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갑자기 천사가
하이메 바일리 지음, 고인경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상류층 남자와 밑바닥 인생의 여자가 만나 서로의 삶을 구원하는 내용의 라틴 소설. 이것은 <그리고 갑자기 천사가>를 읽기 전에 이 책에 관해 내가 알던 정보의 전부다. '상류층 남자와 하류층 여자'라는 설정을 보자마자 <프리티 우먼>과 <파리의 연인> 같은 신데렐라 스토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근데 책 제목이 아닌 영화, 드라마 제목이 먼저 떠오르다뉘; ^ ^;). 이 책도 흔하고 상투적인 로맨스물? 하며 껄끄럽게 바라보는 나를 의식했는지 갑자기 '서로의 삶을 구원하는'이라는 구절에 확~ 눈에 들어온다. 그려~ 서로를 구원한다잖뉘~ 한 번 읽어보자구! 그렇게 이 책을 잡았다.

하얀 표지에 천사가 날개짓한다. 표지 너무 맘에 든다. 책장을 넘긴다. 곧 이야기를 온전히 차지하는 그와 그녀가 등장한다. 상류층 남자 훌리안, 그는 돈문제로 가족과 의절한 채 혼자 사는 작가다.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에 심하게 게으르다. 그러나 점차 자상남으로 변신한다. 밑바닥 인생의 여자 메르세데스, 그녀는 가족과 헤어진 채 평생을 남의집살이를 하던 늙고 뚱뚱한 오십대의 인디오 여성으로 훌리안의 집의 가정부다. 척박하고 피곤한 삶을 살지만 맑고 순수한 심성을 갖고 있는 날개없는 천사다.

'나는 돼지다. 우리집은 돼지우리다'라는 충격고백(?)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훌리안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찬 그는 세상과 단절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서 산다. 방문객이라고는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여자친구 안드레아가 전부다. 그러나 훌리안의 집이 돼지우리를 능가해 가면서 거미와 개미들로 뒤덮히게 되자 여자친구는 집을 청소하기 전에는 절대 그를 찾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고, 여자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훌리안은 가정부를 찾기위해 직업소개소를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메르세데스를 만난다. 뚱뚱하고 슬픈 표정의, 그러나 무척 착해보이는 그녀를. 그들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 그녀는 글 읽는 법을 몰라 한 번도 책을 읽은 적은 없지만 수많은 것을 내게 가르쳐 줄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용서하는 것이다. (300쪽)

훌리안의 집에 가정부로 취직한 메르세데스는 첫날부터 정열적인 기운으로 돼지우리 같던 그의 집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집안을 장악했던 거미와 개미를 없애고 곳곳에 쌓여있는 묵은 먼지를 닦아낸다. 메르세데스의 손길이 닿자 훌리안의 집은 새롭게 태어난다. 마치 다른 집처럼 깨끗하고 반짝반짝 윤이 난다. 일주일에 두 번 훌리안의 집으로 출근하는 메르세데스와의 관계가 이어지면서, 메르세데스는 훌리안의 집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도 청소하기 시작한다. 집을 어지럽히던 거미와 개미를 없앤 것처럼 그의 마음을 좀먹던 미움을 희석시킨다. 그리고 먼지를 닦아내듯 증오를 닦아내고 그 자리에 '용서'를 심어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 가정부로 팔린 메르세데스가 그 이후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훌리안은 그녀를 어머니와 만나게 해주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메르세데스를 위해 카라스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을 참아내는 훌리안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정작 지척에 사는 부모님을 십 년이 넘도록 찾아가지 않았다. 메르세데스를 핑계삼아 떠나는 카라스로의 여행은 어쩌면 훌리안 자신을 위한 여행일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메르세데스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난다. 다시 만난 어머니가 자신을 알아보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지만 메르세데스는 그녀를 용서하고 온전히 사랑한다. 그녀는 온몸으로 진정한 용서와 사랑을 보여준다. 이런 메르세데스의 모습은 할아버지의 유산 때문에 아버지와 의절한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훌리안을 변화시킨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손 내밀어 용서할 줄 아는 지혜를 알려주며, 마침내 훌리안이 십 년 만에 부모님을 만나러 갈 수 있게 용기를 건네준다.


- 나는 눈을 감고 돈 문제로, 결국에는 내게 아무 소용도 없었던 그놈의 돈 때문에 수많은 세월 동안 아버지를 미워했던 어리석음을 생각했다. 몸을 일으키며 아버지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선 말했다. "사랑해요, 파피." (304~5쪽)

상류층 남자와 하류층 여자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 어쭙잖은 로맨스 대신에 서로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는 우정을 끼워넣음으로써, 어설프고 흔한 삼류 로맨스 소설이 아닌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는 사랑스런 감동 소설로 태어난다. 또한 이 소설은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글 속에 '용서'라는 삶의 화두를 묻어두고, 그 온기를 웃음과 함께 버무려 독자에게 전한다.

소설은, 메르세데스를 보며 마음의 변화를 겪는 훌리안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과 진정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들고, 돈이란 물질적인 것 때문에 부자간의 인연까지 끊었던 훌리안이 다시 아버지를 찾아가 용서하고 서로 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가슴 따뜻한 감동을 전해준다. <그리고 갑자기 천사가>는 궁극적으로 '용서'와 '화해'을 이야기한다.


- 그리고 갑자기, 천사가 내 옆에 잠을 자고 있었다. (156쪽)

페루의 주목받는 작가 하이메 바일리의 2005년 스페인 플라네타 문학상 수상작인 <그리고 갑자기 천사가>는 무척이나 유쾌하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단순하고 깔끔한 문체는 유머러스하고 재치있는 표현들과 어우러져 빛을 내고,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와 그들 사이에 빚어지는 대화를 통해 웃음과 감동을 함께 전해준다. 또한 용서와 화해라는 진지한 주제를 무겁지 않게 밝고 경쾌하게 그려내고 있어 부담없이 편안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라틴소설 <그리고 갑자기 천사가>는 그 제목처럼 내게 갑자기 천사처럼 다가와 웃음과 감동을 함께 전해준 사랑스런 소설이다.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그의 기존 작품들은 이 책과 달리 다소 선정적이고 풍자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니 조금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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