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일당 독재정치로 흐르면서 신권이 왕권보다 더 강했던 조선 후기. 신하들은 왕까지도 마음대로 바꿀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선왕이었던 영조는 탕평책을 비롯한 여러 개혁정치로 이런 폐단을 없애려고 했으나 무수리의 자식이었던 자신을 왕으로 추대한 것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는 노론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고, 노론과 입장이 다른 소론을 지지했던 사도세자를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바쳐야 했다. 그로 인해 세손이었던 정조는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노론 의 압박과 음해와 빈약한 정치적 기반으로 불안한 출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정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밤낮으로 학문에 매진해 그 깊이가 내로라 하는 학자들 못지 않았고, 정세를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 또한 뛰어났다. 임금이 된 정조는 우선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이끈 원수들을 척결했고,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각 당의 인재를 고르게 등용했으며, 개혁의 기치를 내세워 부패한 제도들을 개선해 나갔다. 또한 규장각을 설치하여 당파에 물들지 않은 실력있는 인재들을 측근에 두었고,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설치하여 신변의 안전을 꾀했으며 점차 이를 증강시켜 군사적 기반으로 삼는 등 여러 방안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정조는 현명하게도 이러한 계획을 한꺼번에 무리하게 밀어부치지 않고 조금씩 점진적으로 진행하면서 상황에 따라 수위와 강도를 조절함으로써 집권당인 노론의 반발을 최소화했다. 또한 세계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 능력 위주의 관리 등용으로 서얼들에게도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고, 신해통공을 통해 상업을 물꼬를 틔웠으며, 비록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노비제도 혁파라는 파격적인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청나라를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연구하는 실학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이산 정조대왕 - 조선의 이노베이터>는 이러한 '조선 최고의 개혁군주'로서의 정조대왕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은, 정조의 꿈의 집합체였던 수원 화성을 통해 들여다 본 정조의 야망, 죄인의 누명을 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뛰어넘어 왕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낸 정조의 정치적 능력, 일당 독재정치로 썩을대로 썩은 현실에 개혁의 칼날을 휘두른 정조의 개혁정치, 그리고 그의 뜻을 돕거나 방해한 정조 주변의 인물들이라는 네 가지의 큰 틀을 통해 인간 이산에서 성군 정조에 이르기까지 그의 다양한 면을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정조의 지휘 아래 정약용의 거중기로 치밀하게 지어진 수원 화성은 단순한 신도시가 아닌 정조의 모든 계획이 녹아있는 꿈의 집합체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세손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온갖 역모사건과 살해위협을 견뎌내야 했던 그의 고독과 어떻게 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강하게 만들지 고심하는 그의 시름이 이 책을 통해 그대로 전해오는 듯 했다. 또한 정조 주변의 온갖 인물들을 통해 권력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권력 뒤의 허망함, 충성과 배신, 정의와 원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답답했던 것은 개혁이라는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정체된 생각과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과 영달만을 꾀하려는 좁은 마음이었다. 나라의 먼 미래를 보지 못하고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조선을 살찌우려는 정조의 개혁정책에 사사건건 딴죽을 걸던 노론 세력의 모습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다른 당의 단점을 찾아내 헐뜯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현대 정치인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씁쓸하다. 어지럽고 복잡한 이 시대에 자신의 이익과 안위보다 백성과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고민했던 정조대왕을 본받은 지도자가 더욱 절실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평생을 걸쳐 힘을 쏟았던 개혁정치의 완성을 눈 앞에 두고 급작스레 생을 마감한 정조대왕. 49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맞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조선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정조가 단행했던 수많은 개혁조치들은 정조의 죽음과 함께 피어보지도 못한 채 시들었으며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동안 심환지를 필두로 한 노론 세력에 의해 모두 개혁 이전으로 원상복귀 되는 한심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조선의 르네상스는 제대로 피어보기도 전에 다시 쓰러졌다. 그리고 이후 이어진 세도정치는 지금의 아픈 우리 역사를 만들어냈다.
역사엔 가정이 없다지만 정조대왕이 조금 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면, 그래서 계획했던 개혁을 완성하고 썩어가고 있던 조선을 조금이나마 변화시켰다면 훗날 조선의 운명이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생각이 짙어질수록 그의 죽음은 더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조선 최고의 개혁군주이자 안타까운 임금 정조대왕, 그에 대한 논의가 앞으로 더욱 활발해져 꾸준한 재조명과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보다 많은 이들의 정조대왕의 큰 뜻을 접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