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토지 제1부 1 - 박경리 원작
박경리 원작, 오세영 그림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을 거론할 때마다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박경리 님의 <토지>다. 주권을 빼앗기고 억압과 수탈 속에 해방을 일궈낸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수난사를 경남 하동의 조용한 시골인 평사리 마을 사람들의 굴곡많은 삶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해 내어 거대한 감동과 교훈을 준 대하소설 <토지>는 말이 필요없는 '걸작'이자 한국문학의 든든한 기둥이다.

이런 작품이기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토지>의 완독을 한 번은 꿈꾸어 보지 않았을까 싶다. 기나긴 여정 끝에 완독의 기쁨을 맛 본 사람들도 많겠지만, 방대한 분량의 기세에 눌려 나처럼 중도포기의 고배를 마신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10권 내외의 대하소설을 끝내기도 힘겨운 나에게 21권이라는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진 소설 <토지>의 완독은 하나의 로망이다. 쉽게 이루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 언젠가 꼭 마지막 권을 손에 잡는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있었는데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바로 박경리 님의 원작을 그대로 살린 <만화 토지>가 출간된다는 것이다. 아뉘~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와 동시에 '만화의 힘을 빌어 <토지>를 완독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발칙한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후후후.

만화가 오세영 님의 손을 거쳐 '만화'라는 형식으로 새롭게 태어난 <만화 토지>는 '박경리 원작'이란 카피를 전면에 내세울 만큼 원작에 충실한 작품임음을 강조하고 있다. 대부분의 리메이크 작품이 원작을 그대로 옮기기 보단 각색자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맛을 강조하며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반면, <만화 토지>는 작가 스스로 '원작을 훼손하는 일은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만큼 자신의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있다. 원작의 감동을 전해주는 그릇 역할에 만족하는 모습을 통해 <토지>에 대한 오세영 님의 깊은 애정과 신뢰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만화 토지>는 표현하는 형식이 만화일 뿐 마치 원작 소설을 그대로 읽는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사실 <토지>가 만화로 나온다고 했을 때 원작 소설이 품고 있는 방대한 내용과 그 속에 등장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인물들을 과연 만화의 형식으로 잘 표현해 낼 수 있을지 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건 기우엿다. <만화 토지> 1권만으로도 그런 의구심은 깨끗하게 해소된다. 작품 속 캐릭터들은 각각 고유의 성격과 특징들을 잘 나타내고 있고, 눈 앞에 펼쳐지는 그림과 글을 읽다보면 소설 속 본문이 그대로 머리에 떠오를 정도로 원작을 잘 살리고 있다. 

책의 앞머리엔 작가 오세영 님과 원작자 박경리 님의 글, 추천사, 그리고 <토지>에 대한 전반적인 작품 소개가 실려있다. 뒤이어 등장인물의 그림과 간략한 소개가 실려있는데, 다양하면서도 세심하게 표현된 캐릭터들이 인상적이다. 한 컷의 그림만으로도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얼굴들을 보며 작가의 역량에 감탄했고, 그 수많은 인물 중 어느 하나 겹쳐지는 특징이 없는 것을 보며 캐릭터 표현이 가장 힘들었다는 작가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그 중 어린 서희와 귀녀는 단연 압권이다.

만화 토지 1권은 토지의 주요 무대인 평사리와 주요 인물들이 소개로 시작된다. 곡식이 무르익는 풍요로운 한가위의 들판에서 시작되고, 주요인물인 서희와 봉순이, 길상이, 구천이, 윤씨 부인, 최치수 등을 비롯해 이용과 공월선, 강청댁과 임이네 같은 마을 사람들도 대거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거대한 파란을 일으키며 최첨판댁에 시련을 불러 일으킬 귀녀와 조준구도 등장한다.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은 조준구의 등장과 함께 끝난 1권에 이어 2권에선 어떤 소용돌이가 평사리를 덥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만화 토지>의 장점으로는 작가의 충실한 묘사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원작의 감동을 충분히 전해준다는 점이다. 또한 그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만화의 특성상 소설보다는 가독성이 훨씬 좋아서, 그동안 소설 <토지>의 방대함에 눌려 일독을 못했던 독자들도 비교적 수월하게 <토지>를 완독할 수 있게 해준다. 더불어 만화라는 형식으로 인해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 청소년들에게도 보다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으며 내용 또한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이 원작에 충실하다보니 너무 어린 아이들이 보기엔 적절하지 않은(그 적절함을 누구의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가 문제이긴 하지만;;) 장면들이 나오기도 한다. 인물들이 구사하는 말들이나 그 내용까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청소년 정도의 나이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만화라고 하면 으례히 아이들 책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내가 보기에 <만화 토지>는 아이들보단 오히려 어른들이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특히나 책이랑 안 친하고 게으른 어른들에겐 더없이 좋은 책일 듯 하다.

오세영 님이 4년여를 준비했고, 원작자 박경리 님이 더없이 흐뭇해하며 칭찬하셨다는 <만화 토지> 1부. 이제 겨우 1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이 한 권만으로도 앞으로 나올 2부, 3부를 기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토지>라는 거대한 여행길에 발을 들여놓은 <만화 토지>, 한국 문학의 거대한 획을 그은 박경리 님의 <토지>처럼 우리 만화계의 거목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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